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의회가 9일 밤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을 ‘도덕적 무능(incapacidad moral, moral incapacity)’을 이유로 압도적 표결로 해임했다. 전체 130명의 의원 중 123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단 한 표도 없었다. 이로써 페루는 2016년 이후 무려 8번째 대통령 궐위 사태를 맞게 됐다. 지난 9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은 쿠친스키, 비스카라, 메리노, 사가스티, 카스티요, 볼루아르테, 그리고 이번에 승계한 헤리까지 총 7명이다. 이 가운데 임기를 제대로 마친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번 탄핵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예고된 ‘시간 문제’였다. 볼루아르테는 2022년 12월 부통령 시절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다 해임되면서 헌법에 따라 자동 승계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러나 정치적 기반과 지지율은 취임 직후부터 취약했다. 재임 중 8차례의 탄핵안이 발의됐고 4건은 본회의에 상정됐으나, 분열된 의회 구도 탓에 절대다수인 87표를 넘지 못해 무산돼 왔다. 하지만 내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정당들이 선거 전략에 돌입하면서, 지지율 3%의 대통령과 선을 긋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이 확산됐다. 결국 우파와 중도 정당이 일제히 입장을 바꾸면서 탄핵은 몇 시간 만에 성사됐다. 결정적 계기는 8일 밤 리마에서 열린 인기 그룹 아과 마리나의 공연 중 범죄 조직의 총격 사건 때문이었다. 밴드 단원 4명과 관객 한 명이 부상한 이 사건 직후 치안 악화를 이유로 다섯 건의 파면 동의안이 동시에 제출되면서 정국은 급류를 탔다. 여기에 반정부 시위 진압 과정에서 60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 ‘롤렉스게이트'로 불리는 고급 시계·보석 미신고 파문, 성형수술을 위한 직무 이탈 등이 누적되며 정치적 신뢰는 급격히 붕괴됐다. 검찰은 그녀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탄핵되면 권력 서열에 따라 부통령 또는 국회의장이 대통령에 즉시 취임한다. 국회의장은 매년 정당 합의로 교체돼, 준비되지 않은 인물이 순번에 따라 대통령에 오르는 경우가 잦다. 이번에 취임한 38세의 호세 헤리 역시 정치 경험이 얕고, 성폭력 및 부패 의혹으로 조사를 받은 전력이 있다.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2016.7–2018.3 (약 1년 8개월) 경제장관, 민간경제인 선거 당선 오데브레히트 의혹, 사임 *마르틴 비스카라 2018.3–2020.11 (약 2년 8개월) 부통령, 주지사 부통령 승계 뇌물 수수 의혹, 탄핵 *마누엘 메리노 2020.11.10–2020.11.15 (5일) 국회의장 국회의장 승계 대규모 시위로 인한 사임 *프란시스코 사가스티 2020.11–2021.7 (약 8개월) 국회의원(과도연합) 국회의장 승계 과도정부 수반, 임기 종료 *페드로 카스티요 2021.7–2022.12 (약 1년 5개월) 교사·노조 지도자 선거 당선 자가 쿠데타 시도, 탄핵 및 체포 *디나 볼루아르테 2022.12–2025.10 (약 2년) 부통령 부통령 승계 ‘도덕적 무능’ 표결로 탄핵 *호세 헤리 2025.10–2026.7 (예정, 약 9개월) 국회의장 국회의장 승계 헌법상 승계(대선 전 과도정부) ‘도덕적 무능’ 조항은 19세기 헌법에 포함된 모호한 규정으로, 대통령을 형사소추 없이도 신속히 해임할 수 있게 한 근거가 됐다. 문제는 이를 견제할 사법·헌법적 절차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소 사전 심사나 상원 재심 절차 없이 국회 표결만으로 탄핵이 확정된다. BBC는 이를 “의회의 손에 지나치게 집중된 해임 권한이 만들어낸 구조적 불안정”이라 평했고, 니콜라스 왓슨 테네오컨설팅 대표는 “경험이 부족한 헤리 정부가 초기에 흔들릴 경우 정치적 공백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년 4월 예정된 대선에는 43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군소정당이 난립해 정강·정책이 맞지 않아도 유명 인사를 영입하며 합종연횡이 반복되고, 선거 후 의회는 극도로 파편화돼 어떤 대통령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다. 이런 구조가 탄핵 정치를 되풀이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페루 경제는 비교적 견조하다. IMF에 따르면 2023년 -0.6% 역성장 후 2024년 3.3%로 회복했고, 2025년에도 3%대 성장이 예상된다. 구리 생산 증가와 공공투자가 경기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인플레이션도 1.8% 수준으로 안정적이다. 페루의 정치 위기는 한 정권의 몰락이 아니라, 탄핵이 정치 경쟁 수단으로 기능하는 구조적 문제의 반복이다. 이러한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9년 8명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2025.10.15 20:4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