[브랜드 인사이트]
사진=인터브랜드
사진=인터브랜드
“AI로 만든 사진이 전시회에 출품됐다.” “AI가 제작한 그림이 국제 어워드에서 수상했다.” “텍스트 몇 줄만 입력해도 브랜딩 시안이 자동 생성된다.”

어도비 파이어플라이, 캔바의 인공지능(AI) 추천 기능, 미드저니, 달리, 런웨이 같은 플랫폼은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다. 구글의 나노 바나나에서 시드림까지 포토샵 환경에 통합되면서 AI는 디자이너의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브랜드 로고, 광고 소재, 제품 패키지, SNS 콘텐츠까지 AI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들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코카콜라는 AI로 제작한 광고를 선보였고 리바이스는 캠페인에 AI 모델 이미지를 도입했다.

영국의 한 스타트업은 로고와 컬러 팔레트, 타이포그래피 등을 자동으로 생성하는 브랜드 키트 서비스를 출시했다.

국내 기업들 역시 제작 효율성을 위해 AI를 도입하고 있으며 일부는 디자이너의 역할을 ‘제작자’에서 ‘감독자’로 바꾸는 실험을 시작했다. 즉 디자이너가 직접 만드는 시대에서 AI를 훈련하고 큐레이션 하며 최종 결과를 조율하는 시대로의 변화가 본격화된 것이다.

기대와 혼란이 교차하는 과도기

이 변화는 기회와 불안을 동시에 안겨준다. AI는 몇 분 안에 수십 개의 시안을 뽑아내고 무한한 스타일 변주를 제공한다. 하지만 경험이 적은 신입 디자이너는 불안하다.

‘내가 직접 그리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AI보다 더 빠르고 멋진 결과를 낼 방법은 없는 걸까’. 더 나아가 기업들은 AI를 이유로 디자인 예산을 줄이고 인력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AI 기술의 완성도는 아직 현저히 부족한데도 업계 전반은 마치 모든 것이 이미 가능해진 것처럼 들떠 있다. 이것이 바로 버블과 혼란의 시대다.

좋은 디자인은 효율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좋은 디자인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시니어 큐레이터이자 디자인 이론가 파올라 안토넬리는 좋은 디자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좋은 디자인이란 기술, 인지과학, 인간의 필요, 아름다움을 결합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르네상스적 태도다.” 즉 좋은 디자인은 단순히 빠르고 효율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기술, 인간의 감성, 사회적 맥락, 문화적 경험이 융합된 종합적 창조 행위다.

그렇다면 AI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수많은 감성적, 문화적, 사회적 정보를 알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한 인간만큼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AI만의 고유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을까.

관점, 결국 인간에게서 나온다

AI는 데이터를 조합해 인간이 놓칠 수 있는 연결성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명확한 방향성과 의도가 없는 결과물은 정체성 없는 시각적 잡탕에 불과하다. 여러 AI에 동일한 데이터와 프롬트를 공유하고 디자인 결과물을 원한다면 나오는 결과물은 서로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디자인팀에 동일한 데이터를 공유해서 결과물을 요청한다면 디자이너마다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다. 각자의 삶, 경험, 문화적 배경, 감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관점’(Point of View)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이 깊이 있는 해석과 감성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영화 ‘굿 윌 헌팅’ 한 장면을 보자.

주인공 윌(맷 데이먼)은 쌓아온 지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질문에 쉽고 영리하게 답할 수 있는 천재지만 심리학 교수 숀(로빈 윌리엄스)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책으로 읽었을지 모르지만 그 천장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눈물이 맺히는 경험은 해본 적이 없잖아.” 이런 예시는 AI가 가진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AI는 사랑, 문화, 예술을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살아낸 경험과 거기서 비롯된 감동은 이해할 수 없다.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다. AI는 형식적 결과물을 제시할 수 있지만 진짜 울림은 인간의 삶과 경험에서 나온다.

기술의 한계와 교훈 : 인터브랜드의 실험

약 2년 전 인터브랜드는 구글 AI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컴파운드콜렉티브와 함께 한국관광공사에 ‘AI POINT OF VIEW – KOREA’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AI에 한국을 보여줘”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이 실험은 AI가 재해석한 한국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새로운 발상 작업이었다.

인터브랜드는 높은 비주얼 퀄리티와 스토리라인, 사운드 디자인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뉴스에 방송되고 유튜브 채널 WLDO(왈도)에도 소개되면서 대중은 열광했다. 그러나 한국관광공사의 피드백은 달랐다.

“이 영상이 한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고객들이 한국을 보고 있는 건지 다른 동양 국가의 문화를 보고 있는 건지 본질적 정확성이 부족하다.” 이 경험은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신기술의 ‘새로움’에 매료된 나머지 정작 전달해야 할 메시지의 정확성을 놓쳤던 것이다. 아무리 혁신적이고 실험적이라 해도 맥락과 목적을 충족하지 못하면 콘텐츠는 공허한 실험에 불과하다. 이후 훨씬 더 신중하게 AI를 활용하게 됐다. 브랜드의 맥락과 본질, 그리고 정확성은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진=인터브랜드
사진=인터브랜드
인터브랜드 50주년, AI로 미래를 상상하다

인터브랜드는 AI를 단순한 실험적 도구로 끝내지 않고 실제 브랜드 디자인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모색해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터브랜드 50주년 기념 엠블렘 디자인 프로젝트다. 우리는 ‘Fifty’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는 ‘if’를 강조하며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50년 뒤 지금의 글로벌 100대 브랜드들은 어떤 모습일까?” 삼성, 현대, 기아, LG와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들의 미래를 가정해보고 그들이 50년 후 어떤 영역에서 새로운 역량을 펼칠 수 있을지 자유롭게 상상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은 단순한 스케치를 넘어 다양한 AI 프로그램을 통해 시각적 결과물로 구체화했다. AI는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명확한 아이디어와 콘텐츠였다.

상상력이라는 토대 위에 AI를 효율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활용했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인터브랜드는 AI를 무분별하게 도입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분명한 메시지와 목적이 있을 때 AI는 그것을 확장하고 가속하는 강력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기술은 도구, 본질은 인간

AI는 창의적 표현의 ‘민주화’를 열었다. 이제 누구나 이미지를 만들 수 있고, 더 많은 시안을 빠르게 제작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손쉽게 실험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러나 도구의 발전이 곧바로 디자인의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지 제작의 문턱이 낮아졌다고 해서 모두가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힘은 결국 경험과 감성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디자이너는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더 다양한 맥락과 문화를 이해하며, AI가 만들어준 시간적 여유를 깊은 고민과 높은 완성도로 채워야 한다.

지금의 효율성에 안주하기보다는 더 나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는 디자이너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의 버블과 혼란을 넘어설 수 있다. 이 변화의 시점에서 많은 이가 같은 목소리를 낸다.

“AI는 도구일 뿐이며 디자이너가 AI를 이끌어야 한다.” 결국 디자인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힘,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산업적 변화와 기술 혁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 하나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디자인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그 답은 언제나 기술과 인간성의 균형 속에 있다.
정하진 인터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진=인터브랜드
정하진 인터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진=인터브랜드
정하진 인터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