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달고 노랗게 단풍이 든 유럽의 큰잎피나무(Tilia platyphyllos). 출처 Pixabay
한가위 연휴에 크로아티아의 소도시를 11살 조카와 함께 걸었다. 미국에서 지내는 조카가 가을 방학을 맞아 단짝 크로아티아 출신 친구의 고향 마을을 함께 가자는 제안에 응했고, 내게 같이 가자고 응석을 부리면서 준비된 여행이었다. 크로아티아의 서쪽 휴양도시 오파티야에 있는 ‘로브란’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며칠 머물렀다. 해발 1396m 우치카산이 우뚝 솟은 그 동네에 도착하자 마치 내 고향 가야산국립공원에 든 것만 같은 친숙함을 느꼈다. 조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우리 외할머니 동네랑 비슷하네. 낯설지가 않아”라고, 붉은 금발의 자기 친구에게 말하는 게 들렸다.
우치카산의 최고봉인 보야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날씨가 맑아 아드리아 해안과 섬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베네치아까지 건너다보였다. 산에서 바다를 따라 여러 갈래로 줄줄 이어지는 걷기 좋은 그 길들 위에는 피나무가 가로수로 많이 서 있었다. 피나무 잎사귀는 노랗게 물드는 중이었다.
“이 노란 하트 모양 잎은 무슨 나무야?”
“피나무.”
“뭐, 피나무? 피를 흘리는 나무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무를 쳐다보며 조카가 되물었다.
피나무.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
“동물의 피부나 식물의 껍질을 한자로 ‘皮’(피)라고 하는데 옛사람들이 이 나무의 껍질을 소중히 여겨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나봐. 이 나무로 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건을 만들어 썼거든. 옷도 해 입고 그릇과 밧줄과 밥상도 만들고 피아노와 리코더 같은 악기도 만들었어.”
피나무는 30여 종이 북반구에 널리 분포한다. 동아시아와 유럽 문화권 모두 피나무를 두루 활용했다. 피나무의 질기고 길게 벗겨지는 속껍질을 섬세하게 가늘게 찢어 끈이나 실로 썼다. 끈을 꼬아서 밧줄을, 실을 엮어서 직물을 만들었다. 우리네 살림살이를 공장에서 찍어내기 전까지 생활 속 곳곳에 피나무가 있었을 것이다. 피나무 겉껍질은 일종의 방수 기능을 갖춰 우의를 만들거나 지붕을 엮는 재료로 딱 들어맞았다.
깎고 엮고 잇고 꼬는 방식에 따라 피나무는 또 다른 형체의 물성으로 사는 것 같다. 크로아티아에서 내가 만난 피나무는 두 종류였다. 그 둘을 유럽 사람들은 작은잎피나무와 큰잎피나무라고 부른다. 작은잎피나무는 주로 깊은 숲과 산에 산다. 큰잎피나무는 가로수나 공원수로 즐겨 심기에 오래된 성당과 시끌벅적한 주점과 카푸치노가 맛있던 작은 카페와 한적한 골목 모퉁이에서 나와 자주 마주쳤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중 하나인 780년 된 큰잎피나무가 자그레브에 있다. 그 지역 사람들 말로는 1242년 타타르족을 피해 달마티아로 도망치던 벨라 4세 국왕이 심은 나무가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국왕의 이름을 따서 그 나무를 크로아티아어로 ‘벨리나리파’라고 부른다. 그러한 역사와 나무 자체의 생태적 가치를 언급하며 자그레브시는 벨리나리파의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를 2022년 시작했다.
피나무는 유럽 전역에 살고 민담에도 자주 등장한다.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서는 다산과 관련이 깊다. 자잘한 꽃이 셀 수 없이 많이 피어서 그럴 거다. 꽃이 많이 피니 밀원수(꿀벌이 꿀이나 꽃가루를 얻기 위해 찾는 나무, 즉 꿀의 원천이 되는 수목을 일컫는다)로 좋다. 피나무꽃에서는 은은하고도 달짝지근한 꿀 냄새가 난다. 하트 모양의 잎 때문인지 로맨스와 연인과 연관 짓기도 하고, 낭만주의 시에도 자주 나온다. 슬라브 신화와 독일 민속에서는 공정함과 정의를 상징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진다. 피나무를 아예 자국의 나무로 정한 나라는 체코다.
큰잎피나무의 아름다운 수형. 출처 케임브리지대학 식물원
이렇게 사랑받는 나무이다보니 유럽에는 크게 자란 피나무가 줄지어 선 가로수길이 제법 있다. 10년 전 독일 출장길에 만난 피나무 가로수길을 잊을 수가 없다. 과거 동독과 서독이 대치하던 지역을 통일 이후 생태적 공간으로 탈바꿈한 그뤼네스반트 1400㎞를 탐사하기 위한 일정이었다. 철조망을 걷고 얻은 녹지대와 시민이 앞장서 지키는 멸종위기종의 서식지를 방문한 것도 좋았지만 베를린에서 만난 피나무 가로수길이 내게는 특히 압도적이었다. 베를린궁전에서 브란덴부르크문까지 이어지는 보행자 전용 잔디 길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피나무는 가을 한복판에서 깊이 물들어 있었다. 피나무를 일컫는 린덴(Linden)을 따서 그 길은 ‘운터 덴 린덴’으로 불린다. 언젠가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폴란드 쇼팽국제공항에서 바르샤바에 이르는 피나뭇길도 그에 못지않을 거라고 맞장구쳤다.
피나무는 잘리고 나서 재목으로 더 오래 산다. 목재가 무척 부드럽고 가볍고 섬세하다. 깎아놓으면 속살은 흰색과 노란색을 내비친다. 색이 밝고 결이 고운데 가공마저 까다롭지 않으니 조각이나 가구 제작자들이 애호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피나무가 있다. 심지어 전국에 산다. 유럽에서 구분하는 것처럼 잎이 작은 ‘피나무’도 있고 잎이 큰 ‘찰피나무’도 있다. 세간살이로 널리 쓰이다보니 수시로 베어낸 탓일까. 안타깝게도 피나무 아름드리 고목을 지금은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내 목을 한껏 젖혀야 겨우 높이가 가늠되는 커다란 피나무와 찰피나무가 깊은 숲에 드물지 않게 산다. 찰피나무와 외형이 아주 비슷한 보리자나무가 있다. 주로 사찰에서 심어 기른다. 동글동글한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 보리자나무를 석존이 깨달음을 얻은 인도의 보리수와 종종 혼동하는데, 전혀 다른 나무다. 전자는 찰피나무를 닮은, 절 마당이나 뒤꼍에 사는 보리자나무요, 후자는 뽕나무과의 열대성 상록수다. 인도의 그 보리수는 우리나라 숲에 야생할 수 없다.
유럽에서 피나무를 유독 사랑하는 것에 견줘 우리는 피나무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 편이다. 눈에 띄는 관상용 나무이면서 꿀과 목재(특히 합판과 베니어)를 얻지만 국내에서는 유럽에서만큼 피나무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전통 인견을 만들려고 피나무 속껍질을 쓴다. 그 인견을 일러 일본 사람들은 숲의 축복으로 만든 원단이라는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만개 후 막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피나무(Tilia amurensis). 출처 국제수목협회
피나무는 땅속 미생물과 균근 네트워크를 이루는 나무로 생태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된다. 내가 피나무의 어떤 강인한 생명력을 느낀 건, 2025년 3월 대형 산불로 큰 피해를 본 경북 청송과 안동 일대에서다. 화마에 잿빛으로 변한 숲이 얼마 지나자 다시 초록빛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피나무가 서둘러 맹아를 내고 잎을 크게 펼쳐 숲을 살리기 위해 고투하는 것이 아닌가. 상처를 입고도 꽃을 피운 피나무가 수분 매개자를 부르려고 향기를 너울너울 퍼뜨리는 숲에서 나는 잠시 황홀했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산불피해지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던 순간은 지금도 여전히 거룩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처음 가본 크로아티아의 그 낯선 동네에서 익숙함을 느낀 건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거기에 사는 식물이 뭔가 모르게 내 눈에 익어서 그랬던 것 같다. 위도가 엇비슷한 곳에 사는 식물은 대개 좀 닮은 구석이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약 6600만~2300만 년 전 대륙이 연결돼 있던 시절에는 온대 혼합 중생대림이 유럽과 아시아와 북아메리카에 걸쳐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지구는 대체로 더 따뜻하고 습했다. 이후 오늘날 동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동부 사이 극적인 기후 및 지질 변화가 생겼다. 신생대 제3기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 간의 동식물 교류를 가능하게 했던 베링육교가 깊은 물속에 잠기자 육상 통로가 사라졌다. 두 지역 간 동식물 교류가 멈췄고 유전자 흐름은 중단됐다. 한때 연결돼 있던 개체군들은 각자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피나무와 크로아티아의 피나무가 닮은 것도 그래서다. 아주 먼 과거의 뿌리는 하나지만 각자 자리에서 그 환경에 적응해 살다보니 저마다의 종(種)으로 나아간 것.
꽃이 다 진 후 동글동글한 열매를 매단 찰피나무(Tilia mandshurica). 허태임 제공
내가 사는 경북 봉화 춘양에는 요즘 피나무 단풍이 절정이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조카 생각이 많이 난다.
“이모, 이 하트가 제일 예뻐. 한국 가서도 간직해줘.” 크로아티아 피나무 아래에서 낙엽을 골라 들고 조카가 말했다. “이것도 예쁘지? 이 하트 잎을 엽서에 붙여서 로찌아에게 편지 쓸 거야. 고향으로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미국으로 돌아간 조카는 자기가 사는 켄터키주 시골 동네에서 피나무를 만났다고 손가락 하트와 함께 이파리를 찍어서 내게 보내왔다. 피나무를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도 했다. 반가운 마음에 답장을 쓰다가 나는 생각했다. 마을과 마을을, 세계와 세계를,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존재가 피나무일 수도 있겠구나, 가을이면 더욱 그렇겠구나 하고.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숲을 읽는 사람’ 저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드디어 실물 나왔다…통일교 ‘김건희 선물’ 그라프 목걸이·샤넬백
“청첩장 전달한 적 없습니다” [그림판]
김건희, ‘왕의 의자’ 앉기까지…“역대 대통령 아무도 그런 적 없다”
3600t급 해군 잠수함은 왜 ‘이봉창함’이 아닌 ‘장영실함’이 됐나
‘이재명 고가 아파트’ 비판한 송언석은 ‘대치 50억 아파트’ 보유 [공덕포차]
징계의 독립 [그림판]
[단독] 한강버스 사고나면 어쩌려고…38명 필요한 수상보안관 ‘6명뿐’
도로표지판 도배한 국힘 신영균 고문 가족 ‘식당 광고’, 철거한다
김선수 전 대법관 “불필요한 전원합의체 선고는 하급심 통제 우려”
러트닉 만난 김용범 “관세협상 일부 진전…끝날 때까지 끝난 것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