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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주 ‘살풍경’… 2026년 중간선거 겨냥 ‘단속’ 더 심해질 것

돈·기술 당기며 기술자 내쫓는 어이없는 자충수… 부처 간 모순된 정책, 조정 능력 없는 백악관
등록 2025-09-11 21:41 수정 2025-09-13 10:27
미국 조지아주 포크스턴의 이민세관단속국 구금시설에 갇혔던 현대자동차그룹-엘지에너지솔루션 배터리공장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2025년 9월11일 풀려나 귀국용 전세기가 대기 중인 애틀랜타공항행 버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조지아주 포크스턴의 이민세관단속국 구금시설에 갇혔던 현대자동차그룹-엘지에너지솔루션 배터리공장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2025년 9월11일 풀려나 귀국용 전세기가 대기 중인 애틀랜타공항행 버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심 정책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미국 제조업 재건이다. 둘째, 불법 이민자 단속·추방이다. 이 둘을 관통하는 건 일자리다. 제조업 재건을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한다. 불법 이민자 단속·추방을 통해 그들이 뺏어간 일자리를 미국인에게 돌려준다. 얼핏 그럴싸해 보인다. 틀렸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둘이 충돌할 때 조정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조지아주 엘러벨에서 벌어진 살풍경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투자협약 잉크 마르기도 전에

 

2025년 9월4일 엘러벨의 현대자동차그룹-엘지(LG)에너지솔루션(엘지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상공에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지상에선 국토안보수사국(HSI), 이민세관단속국(ICE), 마약단속국(DEA), 주류·담배·총기·폭발물단속국(ATF), 국세청(IRA) 등 연방정부 요원을 비롯해 조지아주 경찰 등 500여 명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군사작전이라도 하듯 현장을 급습했다. 현장에서 모두 475명이 체포됐다. 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 이민자 단속 사례다.

현대차는 2005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공장(HMMA)을 시작으로 미국 현지 생산에 나섰다. 2022년 5월엔 조지아 주정부와 투자협약을 체결하고 126억달러를 들여 현대차메타플랜트(HMGMA)를 짓기로 했다. 조지아주 역사상 최대 규모 외자 유치 사례다. 2025년 3월26일 메타플랜트 준공식엔 브라이언 켐프 주지사를 비롯해 유력 정치인이 대거 참석했다. 당시 현대차 쪽은 자료를 내어 “미국 진출 이후 현대차는 205억달러를 투자해 직간접적으로 57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며 “현대차는 2025~2028년 미국 제조업 분야에 210억달러를 추가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2025년 3월26일 미국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메타플랜트 준공식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이 브라이언 켐프 주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현지 생산된 아이오닉9 전기차에 서명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5년 3월26일 미국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메타플랜트 준공식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이 브라이언 켐프 주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현지 생산된 아이오닉9 전기차에 서명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9월4일 단속 현장은 현대차와 엘지엔솔이 2025년 말 가동을 목표로 짓고 있는 합작 배터리 생산 시설이다. 체포 대상 한국인 노동자는 300여 명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몸수색 뒤 쇠사슬 등으로 몸통과 손발이 결박된 채 호송버스에 태워졌다. 동맹국 기업의 투자 현장에서 동맹국 노동자가 범법자 취급을 당했다. 한국도, 세계도 경악했다. 국토안보수사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지부 쪽은 9월5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단속은 조지아 주민과 미국인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미국에 불법으로 입국하는 것 자체가 범죄다. 불법체류자를 고의로 고용하는 것도 범죄다. 불법체류자를 선의로 고용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적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미국인을 고용하는 경쟁업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고용한다. 그들이 임금 하락을 초래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경·이민 정책을 총괄하는 ‘국경 차르’인 톰 호먼도 9월7일 시엔엔(CNN)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미국인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불법 이민자 단속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만들어줄 외국 기업의 투자를 위협하고 있다. 전형적인 자충수다.

국토안보부 단속 골몰, 상무·재무부 외자 유치 골몰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단속은 (불법 이민자를 고용하지 말라고) 미국 전역의 고용주들에게 보낸 일종의 경고다. 또한 외국 기업에 투자를 요구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노동력은 제한하는 미국 우선주의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추방 경제가 조지아를 때리다'란 제목의 9월7일치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신문의 지적을 귀담아들어보자.

“체포된 한국인 일부는 건설 공사를 감독하거나 미국인 노동자를 교육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품질 관리는 제조업 성공의 핵심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은 자국의 숙련된 노동자들을 데려와 품질 관리에 나선다. (…) 조지아주 사건은 트럼프 행정부의 최우선순위가 미국 체류 기간과 상관없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법 이민자를 모조리 추방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모든 고용주가 이민세관단속국의 잠재적 단속 대상이 돼버렸다. 최근 고용 통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러한 정책은 이미 미국 노동시장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미국에 와서 일할 수 있는 더 많은 합법적 방법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미국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메타플랜트와 현대자동차그룹-엘지에너지솔루션(엘지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모습. AFP 연합뉴스

미국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메타플랜트와 현대자동차그룹-엘지에너지솔루션(엘지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모습. AFP 연합뉴스


국토안보부는 단속에 혈안이 된 반면, 상무부와 재무부는 외자 유치에만 골몰한다. 정작 주무부서인 국무부는 미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 노동자의 비자 문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각 부서가 따로 움직이면서 혼란만 커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과 마찬가지다. 일방적 관세 부과의 목적은 무역적자 해소일 텐데, 정작 수입 자재 상품의 가격 폭등으로 피해를 보는 건 미국 기업과 소비자다.

외국의 돈과 기술은 원하지만 외국인은 원치 않는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모순된 태도는 ‘대외정책의 국내 정치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은 2026년 11월3일 중간선거를 치른다. 하원의원 435명 전원과 상원의원 100명 가운데 35명, 36개 주 주지사를 새로 뽑는다.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전례는 거의 없다.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재선 대통령은 그날부터 ‘레임덕’ 신세다. 외자 유치 효과는 일정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다. 불법 이민자 단속은 곧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어느 쪽을 선호할지는 분명해 보인다.

 

늦춰진 귀국, 트럼프의 조삼모사 탓

 

오랜 기간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조지아주는 전형적인 ‘스윙스테이트’(격전지)로 탈바꿈했다. 2016년 대선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엔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24년엔 다시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했다. 격전지인 조지아주에서 벌인 유례없는 대규모 불법 이민자 단속 작전은 여타 격전지의 지지층 결집 효과를 부를 수도 있다. 현대차의 투자로 조지아주에선 신규 일자리 8500개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번 단속으로 투자가 위태로워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대선 공화당 후보 경선 때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브라이언 켐프 주지사와 껄끄러운 사이다.

구금된 한국인 노동자 300여 명은 애초 9월10일 ‘자진 출국’ 형식으로 귀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을 태우고 올 전세기도 현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미국 쪽 사정’으로 돌연 계획이 바뀌었다. 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의 말을 따 “트럼프 대통령이 ‘구금된 한국인은 모두 숙련된 인력이니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서 계속 일하면서 미국의 인력을 교육·훈련하는 방안과 귀국하는 방안에 대해 한국의 입장을 알기 위해 귀국 절차를 일단 중단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체포된 노동자를 ‘불법체류자’로 규정하고 “할 일을 한 것”이라더니, 그새 변심한 건가? 한국인 노동자들은 체포된 지 7일 만인 9월11일 새벽 풀려나 버스편으로 귀국행 전세기가 대기 중인 애틀랜타공항으로 이동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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