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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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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 청문회 두고 촌철살인하던 개그맨, 고 전유성

등록 2025-09-29 11:03 수정 2025-09-29 11:08
개그맨 이홍렬이 2025년 9월2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S 신관 ‘개그콘서트' 녹화 스튜디오에서 엄수된 개그맨 전유성 노제에서 영정을 운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개그맨 이홍렬이 2025년 9월2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S 신관 ‘개그콘서트' 녹화 스튜디오에서 엄수된 개그맨 전유성 노제에서 영정을 운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

정치철학자 정화열 교수가 ‘공공지식인’으로서의 한나 아렌트를 평가하면 한 말입니다. 종종 우리는 도저한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지식인을 기대하곤 합니다. 개그맨 고 전유성님은 현실의 문제에 가장 구체적으로 응답한 ‘우리들의 셀러브리티’였습니다.

그 면모는 개그맨 고 전유성님이 한겨레21에 1997년 4월말 보내서 5월1일 발행된 글 한편에서도 보여집니다. 1997년 4월7일~4월15일 서울 구치소에서 열린 한보 청문회에서 정태수 당시 회장이 내놓은 ‘잘 모른다’ ‘기억에 없다’ ‘생각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네 개의 대답을 반복하는 모습을 풍자한 ‘4지선다가 문제다, 12지 선다로 바꿔야’라는 문장, 그리고 개그맨이 말하는 ‘유머가 없어도 웃기는 청문회’의 모습은 2025년 오늘 읽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들입니다.

개그맨 고 전유성님이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을 기억하며, 그가 남긴 글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편집자


아이들은 따라하지 마세요

 

전유성/개그맨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 속의 옛 친구는 대낮부터 소주를 마시면서 내게 막 욕을 해댄다. 한보 청문회를 보면서 성질이 나서 그런단다. 나도 물론 성질이 났다.

한보 청문회를 하기 전 정태수는 아들의 구속, 전재산 몰수 등으로 충격을 받아 폭탄 발언을 할지 모른다는 짐작기사들이 여기저기 났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저기 실린 예상기사들을 읽고 공감을 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정태수는 말했다. “모른다. 기억에 없다. 생각이 안 난다. 재판중이라 말할 수 없다.” 거의 이 네가지로 답변을 일관해왔다. 우리는 놀림을 당하고 말았다. 품위가 없는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배 째!”였다. 예상기사를 쓴 사람들은 몰랐을까? 배 째!의 논리를?

 

정태수가 네가지로만 대답한 이유

 

이런 유머가 시중에 있다. 정태수는 모든 질문에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 재판중이라 대답할 수 없다”고 네가지로만 대답했다. 그 이유는?

대답은 간단하다. 왜냐면 우리는 아주 어릴적부터 사지선다형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란다. 뭐든지 물어보면 네개 중 한개가 해답이었다는 거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교육은 6지선다형 8지선다형 12지선다형으로 서서히 바뀌어야 된다는 거다.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사람들 중에는 상식적인 사람들의 생각으로 누가 봐도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하는 대목들이 수십차례 나온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특위의원들이 아무리 호통치고 달래고 얼러도 시종 거짓말을 해댄다. 특위의원들은 “국민을 대변해서 묻고 있다, 국민들이 다 보고 있다”면서 국민들을 들먹이는데 정말 국민들을 대변하는 의원들이라면 그렇게 말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는 한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한 사람은 살짝 걸어나가 ‘거짓말하지 마!’하고 따귀를 한대 때리는 것이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요?” 이렇게도 덧붙인다. “물론 조사하는 의원들도 따귀 맞을 사람 많지요.”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증인신문을 하는 도중에 증인의 입에서 뭔가 나올 것 같을 때 신문시간이 끝나는 것이다. 다음 의원이 그 대답을 이어받아서 질문을 계속해야 할 것 같은데 의원이 바뀌면 처음부터 직책을 묻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가 조사해온 것만 할당된 시간에 읽어나간다. 증인들의 대답도 답답하지만 물어보는 사람들도 답답하다.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중에 ‘찬스 제도’라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다. 시간이 초과가 되면 찬스제도를 사용하여 마지막 질문을 마무리짓고 끝내는 제도가 도입이 된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또하나.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신문이 끝나면 보충신문에 대해 최소한 같은 당 의원끼리는 상의할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저 증인이 이렇게 대답하는데 이런 문제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물어보는 게 어떨까?”하는 회의를 하고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보충질문 시간을 잘 활용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회의가 끝난 뒤 같은 당의 대표주자가 보충질문을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없으니 대답을 간단히 하라는 대목도 많이 나오는데 증인을 왜 나오라고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렇다면 증인을 세워놓고 그의 죄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려가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하고 소리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유머가 없어도 웃기는 청문회

 

청문회엔 물어보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유머가 없다. 유머가 없는데도 웃기는 것은 왜일까.

어쩌구저쩌구 하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증인들을 보면서 한가지 떠오른 생각이 있다.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에서 차력사가 나와서 불방망이를 입에 집어넣는다거나 이빨로 자동차를 끌 적에 사회자가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막으로 나오기도 한다. “어린이는 따라하지 마세요!” 바로 그거다. 우리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청문회 방송중에는 “아이들은 따라하지 마세요” 하는 자막이 꼭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잘 몰라요, 기억이 없어요” 하는 것만으로도 몇조원을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아이들에게 심어줄 수 있을 지도 모르니….

개그맨은 공개방송에서 스타가 나온다. 스튜디오 녹화나 야외촬영에서는 스타가 나온 예가 없다. 스튜디오 녹화나 야외촬영은 편집이라는 후반 작업으로 타의에 의하여 스타가 만들어지지만 공개방송은 어떤 돌발상황에서도 순발력있게 잘 이끌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본인의 능력에 따라 스타가 만들어진다. 청문회 생방송을 바라보면서 많은 스타가 태어나기를 바랐다. 많은 스타가 생겨난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신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원들이 스타가 됐는지 증인들이 도리어 스타가 되었는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청문회의 스타는 당연히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이어야 하지 않는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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