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65
  • 해적이 호화선을 붙잡고나서 배를 서로 교환한 뒤 돌려보내는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1717년 2월 ‘블랙샘’ 사무엘 벨라미가 이끄는 해적선 ‘술타나’는 카리브해에서 영국 호화 노예선 ‘위다’를 사흘 동안 뒤쫓았다. 경고사격 대포 한 발에 놀란 ‘위다’는 저항하지 않고 바로 항복했다. ‘블랙샘’은 ‘위다’에 대포를 옮겨 기함으로 삼고, 포로로 잡은 선장과 선원은 ‘술타나’를 타고 떠나게 했다. 해적이 포로를 배려하고 아량을 베푼 드문 사례다. 두 달 뒤 뉴잉글랜드 근처에서 중형 무역선을 나포한 뒤, ‘블랙샘’은 선장에게 해적으로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거절당했다. ‘블랙샘’은 선량한 선장에게 무역선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해적들이 반대하자 투표에 부쳐 결국 배에 불을 질러 바다에 가라앉혀야 했다. 못내 미안했는지, 그는 선장에게 변명했다. “그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려 하지 않아”(They scorn to do anyone a mischief, when it is not for their advantage). ‘바다의 로빈후드’로 알려진 ‘블랙샘’이 해적질 하는 방식이다. 따르는 해적들도 스스로 ‘로빈후드의 부하들’이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우리는 가난해서 해적이 되었고, 그들이 가진 것을 나눠 가질 뿐이다’는 것이다. 정당한 분노와 혁명적인 공감으로 다진 리더십이다. 해적들은 가발을 쓰지 않은 검은 생머리에 검은 머리띠를 두르고 검은 외투를 즐겨 걸친 그를 ‘블랙샘’ 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로빈후드’의 삶은 왜 그리 짧은가? 무역선을 불태운 며칠 뒤, 위용을 자랑하던 해적선 ‘위다’는 미국 매사추세츠 앞바다에서 갑작스러운 폭풍에 시달리다 결국 침몰했다. ‘블랙샘’을 포함해서 모두 144명이 물에 빠져 죽고 2명이 구조됐다. 향년 28세. 난폭한 해적에게 정의롭고 관대하며 민주적인 리더십이 어떻게 먹혔을까? ‘블랙샘’은 불과 1년 남짓한 해적 생활에서 약탈한 규모가 120만 달러로, 해적 1위(Forbes. 2008)로 평가된다. ‘블랙샘’이 제시한 정의 리더십은 ‘자포스’ 최고경영자(CEO)인 토니 셰이의 행복 리더십과 닮았다. ‘블랙샘’은 대중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의 횡포에 분노하고 로빈후드처럼 ‘정의로운 해적’을 비전으로 내세웠다. 셰이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단순한 기업 문화에 분노했다. 즐거움과 열정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행복 전달’이라는 깃발을 걸고 직원은 ‘행복 전도사’, 본인은 ‘최고행복경영자’라고 불렀다. 타성에 물든 조직에 낯선 비전을 심는 것은 쉽지 않다. ‘블랙샘’이 포로를 대하는 방식에 해적들은 처음에 거북해서 투표까지 하자고 했지만, 결국 ‘로빈후드의 부하들’이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셰이는 2013년 위계적인 기업 운영방식을 뒤엎는 홀라크러시(Holacracy)를 도입했다. 직책이 아니라 역할을 중심으로, 투명한 규칙 아래 스스로 책임지고 의사 결정하는 구조다. 수평적인 소통과 협업을 강조한 것이다. ‘덧없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블랙샘’도 셰이도 인생 최고의 정점에서 한창 젊은 나이에 엉뚱한 사고로 요절했다. ‘블랙샘’은 느닷없는 폭풍에 배가 침몰하면서 물에 빠져 죽었고, 셰이는 창고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로 불에 타 죽었다. 각각 향년 28세와 46세. ‘블랙샘’은 약탈 규모가 해적 1위에 올랐고, 셰이는 ‘자포스’를 ‘아마존’에 10억 달러(1조4000억 원)에 매각한 뒤다. 해적의 바다와 자본의 시장에서 각각 가장 빛나던 시기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혁신 리더는 삶을 옥죄는 현실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분노를 비전으로 바꾸고 공감을 얻어야 한다. ‘블랙샘’은 분노를 바로 공감으로 연결했다. “그들은 법이란 가면 아래 가난한 사람을 강탈하고, 우리는 용기라는 보호막 아래 부자를 약탈한다”(They rob the poor under the cover of law, and we plunder the rich under protection of our own courage). 셰이는 ‘신발 판매’를 행복을 전달하는 ‘고객서비스’로 공감을 창출했다. “자포스는 우연히 신발을 팔게 된 고객서비스 회사입니다”(Zappos is a customer service company that just happens to sell shoes).
     분노하고 공감하라_사무엘 벨라미 & 토니 셰이
    by 허두영
    2025.10.15 21:00:15
  • 매년 10월 초가 되면 한국 언론은 국정감사 보도에 몰두하지만, 세계 언론의 시선은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쏠린다. 인류가 만든 상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것으로 꼽는 노벨상은 수상자 개인을 넘어 한 나라의 학문 수준과 국력의 척도로까지 여겨진다. 올해 일본 열도는 특히 들떠 있다. 오사카대 사카구치 시몬 교수가 생리의학상을, 교토대 스스무 키타가와 교수가 화학상 수상자로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단숨에 두 명이나 배출하면서 일본의 역대 수상자는 모두 31명으로 늘었다. 한국의 2명과 대비된다. 노벨상 수상자 숫자보다 눈여겨봐야 할 건 내용이다. 일본 노벨상 수상자 31명 가운데 87%인 27명이 과학 분야 수상자다. 기초과학에서 일본이 얼마나 탄탄한 기반을 갖췄는지 웅변한다.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일본의 기술력은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미 우리는 2019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때문에 심각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 핵심 소재가 막히자 한국 산업은 휘청거렸다. 그제야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술 자립에 나섰지만, 여전히 격차는 크다. 일본의 기초과학은 왜 뿌리가 깊을까. 해답은 새로운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는 역사적 전통, 기술자와 과학을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가고시마의 센간엔 정원에서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근대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일본 최초로 반사로를 세우고 고품질 쇠를 뽑아 증기선과 대포를 만들었다. 동아시아가 칼과 조총에 머무르던 시대에 대포와 증기선은 전쟁 패러다임을 바꾼 첨단무기였다. 나리아키라는 개명 군주로 추앙받았고, 시마즈 가문은 메디치 가문에 비견될 만큼 존경을 받았다. 1865년 그가 선발해 영국에 보낸 유학생 17명은 훗날 사쓰마 번의 근대화 역사에 주춧돌이 되었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서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 동상은 160년 전의 그 순간을 기린다. 사쓰마와 적대 관계에 있던 조슈 번도 뒤지지 않았다. 조슈 번은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 5명을 영국에 파견했다. 이들이 귀국해 메이지유신의 핵심 세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같은 시기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스스로 문을 걸어 잠궜다. 조선과 일본의 기술력 격차는 그때 이미 벌어지기 시작한 건 아닌지 모른다. 나가사키 데지마도 중요한 단서다. 네덜란드는 218년 동안 일본과 독점적 교역을 하며 서양 학문을 전했다. 난학(蘭學)이라 불린 이 흐름을 통해 서양 의학과 천문학, 화학, 지리학이 일본에 들어왔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외부의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받아들였다.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바로 이런 호기심과 학습 열정을 제도화한 사례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돌며 의회 제도, 교육, 철도, 통신, 은행 시스템을 직접 조사했다. 공업화의 길도 이때 닦였다. 일본 근대국가의 설계도는 해외 현장에서 얻은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초과학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심수관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은 대부분 그곳에 정착했다. 조선에서 천대받던 자신들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대우를 받으며 기술자로 존중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수백 년을 이어온 중소기업이 많은 것도 이런 장인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 역시 대기업 연구소 소속이 아니라 중소기업 시마즈제작소의 평범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작은 회사지만 엔지니어로서 인정받고 세계적인 성과를 냈다. 시마즈제작소가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 바로 시마즈 가문의 실험장이었던 센간엔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긴 시간의 축적이 과학기술로 이어졌다. 올해 수상자인 사카구치 교수는 학계의 비주류였다. 그러나 호기심을 좇아 묵묵히 기초연구를 이어왔다. 키타가와 교수 역시 수십 년 동안 한 분야만 파고들었다. 단기 성과주의가 아니라 인내와 호기심의 산물이다. 반면 한국은 산업화 이후 ‘빨리빨리’ 문화와 단기 성과 중심의 연구 풍토가 강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R&D 예산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기초과학 기반까지 뒤흔들었다. 우리는 응용 기술과 제조업에서는 강했지만 기초연구 기반은 여전히 허약하다. 2018년 일본의 수출 규제로 뒤늦게 ‘소부장 자립’을 외쳤으나, 일본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 길을 걸어왔다. 간단치 않은 시간을 뛰어넘으려면 어떠해야 할지 자명하다. 기초과학은 단기간에 결실을 맺지 않는다.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견디며, 긴 안목으로 연구자의 호기심을 존중할 때 뿌리 내린다. 일본은 그 과정을 수백 년 동안 축적해 왔다.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단기 과제가 아니라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백년대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연구자에게 실패할 자유를 보장하고, 호기심을 존중하는 생태계는 절실하다. 반일은 쉽지만, 극일은 험난하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불편한 시선으로만 바라볼 게 아니다. 백 년을 준비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이자.
    기초과학이 강한 일본
    by 임병식
    2025.10.15 20:34:47
  • 일본 정치가 또다시 안갯속이다. 자민당 총재가 곧 총리라는 일본 정치의 공식은 이제 깨지기 직전이다. 첫 여성 총리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앞에 둔 다카이치 사나에를 둘러싼 정국은 격랑으로 빠져들었다. 26년 동안 파트너였던 공명당이 등을 돌리면서 모든 계산은 틀어졌다. 도쿄 치요다구(우리의 여의도)에서는 “다카이치는 못 올라선다”는 찌라시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자민당은 전체 중의원 의석 465석 중 196석으로 단독 과반은 어렵다. 공명당 24석을 합쳐도 부족하다. ‘총재=총리’라는 등식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치는 ‘단명 총리’의 무덤이다. 2006년 고이즈미 퇴임 이후 2012년 아베 신조가 재집권하기까지 6년 동안 총리만 여섯 번 바뀌었다. 하토야마,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등 민주당 정권 총리들은 모두 단명에 그쳤다. 길어야 1년, 짧으면 몇 달짜리 돌려막기 총리였다. 의원내각제가 빚은 허약한 리더십, 뿌리 깊은 자민당 파벌정치가 주된 원인이다. 일본 총리는 늘 파벌의 눈치를 보고, 연정 파트너에게 표를 구걸한다. 다카이치가 직면한 상황도 다르지 않다. 설령 총리에 취임해도 그는 아소파 그늘에 있다. 연정은 일본 정치의 숙명이다. 1994년 선거제도 개편으로 중의원은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병립제로 선출한다. 이는 자민당의 절대 우위를 어렵게 만들었다. 자민당은 1999년부터 공명당과 불안한 동거를 시작했다. 지난 26년간 이어진 자민·공명 연정은 일본 정치의 상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공명당은 그동안 자민당의 정치자금 스캔들, 야스쿠니 참배, 극우적 언행을 경고해 왔다. 2023년 아베파의 비자금 스캔들은 결정타였다. 정경유착, 보고서 조작, 솜방망이 징계에 유권자들은 분노했다. 공명당은 ‘정치자금 투명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자민당에 제도적 개혁을 요구했지만 자민당은 귀를 닫았다. 오히려 다카이치는 정치자금에 연루된 인사들을 중용하고 극우 색채를 감추지 않았다. 공명당이 “더는 동행할 수 없다”며 문을 닫은 건 당연했다. 일본 정치가 ‘타협의 연속극’이 아니라 ‘불신의 희극’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럼에도 자민당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 답은 분명하다. 이익집단과 끈끈한 유착, 권력을 나눠 먹는 파벌 구조, 그리고 난립한 야권 때문이다. 일본 유권자들의 관성적 선택, “그래도 자민당”이라는 체념과 무관심도 자민당을 지탱한 요인이다. 차악의 정치, 파벌 정치가 자민당 장기 집권의 비결이다. 자민당은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전후 정치의 기묘한 산물이다. 그 사이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보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는데도 자신들이 쌓은 성안에서 뒷걸음질 쳤다. 심하게 표현하면 자폐 정치다. 한국 보수 정치가 대구·경북이라는 성역에 안주하는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카이치가 보여주듯 자민당 안에서 극우 담론은 여전히 주류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과거사 부정, 혐한과 혐중 발언은 강성 지지층을 묶는 정치적 자산이다. 또 걸그룹과 코미디언, 탤런트 출신 정치인이 가세하면서 일본 정치는 ‘희화화’됐다. 정치와 예능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한국 정치는 일본과 다른 방식으로 황폐화했다. 대통령 단명은 없지만, 진영 대립과 적대 정치는 훨씬 치명적이다. 상대의 주장은 무조건 반대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어느 편이냐’가 판단 기준이 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야는 처지를 바꿔 장외 투쟁에 나서고 국회는 길거리 확성기로 전락했다. 일본 정치가 코미디라면, 한국 정치는 상대를 궤멸하는 잔혹사다. 일본식 연정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있다. 귀를 열고 상대를 동반자로 대하는 정치 문화다. 하지만 일본식 연정은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도 교훈이다. 그렇다고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끝내 적대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 정치는 공통된 병을 앓고 있다. 정치의 품격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일본은 극우와 희화화로, 한국은 적대와 혐오로 품위를 상실했다. 정치는 사회를 통합하는 매개다. 그러나 양국 모두 정치로 인해 오히려 사회는 분열하고 국민은 지쳤다. 일본 정치가 희망을 말하려면 정치자금과 권력 파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한국 정치가 미래를 열려면 적대와 혐오를 내려놓고 협치와 연정에 나서야 한다. 그럴 때 양국 정치도, 양국 관계도 진전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민당과 공명당의 결별은 어떻게 끝을 맺을까. 일본 첫 여성 총리라는 정치 실험은 성공할까, 아니면 구태의 반복일까. 한국은 일본보다 12년 앞서 2013년 첫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렇다고 한국 정치가 일본보다 12년 앞섰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주지하다시피 첫 여성 대통령은 탄핵으로 중도 하차했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다면 ‘처음’이란 수사는 공허하다. 정치는 사람의 일이고, 사회를 움직이는 근간이다.
    단명 총리, 자민당 독주는 왜?
    by 임병식
    2025.10.11 15:57:04
  • 1720년 6월 캐나다 펀들랜드 남동쪽 트레파시 항구에 검은 ‘졸리로저’(Jolly Roger)를 내건 해적선 ‘로열포츈’(Royal Fortune)이 다가왔다. 검은 깃발은 순순히 항복하면 자비를 베풀겠다는 신호다. 온 항구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정박했던 프랑스 함선과 상선 172척이 두려움에 질려 도망가거나 항복해버렸다. 해적선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항구를 장악했다. ‘로열포츈’ 한 척에 60명 남짓한 해적이 타고 있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검은 남작’(Black Bart) 바르톨로뮤 로버츠는 가장 성공한 해적으로 꼽힌다. 불과 3년 남짓 해적질 하면서 무려 470척이 넘는 배를 약탈했다. 요즘 가치로 치면 3200만 달러(한화 420억 원)쯤 된다. 노예선을 타다가 해적에게 붙잡혔지만, 뛰어난 항해 실력으로 6주 만에 선장으로 추대됐다. 자신을 배려해 주던 선장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첫 작전에서 아프리카 서해안의 섬 프린시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해적이 되기 싫어서 그랬을까? ‘검은 남작’은 흉악한 해적이 아니라 멋진 신사처럼 보였다. 화려한 진홍색 코트에 다이아몬드 십자목걸이를 걸고 검은 깃털을 단 모자를 쓰고 전투를 지휘했다. 술은 입에 대지 않고 차를 즐겨 마셨다. 해적선에서 도박과 싸움을 금지하고, 항상 청결을 유지하도록 했으며, 해적이 지켜야 할 조항을 담은 ‘해적규정’(Pirate Code)을 만들어 다 같이 서명하고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하게 했다. ‘검은 남작’은 ‘졸리로저’에 모래시계를 든 해골을 그려 넣었다. ‘죽음을 잊지 마라’(Memento Mori)는 경계일까? 1722년 2월 아프라키 서해안에서 평소처럼 멋진 차림으로 영국 해군과의 전투를 지휘하다, 갑자기 날아온 포탄 파편에 가슴을 맞고 즉사했다. 향년 39세. 해적들은 그의 시신을 바로 돛으로 둘둘 감싸 바다 깊숙이 가라앉혔다. 해군에 잡혀 모욕을 당하지 않고 기사처럼 당당하게 죽겠다는 평소의 유언 때문이다. 해적 ‘검은 남작’이 제시한 상징 리더십은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와 닮았다. 잡스는 검은 터틀넥과 청바지로 ‘무장’하고 신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명장면을 연출했다. 기품 있는 완벽주의와 미니멀리즘이다. 특히 20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이폰’을 발표한 날은 ‘검은 남작’이 ‘로열포츈’을 이끌고 트레파시에 나타난 것처럼, 무대는 물론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한 입 베어 문 사과 로고와 ‘Think Different’ 슬로건이 ‘검은 남작’의 ‘졸리로저’처럼 강렬했다. 엄격한 원칙과 규율도 마찬가지다. 잡스는 애플에서 극도의 완벽주의와 비밀주의를 요구하며, 까다로운 기준에 맞지 않는 제품이나 직원은 가차 없이 내쫓았다. ‘매킨토시’를 기획할 때 회로설계팀에는 칩과 회로까지 아름답게 배치하라고 다그치고, 제품설계팀에는 아무나 컴퓨터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특수 나사로 잠그라고 지시했다. 또 화가가 작품을 마무리하듯, 개발팀이 회로 기판에 서명을 남기도록 하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성찰의 태도도 ‘검은 남작’을 연상시킨다. 잡스는 지난 2005년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죽음은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발명품이다”(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고 말했다. 췌장에 생긴 신경내분비종양을 수술로 떼어낸 시한부 삶을 고백한 것이다. ‘Stay Foolish’였을까? 신념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잡스의 리더십 앞에 다들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리더는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야 한다. ‘검은 남작’과 잡스는 신념을 제시하고 행동으로 증명했다. 제시하지 않으면 리더가 될 수 없고, 증명하지 못하면 리더로 남을 수 없다. ‘검은 남작’은 태동하는 새로운 해양제국의 질서에 저항했고, 잡스는 컴퓨터산업을 지배하던 빅브라더(Big Brother)의 관성에 맞섰다. 기존 질서에 결코 순응하지 않고, 각각 해적의 무력과 혁신의 법칙으로 자신의 깃발이 휘날리는 새로운 세상을 구현한 것이다.
    방향을 제시하고 증명하라: 바르톨로뮤 로버츠 & 스티브 잡스
    by 허두영
    2025.10.10 16:32:25
  • 최근 영국 우주사령부는 러시아가 영국 군사위성을 상대로 주간 단위로 전파 방해(Jamming)를 시도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는 우주 영역이 근본적으로 변화고 있음을 알리는 강력한 신호로 볼 수 있다. 또한 러시아 위성이 영국 군사위성에 근접 궤도비행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스토킹(Stalking) 행위를 한 것은 우주 궤도가 이미 적대적인 행위로 가득 찬 ‘제4의 전장’으로 전환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우주 위협에 대해 미국과 영국 등 우주 선도국들은 단순히 우주영역인식(SDA: Space Domain Awareness)을 넘어 우주위협을 능동적으로 인지하고 방어하는 우주 생존력(Resilience) 확보를 최우선 전략으로 설정하고 획기적인 방어책들을 실행하고 있다. 우주위협 탐지: ‘능동 방어’ 첨단화 오늘날 우주 적대국의 위협은 레이저 공격과 같은 정교한 지향성 에너지 무기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레이저는 위성을 추적하거나 센서를 무력화(Dazzling/Blinding)시켜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은 현재 적대국 레이저 위협을 탐지하고 분석하는 신규 위성 센서 기술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이 위성 센서는 레이저의 특성과 출처(지상 또는 우주 기반)를 정밀하게 식별하여 지휘관이 위성에 대한 방어 조치를 즉각 취할 수 있도록 필수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 등의 우주 대응(counter-space) 능력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미 우주군 산하의 우주신속능력사무소(SpRCO: Space Rapid Capabilities Office)는 자체 위성 인식(Own-Ship Awareness) 능력 프로그램으로 정지궤도(GEO) 위성에 항공기의 레이더 경보 수신기(RWR, Radar Warning Receiver)와 유사한 탑재형 RWR 장착을 추진 중이다. 이 시스템은 접근하는 물체의 레이더 신호를 감지해 자국 위성이 추적 또는 표적화되고 있는지를 운영자에게 조기에 경고하는데, 미 우주군 SpRCO는 이 위성 탑재 RWR 능력을 ‘궤도 전쟁(orbital warfare)’ 수행을 위한 핵심 기반으로 간주하며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사이버 훈련장과 우주기밀 정보 ‘공조’ 체계의 구축 오늘날 우주 위협은 물리적 충돌뿐 아니라 사이버 공격의 형태로 전방위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지상 시스템과 궤도 자산이 얽힌 우주 운영 아키텍처는 “더욱 복잡하고, 분산되며, 동적”으로 진화하고 있어 전통적인 보안 방법으로는 방어가 어렵다. 이러한 난제 해결을 위해 우주 기술 계약업체 딜로이트는 전자레인지 크기의 소형 위성 ‘Deloitte-1’을 발사했다. 이 위성은 궤도상에서 실제 사이버 공격과 방어 테스트를 수행하는 ‘실사격 사이버 훈련장(live-fire cyber range)’ 역할을 하며 탑재된 침입 탐지 시스템(Silent Shield)으로 위성의 사이버 회복 탄력성을 검증하고 강화할 예정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우주 방어 시스템은 정부와 민간의 경계를 허무는 협력 속에서 완성될 예정으로 미 우주군(USSF)은 ‘Orbital Watch’ 프로그램을 통해 상업 우주 산업 파트너들에게 우주 기밀 위협 정보를 공유하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향후 양방향 정보 공유를 통해 민간 위성이 감지한 이상 징후나 우주 위협 정보도 역으로 우주군에 제공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우주 패권의 기준: 방어와 회복 탄력성 오늘날 우주 시대의 오디세이(대항해)는 이미 평화로운 탐사가 아닌, 생존을 건 치열한 기술 및 정보 전쟁으로 그 성격이 명확히 바뀌었다. 러시아의 공격적 ‘의지’와 중국의 ‘기술적 정교함’으로 대변되는 우주 위협 환경은 이제 논쟁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미국과 같은 우주 선진국은 위성 탑재 레이더 경보수신기(RWR)를 통한 자체 위협 인식 능력 보유, ‘Deloitte-1’을 통한 궤도상 사이버 방어 훈련, 그리고 ‘Orbital Watch’를 통한 정부-민간의 우주기밀 정보 공조 등으로 우주 자산을 능동적으로 방어할 예정이다. 이제 미래 우주 패권은 단순히 누가 더 많은 위성을 쏘아 올리느냐가 아니라, 누가 위협에 맞서 자국과 동맹의 우주 시스템을 더 빠르고 유연하게 방어하고 회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능동적인 우주 생존력 확보를 위한 대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우주 위협에 맞선 ‘능동 방어’와 ‘우주정보 공조’
    by 최성환
    2025.10.10 16:01:30
  • 17세기말 무굴제국 황제 에우랑제브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695년 순례자와 보물을 실은 황제의 호화무역선 ‘간지사와이’가 홍해에서 인도로 가다가 해적들에게 어이없이 약탈당했다. 무역선 이름이 페르시아어로 ‘넘치는 보물’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많은 보물을 싣고 있었을까? 지금으로 치면 일천억 원이 넘는 규모로 보인다. ‘롱벤’(Long Ben) 헨리 에브리는 다른 해적선 5척을 끌어들여 사상최대의 약탈작전을 지휘했다. 동참한 해적선장 토마스 튜가 전투하다 죽으면서 다른 해적선들이 머뭇거렸지만, ‘롱벤’은 해적선 ‘팬시’를 이끌고 거의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불과 100명 남짓한 ‘팬시’의 해적이 보물선을 지키는 해군 500명과 순례자 600명을 제압한 것이다. ‘롱벤’은 이 작전으로 단박에 ‘해적의 왕’으로 불렸다. 영국 해군 항해사 출신 헨리 에브리는 노예선을 타다가 사략선(私掠船)으로 옮겨 탔다. 1694년 ‘찰스 2세’호에서 몇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자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배를 장악한 뒤, 언변이 뛰어난 에브리를 선장으로 추대했다. 꺽다리로 ‘롱벤’이라는 별명은 얻은 그는 배 이름을 ‘팬시’로 바꾸고 무자비한 해적질을 시작했다. ‘롱벤’은 엄격한 규율과 공정한 분배로 해적들의 충성을 끌어내고, 차가운 머리와 치밀한 계산으로 바다를 지배했다. 격노한 에우랑제브가 온 세계에 수배령을 내리면서 ‘롱벤’은 자주 숨던 마다가스카르 기지를 버리고 카리브해로 향했다. 바하마 제도의 뉴프로비던스로 숨어든 것이다. ‘롱벤’은 해적들에게 약속한 보물을 나눠준 뒤, 자신의 몫을 챙겨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 엑시트에 성공한 것일까? 그가 숨겨놓은 보물이 아직도 카리브해 어딘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소문만 남았다. 모든 해적의 로망이랄까, ‘롱벤’은 혜성처럼 나타나 사상최대의 약탈을 저지르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롱벤’이 보여준 담대한 리더십은 비트코인을 개발한 사토시 나카모토의 전설적인 궤적과 어울린다. ‘롱벤’이 무굴 제국 황제의 보물선을 털었다면, 나카모토는 중앙은행이 독점하던 화폐 발행권에 정면 도전했다. 2008년 백서 ‘비트코인: P2P 전자화폐 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을 발표한 뒤 이듬해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탈중앙 화폐인 비트코인을 창조해서 국가가 보증하는 금융시스템의 뿌리를 흔든 것이다. 해적들의 추대로 선장에 오르고 10대1도 되지 않는 전력으로 황제의 보물선을 제압한 것은 ‘롱벤’이 평소 인정받은 리더십을 바탕으로 철저한 계획과 대담한 실행으로 이룬 성과다. 나카모토는 컴퓨터공학과 암호학에 이어 게임이론까지 완벽에 가까운 블록체인 시스템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겼다. 또 ‘롱벤’이 공적에 따라 전리품을 나눈 것처럼, 엄격한 규칙 아래 채굴한 양만큼 공정하게 보상하여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비트코인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시작이 담대한 만큼 마무리도 완벽했다. 나카모토는 정체 자체가 신비로운 만큼 엑시트도 전설적이다.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다, 본명이 맞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3년 남짓 활동하고 짧은 이메일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다른 일로 넘어갔어. 개빈과 모든 사람들에게 맡겼으니 괜찮아”. 그가 보유한 재산은 비트코인만 해도 110만BTC(1,300억 달러, 177조원. 2025년 기준)로, 세계 부호 12위 수준이다. 조무래기 해적은 황제의 보물선을 털겠다는 작전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오합지졸 은행강도도 중앙은행 금고는 쳐다보지도 못한다. ‘롱벤’과 나카모토는 담대한 비전으로 기존 질서의 빈틈을 깨고 들어가 세계 질서를 바꿔 버렸다. 빈틈없는 작전의 열쇠는 공정한 규칙과 두터운 신뢰였고, 완벽한 증발의 비결은 깔끔한 분배였다. 세상을 흔드는 혁신은 담대한 시작과 철저한 설계와 깔끔한 엑시트로 완성되는 걸까?
    크게 한 방 터뜨리고 사라져라
    by 허두영
    2025.10.01 11:17:18
  • 추석(秋夕)은 귀향이고, 오봉(お盆)은 머무름이다. 한국은 고향 집으로 달려가고, 일본은 신궁 앞으로 긴 줄이 늘어선다. 명절을 맞는 한국과 일본의 풍경이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졌으나 표현 양상은 사뭇 다르다. 한국은 귀향으로, 일본은 머묾으로 정체성을 드러낸다. 지갑 사정은 여의치 않아도 명절은 여전히 기다려진다. 올해 추석은 지독한 무더위를 지낸 뒤 끝이라 어느 때보다 반갑다. 추석에 다가갈수록 달도 부풀어 오를 것이다. 한민족 정체성을 담은 명절로써 추석만 한 게 없다. 이즘 귀성 행렬은 익숙한 풍경이다. TV 카메라는 주차장이 된 고속도로를 비추고 소요 시간을 생중계한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일본의 명절은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조상을 기리고 가족·공동체 유대를 확인한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표현 방식은 크게 차이 난다. 우리 명절 풍경을 먼저 보자. 양손에 선물 보따리를 들고 자녀들과 함께 설레는 표정으로 서성이는 서울역 대합실이 떠오른다. ‘매진’을 알리는 전광판 앞에서 애를 태우는 모습도 낯익다. 북새통을 이루는 고속도로 휴게소는 또 다른 삽화다. 장시간 운전에 지친 귀성객들에게 고속도로 휴게소는 쉼표 같은 곳이다. 나 역시 평소 2시간 반이면 가는 고향길을 5시간 걸려 갈 때면 반드시 들린다. 눈부신 설경과 황금빛 벼로 일렁이는 국도변 풍광도 정월과 팔월에 만나는 절경이다. 추석 때 주변 산은 성묘객들로 화사하다. 어릴 적 성묫길에 메뚜기 잡고 삘기를 뽑으며 가을 햇살 속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일본인은 새해 첫날, 집과 가까운 신사나 신궁에 간다. 도쿄 메이지 신궁에는 해마다 수십만 명이 몰린다. 새해 첫 참배인 ‘하쓰모데(初詣)’를 올리기 위해서다. 참배객들이 늘어선 모습은 장관이다. 이즈음 노점상(야타이) 행렬도 흥미로운 풍경이다. 다코야키와 오뎅 국물 냄새가 새해 차가운 공기를 달군다. 가정에서는 오세치(お節) 요리가 상에 오른다. 오세치 요리는 정월에 먹는 대표 명절 음식이다. 자손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카즈노코(소금에 절인 청어알)와 장수를 의미하는 새우, 건강을 염원하는 검은콩, 기쁨을 뜻하는 다시마가 주된 요리다. 우리가 떡국을 먹으며 새해를 맞듯 일본인은 오세치를 즐긴다. 아이들에게 세뱃돈 오토시다마(お年玉)를 주는 풍습도 비슷하다. 조상을 만나기 위해 산으로 가는 우리와 달리 신사나 신궁을 찾는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를 상징한다. 우리 추석에 해당하는 일본 명절은 오봉이다. 다른 점은 우리는 음력 8월 15일, 일본은 양력 8월 15일이다. 오봉 연휴는 대략 8월 13~17일까지다. 우리는 매년 9월 중하순 또는 10월 초에 추석이 찾아온다. 반면 오봉은 무더위가 한창일 때다. 명절 분위기는 우리가 훨씬 낫다. 대규모 귀성 귀경 행렬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가 그렇듯 일본 또한 신칸센은 3개월 전에 매진된다. 숙박업소 요금도 덩달아 폭등한다. 대학 때 일본인 홈스테이 가정에서 오봉을 지냈는데 열기가 대단했다. 지금도 일본 소도시에서는 집집마다 등불을 켜고 조상의 영혼을 맞는다. 절집 종소리가 울리면 마을은 봉오도리(盆踊り) 춤판에 휩싸인다. 참가자들은 둥근 원을 그리며 북소리와 손뼉 소리로 하나가 된다. 우리 추석이 가족 단위 성묘라면, 일본 오봉은 마을 공동체가 어울리는 마당이다. 도시와 농촌 차이도 흥미롭다. 도쿄나 오사카의 직장인들은 오봉 기간 해외여행을 떠난다. 반면 지방 소도시에서는 여전히 가족들끼리 조상을 찾고 봉오도리 춤을 춘다. 우리도 명절을 간소화하고 해외를 떠나는 가정이 많다. ‘가족과 조상’을 중심으로 뿌리를 확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명절을 구습으로 여기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10월 2~12일까지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여객을 245만3,000명으로 전망했다. 지난해에 비해 80%가량 급증했다. 양국 모두 전통과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한국의 ‘귀향과 제례’, 일본의 ‘머무름과 어울림’이라는 아름다운 풍습은 위기를 맞았다. 한국에서 ‘명절 스트레스’라는 신조어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일본은 명절에 귀향하지 않는 ‘U턴 거부 세대’가 일상화됐다.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면 명절은 세대를 잇는 촉매제다. 설과 추석, 신정과 오봉은 두 나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자리다.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명절은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다. 자연에 감사하고 흩어진 가족과 이웃을 만나는 따뜻한 시간이다. 서로 다독이고 보듬고 격려하며 위안을 얻고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흡족하다. 두 나라 명절을 공유할 기회가 있다면 문화적 차이를 좁히는 기회로 삼아도 좋다. 이번 추석 연휴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은 50만 명을 웃돌 전망이다. 무엇을 보고 올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퇴임을 앞둔 이시바 총리가 30일 한국을 방문, 이재명 대통령과 만났다. 자주 오가다 보면 차이를 넘어 평화로 가는 작은 시작을 만들 수 있으란 생각이다.
    ‘한국은 귀향, 일본은 머무름’ 대조적인 한일 명절 풍경
    by 임병식
    2025.10.01 11:10:24
  • ‘일본에 왔구나’ 하는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자판기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정말이지 많은 곳에서 다양한 자판기와 만난다. 도쿄 번화가, 시골 기차역 플랫폼, 고즈넉한 신사, 공원 산책길, 지하철역, 아파트 입구, 골프장까지 없는 곳이 없다. 심지어 이런 곳에까지?라며 놀라게 되는 곳에도 어김없다. 자판기 종류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자판기에서만큼은 일본인은 한국인의 창의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전통적인 음료나 담배, 스낵 자판기는 물론이고 컵라면, 아이스크림, 라면, 우동 자판기까지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냉동식품과 술, 야채, 과일, 꽃, 부케, 우산, 속옷 자판기까지 있으니 ‘자판기 왕국’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기계가 아니다. ‘길거리 실험실’이다. 편의·놀이·지역성·비상용품까지, 아이디어와 기술이 더해져 작은 무인 상점처럼 진화하고 있다. 일본 여행에서 이색 자판기 탐방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도쿄 아키하바라의 ‘수프 자판기’, 홋카이도 농가의 ‘옥수수 자판기’, 니가타의 ‘사케 자판기’처럼, 색다른 자판기를 찾는 일은 여행에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길모퉁이마다 서 있는 자판기에서 버튼을 눌러 캔 커피가 “톡” 하고 떨어지는 순간, 묘하게 일본답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에치코유자와 역에서 기억은 각별하다. 소설 ‘설국’의 무대에서 자판기 사케를 마시는 순간 소설 속 감흥으로 빠져들었다. 2024년 말 기준 일본에는 약 391만 대의 자판기가 있다. 그중 220만 대는 음료 자판기다. 일본 인구가 1억 2400만 명이니 30명 남짓에 한 대꼴이다. 2000년대 초반 560만 대에 비하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밀도다. 지난달 규슈 여행길에서 그 숫자가 단순 통계를 넘어선 ‘생활의 풍경’임을 새삼 실감했다. 오이타 현 사이키 시 해안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서였다. 가는 내내 만난 자동차라고는 두서너 대가 고작인 오지였다. 한적한 해안도로와 바닷바람이 스치는 방파제 끝에서 빨간색 자판기를 만났다. 누가 이런 곳에까지 와서 자판기를 이용할까 싶었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흩날리는 오후 버튼을 눌렀다. 금세 물방울 맺힌 차가운 우롱차가 나왔다. 유령 같은 마을에서 자판기만 살아 움직였다. 일본에서 자판기 문화가 번창한 배경에는 사회적 토양이 깔려있다. 무엇보다 치안이 좋아 도난 위험이 적고 파손 위험이 적다. 인적이 드문 해안도로에도 자판기를 세워둘 수 있는 이유다. 인파가 붐비는 지하철역 등 고밀도 생활권과 협소한 골목상권도 자판기와 잘 맞는다. 자판기는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효율적 수단이다. 다른 하나는 편의성이다. 오랜 시간 일하고 늦게까지 이동하는 사회에서, 24시간 언제든 물 한 병, 커피 한 캔을 살 수 있다는 건 큰 안도다.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믿음은 작은 위안이다. 현금 사용 비중이 높은 생활 습관도 자판기 문화와 맞물려 있다. 지금은 현금뿐만 아니라 교통카드나 QR결제도 보편화 됐다. 유연한 결제 방식은 자판기 사용을 한층 편하게 만들었다. 산토리·아사히·코카콜라 제조사들은 자판기를 거대한 유통망으로 삼는다. 도매상과 소매 점포를 거치지 않고도 자판기를 통해 신제품 시장조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소비자 반응을 확인하고, 가격 전략을 기민하게 바꿀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기업의 이런 ‘직접 소매’ 전략은 일본의 자판기 문화를 지탱하고 있다. 물론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다. 인구 감소와 편의점 확산, 물가 상승은 수익성이 떨어지는 자판기를 줄이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전에 비해 자판기가 감소한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빈자리를 새로운 자판기가 채운다. 지방 특산 음료, 한정판 간식, 심지어 수소 전원으로 움직이는 친환경 자판기까지 등장했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한 판매 기계를 넘어 ‘작은 길거리 이벤트 상점’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오이타 사이키 해안가에서 만난 자판기는 곧 사라질 소도시의 애잔함을 담고 있다. 사람은 떠나고 폐가만 늘어나는 곳에서 자판기도 조만간 자취를 감출 게 분명하다. 여름 한낮 텅 빈 마을을 도는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 폐교한 게 분명한 소학교 정문은 출입을 막는 쇠줄이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입구에는 어김없이 코카콜라 로고가 선명한 자판기가 있었다. 누가 여기까지 와서 자판기를 이용하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다 들리는 눈먼 관광객을 상대로 푼돈이라도 벌어보려는 심산에서 설치한 것은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인적이 드문 황량한 마을에도 여전히 “언제나 거기 있는” 자판기는 을씨년스러운 마을풍경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일본 사회의 단면이다. 마을을 떠나기 전, 방파제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우롱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앞에는 바다, 옆에는 자판기가 쓸쓸히 서 있었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자 풍경을 담은 거리의 소품이다.
    바닷바람 속 풍경이 된 일본 자판기
    by 임병식
    2025.09.22 10:46:36
  • 일본 평화헌법 9조는 전쟁 포기, 전력 보유 금지, 교전권 불인정을 명문화하고 있다. 패전 직후 연합군 점령하에서 뼈대를 갖췄다.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일망정 평화헌법 9조는 80년 가까이 일본의 정체성을 집약한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헌법에 걸맞은 비무장 국가가 아니다.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 8위이며 국내총생산(GDP)의 1.4%에 해당하는 553억 달러를 국방비로 지출하는 군사강국이다. 참고로 한국은 세계 5위다. 결국 일본은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평화를 외치는 한편 끊임없이 군사력을 증강해온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인의 습속은 평화헌법에도 반복된다. 국제사회는 일본의 평화 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 해병과 일본 육상자위대가 참가하는 미일 합동훈련(9월 11~25일)이 진행 중이다.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서 결속을 다진 직후라는 점에서 관심이 높다. 비슷한 시기(9월 15~19일) 한미 연합훈련도 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치하는 구도다. 미일 합동훈련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1만 9000명이 참가하고, 중거리 미사일 시스템 ‘타이폰’도 첫 동원됐다. 타이폰에 탑재한 토마호크 사거리는 1600㎞로 베이징과 평양을 사정권에 두고 있다. 중국과 북한은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언론은 중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중국을 겨냥한 훈련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본이 군대와 최첨단 무기를 보유하고 해외 파병까지 하는 이유는 미국과 일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눈감고 있다. 일본은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핑계삼아 꾸준히 군사력을 강화해 왔다. 한국을 포함 일본의 식민지배 기억을 공유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편승한 아베 정부 때는 아예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며 헌법 개정까지 시도했다. 스스로 지킨다는 ‘자위대’의 무장을 강화하고 도처에 ‘평화’를 남발하며 과거사를 분칠해온 게 일본 평화헌법의 현주소인 셈이다. 일본을 다니다 보면 기념관과 박물관 등에서 평화라는 명칭을 흔히 접한다. 심지어 자살을 강요한 가미카제 특공기지마저 ‘치란평화특공회관’으로 부른다. 일본이 유독 평화에 집착하는 건 가해자로서 과거사를 덮고 합리화하려는 심리의 결과물이다. 일본 청년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놀랄 때가 한두 번 아니다. 대학교육까지 마쳤음에도 불과 100년 전에 일어난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낸 나리카와 아야 역시 ‘지극히 사적인 일본’에서 자신과 또래들의 역사 인식 부족을 고백했다. 그들 잘못이 아니다. 아예 과거사를 가르치지 않는 일본 교육에 문제가 있다. 히로시마는 메이지 시대부터 군사·상무 도시였다. 1888년 제5사단 사령부가 설치됐고 청일전쟁(1894~1895) 때는 육군 대본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병기창과 부대가 집중된 군사 거점이었다. 전후 히로시마는 “어떠한 군사시설도 없다”는 수사를 전면에 내세워 ‘평화 도시’를 자임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달린다. 히로시마에서 자동차로 불과 1시간, 41km 떨어진 이와쿠니 기지는 미·일 동맹의 최전선이다. 미군은 지난해 7월 이곳에 최신예 F-35 스텔스 전투기 배치한데 이어 이번에는 중거리 미사일 시스템 ‘타이폰’을 전개했다. 이른바 ‘평화의 도시’에서 한 시간 남짓한 곳에서 벌어지는 모순된 얼굴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그동안 ‘평화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과시해 왔다. 그러나 그 평화는 피해의 서사를 키우면서 가해의 역사와 책임을 흐리는 데 더 오래, 더 유용하게 쓰여 왔다. 이 불편한 비대칭이야말로 일본의 평화 담론에 물음표를 붙이는 이유다.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 공원에서 주어는 ‘일본인’으로만 수렴한다. 조선인 수만 명이 희생됐다는 사실은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평화공원 내부로 들어오기까지 무려 29년이나 걸렸다. 타자의 고통을 공원 울타리 바깥으로 밀어냈던 그 오랜 시간을 통해 일본의 이중성을 볼 수 있다. 지난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히로시마 원폭 공원에서 헌화하고 피해자를 포옹했다. 또 한·일 정상은 2023년 공원 내 한국인 위령비를 찾아 함께 참배했다. 역사는 한 걸음씩 나아가며 화해한다. 그러나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앞세우며 군비를 증강하고 ‘피해자 일본’이라는 자기 서사에만 몰두한다면 평화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평화 담론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당신들이 말하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피해의 기억만 부풀린 평화는 과거를 미화하고 현재의 군사화를 가린다.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이웃의 상처까지 보듬으며 힘의 사용을 억제할 때 비로소 평화에 도달한다. 선택은 일본의 몫이다. 히로시마 원폭 평화공원 강변에 서면 원폭 돔의 철골이 물그림자로 떨린다. 그 흔들림은 경고다. 평화는 기억을 선택하는 기술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포용하는 용기다. 일본이 그 용기를 택할 때, ‘평화 헌법’이라는 간판은 위장막이 아니라 약속이 된다. 그 약속 앞에서 비로소 일본이 말하는 평화 담론은 신뢰를 획득할 수 있다. 북중러 결속에 대응하는 미일 합동훈련과 치란평화특공회관, 히로시마 원폭 공원을 관통하는 평화를 생각한다.
    ‘전쟁하지 않는 국가’ 일본의 속내
    by 임병식
    2025.09.16 14:20:56
  •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북극항로는 단순한 물류 효율을 넘어 국가의 안보와 경제를 좌우하는 핵심 전략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기후변화로 북극 해빙이 가속화하면서 대한민국의 포항항, 울산항, 부산항 등이 복수의 거점항만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극지연구소를 비롯한 국내 기관들은 북극 해빙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나 하루에도 여러 번 변하는 북극의 해빙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안전한 항해가 불가능하다. 정보의 지속성, 해상도, 그리고 실시간성 부족은 북극항로 운용에 있어 우리의 국가적 자율성을 제약하는 명확한 한계로 작용한다. 결국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초소형 위성이다. 과거에는 기술 검증용에 머물렀던 초소형위성은 이제 고성능 센서를 탑재한 강력한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 여러대의 위성으로 구성된 군집 위성 시스템은 기존 위성보다 낮은 궤도에서 지구를 더 자주, 더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다. 특히 기상 조건과 관계없이 해빙을 관측하는 SAR(합성 개구 레이더) 기술은 안정적인 항로 운용에 필수적이다. 또한 마이크로파 복사계는 구름과 어둠을 투과해 연중 내내 해빙의 면적, 농도, 두께를 측정함으로써 혹독한 북극 환경에서도 지속적인 관측을 가능하게 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초소형 위성을 활용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국토안보부에서는 북극 지역에서 조난 선박의 긴급 신호를 감지하기 위해 큐브샛을 발사했고 노르웨이는 NorSat을 통해 북극 선박 교통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처럼 초소형위성은 특정 목적에 맞춰 효율적으로 운용될 수 있어 북극항로 개척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핵심 전략인 ‘AI 대전환’ 정책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즉 위성으로 부터 쏟아지는 방대한 데이터를 단순히 모으는 것을 넘어 AI와 딥러닝 기술로 분석하여 의미 있는 정보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AI는 실시간으로 해빙의 이동 경로와 위험 구간을 예측하고 선박에 최적의 항로를 제안하는 등 실제 운항에 필요한 ‘지능’을 제공할 것이다. 이처럼 AI는 방대한 데이터의 ‘두뇌’ 역할을 하며 기술적 진보를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로 연결할 수 있다. 특히 딥러닝은 해빙의 균열 감지, 두께 추정, 미래 해빙 범위 예측 등 기존의 물리 기반 모델이 가진 한계를 보완하고 예측의 정확성을 높여 북극해 운항의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최근 국회에서도 북극항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북극항로 운항 지원을 위한 초소형위성 개발사업’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김현철 극지연구소 원격탐사빙권정보센터장은 ‘초소형위성 사업의 추진 경위 및 준비 현황’에 대해 발제하며 로드맵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북극항로의 안전한 해상 운항을 보장하고 기후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역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또한 북극항로 운항 지원을 위한 초소형위성 개발사업은 AI와 위성 기술의 융합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우주로 확장하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초소형 위성과 AI가 열 북극항로
    by 최성환
    2025.09.12 15:50:32
  • 근래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편입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6월 연방 상원을 통과한 ‘지니어스법(GENIUS Act·Guiding and Establishing National Innovation for U.S. Stablecoins Act)’에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에 첫발을 내디뎠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6월 발의된 디지털자산기본법안 외에 3건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이 추가로 발의되어 있다. 정부도 작년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시행에 이어 2단계 입법의 일환으로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을 준비해서 10월경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발의된 법안을 둘러싸고 업계와 실무에서 여러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기 위한 요건을 어떻게 정할지(즉, 진입규제를 어느 수준으로 정할지)에 대해서는 은행권과 핀테크 업계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법화에 연계(페깅)되어 가격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본질로 하고 국경의 제한을 넘어 거래될 수 있기 때문에, 금융위 뿐만 아니라 기재부(외환당국), 한은(통화당국)의 규제와 감독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각 부처의 업무와 권한을 어떻게 획정할지에 대해서도 온도차가 감지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다른 법률도 있다. 현행 외국환거래법 체계상 가상자산을 어떻게 규율하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서는 수년간 논란이 있어 왔다. 가상자산이 외국환에 해당할 여지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가상자산이 자본시장법상 증권의 성격을 가지는 경우(소위 ‘토큰증권’에 해당하는 경우) 비거주자를 상대방으로 하는 토큰증권 거래에 대해 외국환거래법상 외화증권에 대한 규제를 전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 토큰증권이 아닌 일반적인 가상자산 양수도거래는 경상거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지 등 여러 문제에 대해 그간 논의가 있었지만 외환당국은 아직까지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2017년 외국환거래법 개정으로 도입된 소액해외송금업의 경우, 송금 매개수단으로 가상자산을 활용하는 방식은 사실상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실무에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규제 불확실성 속에서 시중은행들은 가상자산 취득 목적의 해외송금 처리에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과정에서 전자금융거래법을 손볼 필요가 있는지도 논의가 필요한 과제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법화에 연계되어 발행되기 때문에 지급·결제에 활용되기 쉽다. 이를 감안해서 스테이블코인은 전자금융거래법 체계에 흡수해서 전자화폐나 선불전자지급수단에 준해 규율하는 것이 적절하고 규제차익 논란도 방지할 수 있다는 견해가 그간 실무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금까지는 스테이블코인(또는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하는 디지털자산 전반)에 대한 단행법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입법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세부 규제가 전자금융거래법에 담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단행법으로 제정되더라도 전자금융거래법 규제와 접점이 생길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령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거나 유통하는 사업자가 스테이블코인을 매개로 하는 전자지급결제대행(PG)업을 영위할 유인이 생길 수 있다. 이는 넓게 보면 가상자산사업자의 전자금융업 진출(겸영)이 허용되는지에 대한 문제이고, 향후 전자금융거래법 규제실무에 대한 정교한 점검이 필요한 부분이다.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풀어야 할 과제들도 많이 남아 있다. 연내에는 법이 통과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입법의 적기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규제당국과 국회, 그리고 업계가 더욱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논의를 뚜벅뚜벅 진척시켜야 할 때다.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에 즈음하여
    by 유정한
    2025.09.06 09:00:00
  • 지난해 가을 일본 홋카이도 치토세공항에 내렸을 때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맑은 하늘 아래 평야와 산림은 평온했지만 공항 인근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거대한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오갔고 기계음은 첨단 반도체 공장인 ‘라피더스’가 들어서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일본 열도 북쪽 소도시가 국가 전략산업의 무대로 바뀌는 현장이었다. 치토세시는 라피더스를 총력 지원했다. 인허가와 도로 정비, 숙소 확보를 신속히 진행했고 건설 차량이 몰려들자 전용 노선을 짜 교통 체증을 최소화했다. 라피더스는 소프트뱅크와 소니, 토요타, NTT 등이 2022년 세운 반도체 기업이다. IBM과 손잡고 2나노 시제품 개발을 마쳤으며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라피더스는 맞춤형 칩을 만드는 ‘싱글 웨이퍼’ 방식을 채택했다. 필요한 만큼 빠르게 공급하는 게 강점이다. 현지에서 만난 이들은 “이 작은 도시가 세계 반도체 지도의 한 축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좀처럼 허풍 떨지 않는 일본 국민성을 고려할 때 허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홋카이도를 다니며 자연풍광에만 취했는데 이제는 경관농업과 함께 반도체가 중요 산업으로 떠올랐다. 지난 8월에는 구마모토 기쿠요초에 있는 TSMC 공장에 다녀왔다. 공항에서 차량을 렌트해 15분여를 달려 도착했다. TSMC 1공장은 규모부터 압도적이었다. 클린룸만 도쿄돔보다 크다. 인접 부지에서는 뙤약볕 아래 2공장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구마모토가 세계 1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를 유치한 건 2022년이다. 현지에서는 ‘자스무(JASM, 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라고 부른다. JASM은 2024년 말부터 자동차·사물인터넷(IoT)용 반도체를 생산 중이다. 2022년 말 착공 이후 2년 만이니 빛과 같은 속도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때문에 2공장 가동 시기는 2027년으로 늦춰졌지만 현지 분위기는 낙관적이다. TSMC 유치 이후 구마모토 인구는 급증했다. 지난해 일본 광역 지자체 가운데 인구 증가율 1위였다. 공장이 들어선 기쿠요마치는 4만 3000명에서 5만 명을 넘어섰다. 양배추와 당근밭이었던 공장 주변이 첨단 반도체 공장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2년이면 충분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부활을 국가 정책으로 내건 건 2021년이다. 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키우기 위해서다. 홋카이도 라피더스와 구마모토 TSMC는 그 중심에 있다. 일본은 1980년대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1990년에는 반도체 제조사 매출 상위 10곳 중 6곳이 일본기업이었다. 그러나 삼성전자 등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현재 반도체 제조사 매출 상위 10곳 중 일본기업은 없다. 글로벌 점유율도 10% 미만이다. TSMC 유치는 반도체 산업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일본은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1, 2공장 총투자액 중 절반에 가까운 1조 2000억 엔(약 12조 원)을 보조금으로 지원했다. 눈여겨볼 건 지자체다. 구마모토현과 기쿠요마치는 중앙정부와 함께 치밀하게 움직였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농지 전용 절차를 단축하고 토지 소유자와 교섭도 지원했다. 또 공업용수와 전력 공급, 도로 등 인프라와 주거 환경을 빠르게 정비했다. 인력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여론도 우호적으로 조성했다. 아소 화산지대에 속하는 구마모토는 깨끗한 지하수와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 공급이 강점이다. 반도체 관련 기업도 꾸준히 유치해 왔다. 구마모토 내 반도체 기업은 200여 개에 달하며 규슈는 일본 반도체 산업 총 매출의 55%를 차지한다. TSMC 유치 이후 기쿠요치는 활기를 되찾았다. 주민들 표정에도 기대감이 묻어났다. 1, 2공장에서 3400명 이상 고용 창출이 가능하다. 또 TSMC와 관련된 일자리는 지역 평균 시급을 두 배 웃돈다. 관련 기업도 급증했다. 소니, 도쿄일렉트론, 미쓰비시전기, 후지필름 등 86개 이상(2024년 말 기준) 반도체 기업이 구마모토에 둥지를 틀었다. 이에 힘입어 규슈 지역 반도체 관련 설비투자는 100건을 돌파했고, 투자액은 5조 엔(약 47조 5000억 원)을 넘어섰다. 호텔도 속속 들어섰다. 대만 직원과 가족 400여 명이 왔다. 구마모토와 대만 사이에는 매일 2~3편에 달하는 직항편이 운항 중이다. 필자가 찾은 날에도 공항 로비는 대만 초등생 야구단으로 북적였다. 구마모토현은 초중고 과정을 갖춘 국제학교를 확장하고 대만인 통역사를 배치했으며, 일반 학교의 영어 교육을 강화했다. 또 구마모토대학교에 반도체 학과를 신설했고 내년부터는 대학원 과정을 운영한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린 초밥가게 주인은 “TSMC 직원들로 인해 매출이 급증했다”며 활짝 웃었다. 구마모토 TSMC와 치토세 라피더스의 시사점은 크다. 일본은 소재·부품·장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 역량까지 더해지면 한국 기업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정부와 민간이 하나로 뭉쳐 반도체 부활에 집중하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 인프라 정비, 인력 육성, 신속한 행정 등 ‘원스톱 서비스’는 주목할 만하다. 한국은 위기 상황이다. 언론에 자주 회자되는 용인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은 6년 만에 착공했다. 일본과 대비된다. 주 52시간 근무에 예외를 두는 반도체특별법 또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은 국가 차원의 강력한 의지, 신속하고 유연한 행정, 그리고 기존 산업 생태계와 연계할 때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치토세의 서늘한 바람, 구마모토의 뙤약볕 속에서 만난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흥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 반도체 부활 알리는 구마모토 TSMC·홋카이도 라피더스
    by 임병식
    2025.09.03 11:42:57
  • 일본에서 아이폰 점유율은 64%로 일본인들의 아이폰 사랑은 유별나다. 지하철 안에서 어떤 휴대전화를 사용하는지 살펴보노라면 예외 없다. 아이폰은 압도적 1위다. 구글(6%)과 삼성(5%), 샤오미(5%)가 나머지를 분점하고 있으나 존재감은 없다. 스마트폰을 구매할 일본 젊은이들에게 선택지는 오로지 아이폰이다. 갤럭시폰과 아이폰의 장단점을 따져 선택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젊은 층에서 아이폰은 단순한 스마트폰이 아니라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 젊은이들은 아이폰으로 소통하고 아이폰을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도구로 인식한다. 지난주 서울에 온 큰아이의 일본 친구들 역시 예외 없이 아이폰으로 길을 찾고 결제했다. 아이폰의 나라임을 거듭 확인한 자리였다. 유별난 아이폰 사랑은 왜일까. 편리함과 다양한 기능, 감각적인 디자인, 그리고 미국이라면 한 수 높게 치는 국민성이 떠오른다.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다. 소프트뱅크의 스마트폰 일본 시장 선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이동통신 시장에서 소프트뱅크(21%)는 1위 NTT 도코모(36.6%), 2위 KDDI au(27.1%)와 3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아이폰을 처음 접한 건 소프트뱅크를 통해서였다. 아이폰을 가장 처음 들여온 이동통신사가 소프트뱅크다. 소프트뱅크는 2008~2011년까지 독점 판매권을 행사했고 이후 KDDI au도 아이폰을 취급하면서 아이폰은 대세가 됐다. 일본인들은 아이폰을 통해 스마트폰 세상과 만난 것이다. 이러니 무의식 속에 스마트폰은 곧 아이폰이라는 관성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소프트뱅크는 손정의와 스티브잡스의 개인적 인연을 바탕으로 아이폰 독점권을 확보했다. 스기모토 다카시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가 쓴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나온다. 손정의는 아이폰이 출시되기 전 2005년 스티브잡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아이팟에다 휴대전화 기능을 결합한 스케치를 보여주며 제품이 나오면 일본 판매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 약속을 기반으로 소프트뱅크는 2006년 3월 보다폰을 170억 달러에 인수한 데 이어 2008년 6월 아이폰 공식 판매권을 확보했다. 시대 흐름을 앞서 내다본 손정의의 통찰력이 주효했다. 소프트뱅크는 아이폰을 앞세워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확장하고 NTT, KDDI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손정의는 플랫폼 사업에 진출하는 방식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왔다. 요즘은 플랫폼이라는 용어가 흔하게 통용되고 있지만 손정의가 사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1980년만 해도 생소한 용어였다. 플랫폼은 시장 지배적인 사업을 뜻한다. 석유왕으로 불리는 존 D. 록펠러가 구축한 석유 생태계는 좋은 사례다. 록펠러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때 채굴부터 정제, 유통까지 석유 플랫폼을 장악했다.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은 록펠러를 헨리 포드와 함께 자동차 시대를 선도한 인물로 꼽는다. 록펠러가 석유를 공급하는 플랫폼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포드의 대량생산은 무의미했다는 것이다. 컴퓨터 운영체제를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 검색 엔진 구글, 인터넷 유통을 장악한 아마존은 정보통신시대 플랫폼 기업인 셈이다. 록펠러가 그랬듯 손정의는 아이폰으로 시장 흐름을 주도한 것이다. 손정의 때문인지 후쿠오카는 창업 DNA가 넘실댄다. 일본 내에서 15~29세 청년 인구 비중(19.5%)이 가장 높고 스타트업 창업 분위기도 활발하다. 후쿠오카 시청에서 500m 거리에 있는 fgn(Fukuoka growth next)은 스타트업 산실이다. 1873년 설립된 다이묘 소학교를 리모델링해 2017년 4월 오픈했는데 148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번화가에 폐교를 존치한 것도, 스타트업에게 공간을 내준 것도 인상적이다. fgn은 입주 기업에게 월 15만 엔 수준의 저렴한 사무실 임대, 맞춤형 프로그램, 강력한 행정지원 혜택을 제공한다. 특히 사업계획서 한 장으로 비자를 발급해주는 ‘스타트업 비자’는 파격적이다. 일본인은 조용하다는 선입견도 fgn에서는 무색하다. 마침 찾은 때가 오후였는데 주변 거리는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일본인들이 아이폰을 선호하고 후쿠오카가 역동적으로 바뀐 것은 손정의와 소프트뱅크 덕분이다. 후쿠오카 현지에서 만난 일본 청년들이 생각하는 손정의의 그늘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들에게 손정의는 닮고 싶은 우상이다. ‘소프트뱅크 호크스’ 프로야구단 홈구장 pay pay돔에서 만난 미야사키씨(28) 일행은 손정의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지방도시 후쿠오카에 일본 청년들이 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도 후쿠오카 거리는 제2의 손정의를 꿈꾸는 젊은이들로 활기차다. 후쿠오카 fgn 모델은 대기업 유치에만 목을 매는 우리 지방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스타트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성장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덧붙이자면 한국에서 아이폰(23%) 점유율은 갤럭시 폰(68.3%)의 3분의 1수준이다. 앞서 언급했듯 아이폰은 다양한 편리성, 강력한 브랜드 충성도, 현지화를 통해 일본 시장을 장악했다. 아이폰은 일본 교통 결제 시스템과 빠르게 연동해 실생활과 밀접한 서비스를 구축했다. 또 Felica 결제나 일본 특유 문자 통신환경에 최적화됐다. 일본 소비자들이 한국 제품이라서 갤럭시폰을 외면한다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국수주의일 뿐이다. 프리미엄 이미지 구축, 현지 통신사와 전략적 제휴, 현지 맞춤형 서비스를 주목해야 한다. 어설픈 민족주의로 재단한다면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아이폰과 소프트뱅크, 후쿠오카를 연결하면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인다.
    일본의 유별난 아이폰 사랑, 왜?
    by 임병식
    2025.08.22 17:18:12
  • 오늘날 우주 패권 경쟁은 이제 단순한 기술력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을 통한 민군 융합 전략이 핵심이다. AI 기반 위성 데이터 분석은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분야로 AI가 위성 영상을 분석하여 작황을 예측하거나 산림 파괴를 감시하는 등 다양한 민간 서비스로 확장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위성 공격 능력 개발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민간과 정부의 협력이 중요해짐에 따라 ‘오비탈 워치(Orbital Watch)’ 프로그램을 통해 민간과 군이 AI 기반 우주 궤도 위협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AI 기반 정보 공동체’를 구축하며 우주 자산의 생존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또한 AI, 양자, 극초음속 등 첨단 기술을 우주 분야에 접목하여 자국 군사력의 약점을 공략하는 ‘점혈전(点穴戰)’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민군 우주융합(Military-Civil Fusion)’ 전략을 통해 민간 부문의 기술과 자원을 군사 부문에 적극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글로벌 민군 우주융합 트렌드는 단순히 기술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민간 부문의 혁신을 군사력 증강의 원동력으로 삼아 미래 전장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미래 우주 패권 경쟁은 ‘민군 우주 융합’을 통해 독자적인 기술력 개발에 좌우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 흐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재명 정부의 ‘AI 일상화’ 및 ‘디지털 혁신’ 기조를 우주 전략에 적극적으로 통합해야 한다.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우주 안보와 산업 혁신을 동시에 달성하는 국가적 비전의 심장으로 선정하기를 제언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K-민군 우주 융합 전략’을 효과적으로 펼쳐야 한다. 우선 ‘AI 기반 우주 전략 설계’를 통해 국가 차원의 AI 우주 전담 조직을 신설하여 우주 안보와 산업 발전을 통합 관리가 필요하다. 둘째, AI 우주 기업 생태계 육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 AI 기반 위성 데이터 분석, 자율 임무 수행, 초소형 군집위성 운용 등 AI 기술을 활용하는 혁신적인 민간 우주 기업에 대한 투자와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셋째, 독자적 AI 우주 기술 확보가 중요하다. AI 기반 위성 항법시스템 정밀화, 궤도상 서비싱 기술, 우주 데이터 처리·분석 기술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AI 우주 기술의 국산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 넷째, 미래형 우주 인재 양성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우주 공학, AI, 데이터 과학을 융합한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민간·국방·학계 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우주 혁신을 이끌 인재를 확충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AI를 우주 전략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 우주 경쟁의 판도를 바꾸는 담대한 도전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K-우주 방산’을 견인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AI, 우주 패권을 쏘아 올리다: K-민군 우주 융합 전략
    by 최성환
    2025.08.18 12:20:47
  • 대한민국은 한때 세계가 주목하는 거대한 실험장(테스트베드)이었다. 자동차, 철강, 화학, 반도체 같은 중후장대 제조업은 정부 주도의 과감한 투자와 제도적 지원 속에서 기술 자립을 이뤘다. 지난해 자동차 산업은 생산 412.8만 대, 수출 708억 달러, 약 30만 명 고용을 기록하며 여전히 국가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도체도 메모리 분야를 중심으로 전체 수출의 20% 이상, 1400억 달러 넘는 실적을 올리며 효자 노릇을 한다. 철강, 석유화학, 조선도 정부의 전략적 산업 정책 아래 수출산업으로 성장해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는데 기여했다. 반면 문화와 지식 산업은 성장 경로가 달랐다. K컬처, K푸드, K뷰티 같은 분야는 민간 주도의 창의와 자율이 원동력이었다. 한류 콘텐츠의 확산은 국가 정책이 아니라 기업과 창작자들의 도전에서 비롯됐다. K뷰티는 브랜드 스토리텔링과 글로벌 유통망으로 세계 시장을 넓혔다. 제조업이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실험’이라면 문화 산업은 시장의 역동성 속 ‘아래로부터의 실험’이었다. 그렇지만 중후장대 제조업과 문화·지식 산업의 성장 방식은 달랐지만 두 길 모두 ‘실험을 통한 성장’이라는 DNA를 공유했다. 문제는 이 DNA가 최근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의 그린뉴딜,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등 새로운 성장동력 시도는 있었지만 제조업이나 한류 콘텐츠 수준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바이오, 태양광, 풍력 같은 미래 산업은 수차례 테스트베드 시도가 좌절됐다. 바이오 산업은 2005년 말 줄기세포 연구 논문 조작 의혹에 휘말린 ‘황우석 사태’나 2020년 임원들의 배임죄 의혹과 임상 실패로 거래정지됐다가 이후 2년 5개월 만에 거래가 재개된 ‘신라젠 사건’들과 같은 투명성 이슈와 단기성과에 매달리는 풍토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태양광은 정치적 논란은 뒤로 하더라도 전력망 연계 지연과 변전소 부족에 막혔고 울산 해상풍력의 경우 주민 반발과 정치적 이유로 수년간 중단됐다. 에너지 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탈원전’과 ‘원전 회귀’를 오가는 바람에 장기 계획의 일관성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이는 단순히 지역 갈등이나 기술 미성숙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 설계의 정교함, 이해관계 조정 능력, 경제 문제에 대한 정치적 중립성, 실패를 흡수할 수 있는 안전망 부재 등이 원인이다. 제조업과 지식산업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험을 거듭하며 경쟁력을 쌓았지만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고자 했던 신산업들은 애초에 시험의 기회조차 충분히 부여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AI를 국가 성장의 축으로 세우며 ‘인공지능(AI) 선도국’을 선언했다. 100조 국민성장펀드 조성, 벤처 투자 연간 40조 달성 등 구체적인 국정과제까지 마련하여 인프라·기술·인재를 동시에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다. 아직 재원의 조달 구조가 불명확하고 국가 AI컴퓨팅센터 구축사업은 사업자 선정과정부터 표류하고 있다. AI 인재 유출이 심화하고 있어 단기 유인책만으로는 장기 생태계 구축이 어렵다. 미국과 중국의 투자 속도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런 조건에서 ‘AI 선도국’이 되려면 예산 투입 이상의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공정한 ‘놀이터’, 즉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없애고 실증 사업의 실패가 곧 산업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안전판을 마련하여 민간의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의지가 필요한 때다. 정부는 생태계를 만드는 역할에 충실하고 실제 ‘실험’은 민간의 손에 맡기면서 기업이 정부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성과에 힘쓰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이 ‘놀이터’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는 곳에 정부 자원을 집중 지원해야 한다. 과거 우리는 나눠먹기식의 분산 투자로 진정한 승자가 없는 상황을 만들곤 했다. 누구나 가능성을 가지고 도전을 하게 하되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기업이 마지막 한고비(캐즘)를 뛰어넘게 도와줘야만 기업이 국가의 성장동력까지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정책이 정권 교체에 따라 ‘탈원전’과 ‘원전 회귀’를 오가며 장기 계획의 일관성이 무너졌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AI 전략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법제화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기술 개발뿐만 아니라 AI 윤리, 데이터 활용 등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분야들을 정부가 주도해서 조율하고 장애를 없애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조율하고 설득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자동차, 인터넷, 5세대 통신(5G)에서 국가 전체를 거대한 테스트베드로 5활용해 세계를 선도한 경험이 있다. AI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테스트베드 국가’의 DNA를 되살려야 AI 시대의 진정한 선도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 전략이 필요하다
    by 이보형
    2025.08.18 11:39:46
  • 무더위가 극성을 부린 8월 초, 일주일을 일본 남부에서 보냈다. 후쿠오카와 오이타, 구마모토에 머무는 내내 불볕더위 속을 헤집고 다녔다. 가마솥 더위라는 사전적 의미를 온몸으로 체감한 여정이었다. 언론은 ‘펄펄 끓는 일본 열도’라며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했다. 현지에서 느낀 실상은 펄펄 끓는다는 표현조차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달 5일 군마현 이세사키(伊勢崎) 시는 41.8도를 기록했다. 일본 기상청은 관측 사상 최고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날 사이키(佐伯)시 해안도로를 일주하던 나는 오후 일정을 포기한 채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렌터카 계기판에 표시된 ‘외부 기온 43도’를 확인한 순간 더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그날 밤 NHK는 전국 각지에서 온열질환자가 속출했다고 알렸다. 올 여름에만 5만3,000명에 달하는 온열질환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 이상고온은 벼 작황에 악영향을 미쳐 4년 연속 수확량 감소가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일본은 최근 3년 동안 쌀값이 급등해 정권 위기로까지 번진 상황이다. 이상고온 때문에 수확량이 급감하면서 쌀값 폭등으로 이어졌다. 올해도 쌀값을 잡지 못하면 자민당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놓이게 된다. 정권을 위협할 정도의 이상고온이니 땡볕과 열대야를 피해 떠난 일본 여정은 호랑이굴 속으로 들어간 격이 됐다. 허구한 날을 놔둔 채 하필 가장 더울 때 일본에 왔나 싶었다. 폭염과 산불, 집중호우가 지구촌 일상이 된 지는 오래다. 산업화 이후 인류는 지구를 지나치게 학대했다. 세계 195개국은 2015년 파리기후협정에서 지구 기온 상승을 1.5도로 묶는 데 합의했다. 온실가스 감축 노력에도 불구하고 온도 상승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8년 기후변화 적응법을 제정한 뒤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47개 도도부현, 지정도시 20곳, 311개 지자체가 참여하고 있다. 연간 1,295명 수준의 온열질환 사망자를 절반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고온에 강한 벼 품종도 개발 보급했다. 농림성은 이달 5일 쌀 생산량 증대, 가뭄 완화를 위한 긴급 조치를 발표했으나 큰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재명 정부도 다양한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추진 중이다. 눈에 뜨이는 건 ‘기후에너지부’ 신설이다. 여러 부처에 산재한 정책을 집중함으로써 효율을 높인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석탄 발전 폐지도 공약했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을 35% 달성하고 2040년까지 석탄발전소를 폐지할 계획이다. 반면 미국은 국제사회 움직임을 거스르고 있다. 트럼프는 “기후 위기는 사기극”이라며 파리협정 탈퇴에 이어 화석연료 중심 에너지 정책으로 회귀하고 있다. 환경 규제도 완화했다. 자동차 연비·배출 규제를 완화하고 환경보호청(EPA) 권한을 축소했다. 국제사회는 미국의 복귀를 촉구하고 있으나 현실은 비관적이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여름 평균 기온은 꾸준한 상승세에 있다. 폭염(35도 이상) 횟수는 40년 전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열사병 사망자 또한 2018~2022년 5년 동안 평균 1,295명에 달했다. 1995~1999년 201명과 비교하면 5배 이상 급증했다. 선진국 일본에서 원시적인 더위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건 아이러니다. 기후재앙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사회 경제적 약자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2024년 온열질환자 3,704명 가운데 34명이 숨졌는데 대부분 약자였다. 문제는 갈수록 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온열질환자는 최근 5년(2020~2024년) 평균보다 25.3% 급증했다. 이대로라면 ‘사상 최고’ 행렬 속에 기후 불평등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벳부를 출발해 후쿠오카로 가는 길, 급작스러운 폭우로 애를 먹었다. 차량 와이퍼를 최고치로 올렸어도 시야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폭우가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며 30여 분을 허비했다. 어제는 폭염으로 힘들었는데 오늘은 폭우라니 종잡을 수 없는 날씨였다. 폭염 뒤 찾아오는 집중호우는 어느덧 한국과 일본에 일상이 됐다. 극심한 땡볕과 물난리를 반복하면서 인명과 재산 피해를 키우고 있다. 그날 밤 후쿠오카 숙소에서 NHK를 통해 규슈 지역을 강타한 집중호우 소식을 접했다. 이시바 총리까지 나서 가고시마 일대 호우경보를 언급하며 피해 최소화를 위한 정부의 노력을 강조할 만큼 큰 비였다. 출국 이틀 전, 구마모토 아소(阿蘇)산에 올랐다. 대학 1학년 1984년에 처음 올랐으니 40년 만이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으며 오른 쿠사센리(草千里) 평원부터 나카다케(中岳) 화산 분화구, 다이칸보(大觀峯) 전망대로 이어지는 풍광은 절경이었다. 특히 불구덩이나 다름없는 산 아래와 달리 산 정상 기온은 23도에 불과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한기를 느끼며 40년 전 여름, 나를 맞았던 일본 홈스테이 가족을 떠올렸다. 딸만 셋인 집에서 한여름 외국인 남학생을 받는 건 쉽지 않다. 지난해 방문길에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느냐고 물었다. 이제는 80대 중반이 된 아츠코 아주머니는 “어라, 그렇네”라며 무심코 답했다. 의식조차 하지 않은 환대였다. 돌아오는 날, 일본 언론은 전날 비 피해를 집중보도했다. 홈스테이 가족의 안전을 기원했다.
    정권 위협하는 기후위기 속 일본
    by 임병식
    2025.08.10 14:13:18
  • 최근 반려동물의 증가와 함께, ‘리얼 베이비돌’ 인형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실제 아기처럼 정교하게 제작된 인형을 통해 불안 완화와 정서적 안정을 얻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인형을 통해 외로움과 상실을 치유받는 이들에게 감정과 존재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위로와 치유의 과정을 보며 자연과 우리의 관계를 질문해 본다. 인간은 문명을 창조했다. 불을 발견하고 바퀴를 만들었으며, 도시를 세우고 산업을 일으켰다. 자연을 정복하고, 기술 발전을 통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와 노동을 대신하는 지금, 인간은 자연 없이 살 수 있을까. 지난 6월,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DMZ 평화생명동산을 찾았다. 16년째 현장을 가꾸고 있는 정성헌 이사장은 “이곳은 인간이 만든 공간이 아닙니다. 자연이 만든 삶터입니다. 인간은 그저 머물며 치유와 희망을 얻을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바람과 흙냄새까지 살아 숨 쉬는 동산. 그곳은 단순한 교육장이 아닌 생명과 평화의 성소였다. 자연은 쉼 없이 자신을 회복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진정한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개발이 멈춘 DMZ 생태보존지구는 다양한 야생 동식물이 자생하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공간에서 자연은 본래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연이라는 ‘비인간 존재’의 강력한 메시지로, 자연을 지키는 일이 단순한 환경보호를 넘어, 인류의 생존 조건이자 평화의 출발임을 각인시켰다. 도시화와 산업화는 우리 삶을 급격히 바꾸었다. 도시는 과밀과 고립에 시달리고, 농촌은 감소와 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다. 기술과 효율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점점 자연과 단절되었고, 단절은 고립과 상실을 넘어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그동안 깨끗한 물, 건강한 흙, 맑은 공기의 가치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은 생태계를 파괴했고,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과 홍수, 가뭄과 산불의 빈번한 자연재해는 우리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되묻게 한다. 자연은 더 이상 무한정 제공되는 대상이 아니며, 자연을 지키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자연은 인간 생명의 지속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균형과 공존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이끌 지도자 양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기술 중심이 아닌 생명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이들, 곧 자연 생태의 가치 철학을 갖춘 이들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만을 중심에 두는 사고를 넘어, 자연과 비인간 존재들을 ‘행위자(Actant)’로 바라보며 그들과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했다. 인간은 자연과 연결된 존재이며, 그 관계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대형 선박은 정교한 기술의 집약체지만, 위기 상황에서 일부가 붕괴되도록 설계된다. 선체 전체의 위험을 막기 위해 의도된 약점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를 ‘디자인 위크 니스(Design Weakness)’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신학적 관점에서 창조주는 인간을 완전한 자립체로 만들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에 의존하도록 디자인되었으며 그 의존성은 계획된 약점이다. 자연과의 연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이다. ‘비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배제하거나 지배할 대상이 아니다. 자연, 동물, 다양한 생명체들은 인간이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고, 상처받은 감정을 회복하며,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배우고,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의 실험은 DMZ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DMZ가 보여주는 공존의 생태는 농촌에도 뿌리내리고 있다. 농촌은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연 생태 공동체의 가능성을 지닌 곳이다. 이것이 또 하나의 ‘농촌유토피아’이며, 지역의 지속 가능한 경제·문화 모델이기도 하다. 전남 곡성과 충북 괴산에 진행되고 있는 ‘농촌유토피아 선도마을’은 이러한 비전을 실천에 옮기는 중요한 기반이다. 비인간이 인간을 구한다. 자연을 보존하고 되살리는 일은 인간을 구하는 일이다. 자연과 공존하는 삶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자연’을 조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후 위기와 지역 소멸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 농촌이 다시 살아나는 길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이다.
    ‘비인간’이 인간을 구한다
    by 조금평
    2025.08.01 14:05:01
  • 정책은 이성의 산물일까, 감정의 표현일까. 공공정책이란 이름 아래 제안되는 수많은 제도들은 과학적 근거, 전문가의 논리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정책을 움직이는 힘은 합리성을 넘어 정서와 감정, 그리고 공감으로 뒷받침된다. 그런 이유에서 ‘정책 브랜드(policiy brand)’란 개념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책을 논할 때의 필요조건은 합리성이다. 문제 진단, 대안 탐색, 비용 편익 분석. 이 모든 과정이 이성적 판단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현실의 정책은 종종 그 합리적 울타리를 넘어서는 대중의 정서와 정치적 역학에 좌우된다. 그래서 국민이 정책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정책과 어떻게 정서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느냐도 중요하다. 즉 정책은 단순히 이성적 설계물을 넘어 ‘감정적 언어로 포장된 정치적 선택’으로도 표현된다. 때문에 정책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타당성이라는 기초 위에 국민의 공감이라는 정서적 지지대가 굳건히 세워져야 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과학적 근거와 합리적 추론을 내세워 정책 제안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데이터를 갖고 있습니다’, ‘국제 비교 지표가 있습니다’, ‘전문가 검토를 거쳤습니다’와 같은 익숙한 접근을 선호한다. 그리고, 정부의 담당자들이 합리적인 기준에 의해 최적의 선택을 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이미 1940년대에도 행동경제학의 아버지였던 하버트 사이먼은 정부정책의 선택과정에서 공무원 역시 ‘한계적 합리성’의 틀 안에서 최적의 해법보다는 ‘만족스러운 해법’을 찾는 경향이 있음을 밝혔다. 정책결정의 과정에서도 정책의 수용 과정에서도 단순히 합리적인 접근만으로는 정책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지난 2005년 경주로 지역선정이 된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의 경우만 봐도, 초기 필요성과 방사성 물질이 실제로 위험하지 않다는 주장만 반복하다가 굴업도에서 부안까지 19년 동안 부지선정을 못하고 표류했다. 결국 2005년 전문가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를 설득하고, 지역사회 발전과 실생활에 이점을 준다는 구체적인 스토리를 통해 지역민을 설득하면서 성공적으로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미국산 소고기 사태나, 의대정원 2000명 증원, 초등학교 5세 입학 등 합리적으로는 필요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정책들도 ‘왜,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스토리라인을 만들지 못하면서 정책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실패는 단순히 정책실패에 끝나지 않고 오랜 기간 사회적 후유증을 낳기 때문에 정책의 초기 단계부터 어떻게 정책을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기업의 정책 담당자들은 회사가 추구하는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정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공공의 서사’ 속에 위치시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첫째, 정책에 ‘이야기’를 입히고, 숫자를 넘어서는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건조한 통계를 넘어 그 정책이 누구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손에 잡히는 이야기를 보여줘야 한다. 예를 들어, 환경 정책이라면 탄소 배출량 감소 그래프에 그치지 말고, 맑은 공기 속에서 마스크를 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는 식이다. 생생한 스토리는 정치인에게는 명분과 비전을, 국민에게는 공감과 참여의 동기를 제공한다. 둘째, ‘핵심 가치’를 명확히 하고 ‘상징’을 만들어야 한다. 정책은 복잡한 개념의 묶음이어서는 안 된다. 간결하고 강력한 슬로건이나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정책의 본질을 압축해야 한다. 독일의 산업계는 높아가는 임금과 노후화되는 산업시설을 바꾸기 위해 정부의 정책변화가 필요했다. 그들은 정부와 함께 ‘인더스트리 4.0(Industry 4.0)’이라는 슬로건 아래 제조업과 ICT의 결합을 통해 국가차원에서 스마트공장, 디지털 전환을 촉진하는 캠페인을 만들어 냈다.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통해 정치권의 지지층과 국민의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했다. 셋째, ‘참여의 장’을 확장해야 한다. 정책은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소통의 과정이다. 국민과 이해관계자들이 정책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길을 넓히고, 그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단순히 정보 제공을 넘어,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공동의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합리적 근거는 전문가의 언어일 수 있으나, 참여는 모두의 언어라는 점을 잊지 말자. 국민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담긴 정책에 더 큰 애정을 느낀다. 사소해 보이더라도 국민의 여론을 조사하거나 하는 방법들은 매우 효과적이다. 넷째, 과학과 합리기반의 단어들을 ‘공공의 언어’로 번역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정책 제안은 종종 전문가 언어에 갇힌다. 하지만 매력 있는 정책 브랜드는 누구나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 ‘위해 우려’라는 말보다 ‘우리 아이의 안전’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닿는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소통’으로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정책 수립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끝이 아니다. 정책이 집행되는 과정에서도 기업에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책 추진과정에서 정책을 안착시키고 지속될 수 있도록 정부를 지원하고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책과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대안을 공유하면서 국민과 이해관계자 모두와 정서적 거리를 계속 좁혀가야 한다. 그래야 정책성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감정 없는 정책은 제안될 수는 있어도, 살아남기 힘들다. 정책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때 비로소 사회적 선택을 받는다. 데이터와 그래프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책은 ‘좋은 말’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될 때 힘을 얻는다.
    정책은 숫자보다 ‘서사’를 만들어야
    by 이보형
    2025.07.24 10:37:56
  • 제주에 머문 지난주, 많은 건축물을 보고 다녔다. 소문난 건축물을 순례하는 내내 왜 건축을 예술 영역에 포함시키는지 어렴풋하니 수긍했다. 또 세계적으로 일본 건축이 강한 이유도 헤아려봤다. 제주를 대표하는 현대 건축물은 수풍석 뮤지엄과 본태박물관, 방주교회, 포도호텔, 유민미술관, 글라스 하우스다. 이들 건축물만 보러 오는 여행객도 꽤 된다. 모두 일본과 연관돼 있다. 본태박물관과 유민미술관, 글라스 하우스는 안도 다다오(Tadao Ando) 작품이다. 나머지 수풍석 뮤지엄과 방주교회, 포도호텔은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Itami Jun)이 설계했다. 둘 다 일본에 뿌리를 뒀다. 볼거리가 흔전만전 널린 제주에서 멋진 건축물과 만남은 색다른 경험이다. 본태박물관과 수풍석 뮤지엄, 방주교회, 포도호텔은 서로 가깝다. 본태박물관은 전시 작품도 수준급이지만 건축물 자체로도 멋지다. 안도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가다. 그의 건축 철학은 자연과 조화, 즉 자연과 조응하는 것이다. 오사카 ‘빛의 교회’와 시코쿠 나오시마 ‘지추(地中)미술관’은 안도를 세계에 알린 걸작이다. 안도는 빛을 활용하는데 탁월하다. 빛의 교회와 지추미술관은 정점에 있다. 안도는 바다와 인접한 지추미술관을 땅 밑으로 설계함으로써 자연을 존중했다. 수년 전 이곳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버려진 섬을 예술 섬으로 바꾼 것도 놀랍지만 미술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바꿨다. 섭지코지 유민미술관과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SAN)도 안도 작품이다. 이들은 지추미술관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노출 콘크리트를 기본으로 빛과 물을 차용해 비슷한 느낌이다. 유민미술관 역시 수평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시공간을 땅 속으로 설계했는데 편안하다. 정원과 전시공간을 잇는 통로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한쪽 벽면을 창으로 뚫었는데 그 프레임 속으로 푸른 파도와 성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본태박물관 또한 안도의 건축 철학에 충실하다. 노출 콘크리트와 빛, 물이 어울려 ‘本態, 본래의 모습’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살렸다. 관람 동선 끝에 배치한 수련 연못 또한 설계자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유민미술관 앞 ‘글라스 하우스’는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등장한 핫 플레이스다.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뻗은 V자 건물은 그대로 풍경이 됐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닿은 바다가 보이는 통유리가 시원스레 펼쳐 있다. 글라스 하우스에서는 제주 농산물로 빵을 굽는다. 제주의 바람과 물, 흙이 키운 당근과 감자, 마늘, 호박, 꿀이 주된 식재료다. 안도의 작품이 한국과 일본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두 나라 정서가 비슷한 때문이다. 두 나라 국민들은 여백 미와 사색에 잠겨도 좋을 단아한 분위기에 푹 빠진다. 제주에서 안도와 함께 거론되는 스타 건축가는 이타미 준이다. 한국명은 유동룡이다. 그는 김수근 건축상과 프랑스 예술훈장 슈발리에와 레지옹 도뇌르 훈장, 일본 최고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수상했다. 방주교회와 포도호텔, 수·풍·석 뮤지엄에는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이 온전히 반영돼 있다. 이타미 준 또한 자연과 조화를 지향한다. 현지인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는 방주교회도 각별하다. 물위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를 형상화했는데, 삼방산을 향해 나갈 채비를 마친 모습이다. 최근 내부 문제로 소란스럽다니 안타깝다. 비오토비아 수풍석 뮤지엄은 물과 바람, 돌을 모티브 삼았다. 많은 이들은 이곳에서 위안을 얻는다. 수 박물관은 천단을 연상케 하며, 풍박물관에서는 무시로 바람 소리를 듣는다. 이타미 준의 딸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2024년 제주 저지마을에 유동룡 박물관을 열었다. 두 사람 외에도 일본에는 내로라하는 건축가가 즐비하다. 우리는 한 명도 없는 프리츠커 상을 무려 10명이나 받았다. 안도 다다오, 단게 겐조, 카즈요 세지마, 이소자키 아라타, 이토 토요, 쿠마 켄코 류에 니시자와 등이다. 지난해 도쿄여행 당시 들린 네즈 미술관도 프리츠커 상을 받은 쿠마 켄고(Kengo Kuma) 작품이다. 네즈 미술관은 미술관 자체가 빼어난 작품이다. 대나무와 목재로 설계한 진입부는 인상적이다. 이 길에 서자 어린시절 추억이 되살아났다. 하코네 폴라 미술관도 매력적이다. 푸른 숲 속에 서 있는 미술관은 한 마리 학을 닮았다. 흰색과 강렬한 절제미로 눈길을 끈다. 일본 건축은 왜 이렇게 잘 나갈까. 장인정신과 섬세함이 바탕에 있다. 일본에는 수 백 년 된 기업이 흔한데, 건축 또한 이런 토양에서 구축됐다.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는 정신문화도 다른 요인이다. 한국과 일본 건축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지진과 쓰나미, 화재 등 잦은 자연재해와 두 차례 원폭, 도쿄공습 등 대규모 전쟁도 건축 발전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시 짓고 튼튼하게 짓고 아름답게 지으려는 과정에서 세계 최고 수준 건축문화를 낳았다. 1995년 대지진 참사를 겪은 고베가 건축학도들에게 실험장인 이유다. 한국에도 프리츠커 수상자가 나오길 기대하는 이들에게 제주 건축기행을 권한다. /서경IN
    ‘프리츠커 상’ 10명 배출한 일본 건축의 저력
    by 임병식
    2025.07.15 16:01:39
  • 최근 미국의 '골든 돔 법안(Golden Dome Act)'과 관련 논의는 미사일 방어 체계의 미래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한국의 안보 전략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거 아이언 돔(Iron Dome)이 보여준 근접 방어의 성공 사례를 넘어, '골든 돔'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방어망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톰 크래머(Tom Cramer) 상원의원과 댄 설리번(Dan Sullivan) 상원의원이 발의한 '골든 돔 법안'은 미사일 방어 시스템의 통합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미사일 요격기를 추가하는 것을 넘어, 기존 및 신규 역량을 조화롭게 연결하여 하나의 거대한 방어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특히, 우주 기반 센서와 인공지능(AI) 기술의 적극적인 활용은 '골든 돔'이 지향하는 미래형 미사일 방어의 핵심 요소이다. 즉, 오늘날 미사일 방어 시스템은 특정 위협에 대한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골든 돔'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부터 극초음속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포괄적인 방어 능력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다양한 속도와 고도에서 작동하는 요격 미사일, 첨단 레이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우주 기반 추적 및 탐지 시스템의 통합을 요구한다. 한반도의 특수한 안보 환경을 고려할 때, '골든 돔' 개념은 한국의 미사일 방어 전략에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첫째, 다층 미사일 방어 체계의 고도화이다. 현재 한국은 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KAMD)를 구축하고 있지만, 북한의 미사일 능력 고도화, 특히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에 대한 대응 역량 강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골든 돔'이 제시하는 다층 방어망 개념은 한국이 이미 운용 중이거나 개발 중인 패트리어트, 천궁-II, L-SAM 등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상층 방어 역량을 강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둘째, 우주 기반 자산의 중요성 증대이다. '골든 돔'은 우주 기반 센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 역시 정찰 위성 개발 및 운용을 통해 북한 미사일 발사 징후를 조기에 탐지하고 추적하는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와 더불어 저궤도 위성군을 활용한 미사일 경보 및 추적 시스템 구축을 장기적인 목표로 추진해야 한다. 이는 지상 레이더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사부터 요격까지의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인공지능(AI) 및 데이터 통합의 가속화이다. '골든 돔'은 방대한 센서 데이터를 통합하고 분석하며, 최적의 요격 솔루션을 도출하는 데 AI 기술을 활용한다. 한국군도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AI를 도입하여 의사 결정 속도를 높이고, 오탐지율을 줄이며, 복합적인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다양한 센서에서 수집되는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통합하고 분석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이 동시 개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한미 동맹과의 협력 강화이다. '골든 돔' 법안 자체가 미국의 국가 미사일 방어 전략의 일환인 만큼, 한미 동맹 간의 미사일 방어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새로운 기술과 개념을 공유하고, 연합 훈련을 통해 상호 운용성을 높이며, 궁극적으로는 한미 양국이 하나의 통합된 미사일 방어 체계로 기능할 수 있도록 상호 운용성에도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골든 돔' 개념을 당장 한국에 적용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 기술적 난이도, 그리고 정치적 고려사항 등 여러 도전 과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도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사일 방어 능력의 혁신적인 발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우리는 최근 발표된 나토의 '상업우주 전략'에서 얻은 교훈처럼, 민간 우주 기업의 혁신적인 기술을 국방에 적극적으로 통합하고,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하며, AI와 같은 첨단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하여 미래형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골든 돔'이 제시하는 비전은 단순히 미사일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억제력을 제공할 것으로 한국도 '골든 돔'의 개념을 바탕으로 더욱 견고하고 포괄적인 방어막을 구축하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낼 때이다.
    ‘골든 돔’과 한국의 우주안보 전략 
    by 최성환
    2025.07.13 17: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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