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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만 올인한 여수, 바닥부터 흔들

여수산단 공장 가동 줄고 일자리 급감… 정부 “NCC 25% 감축해야”
등록 2025-09-25 21:52 수정 2025-10-02 17:14
2025년 7월14일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의 야경. 공장들의 불빛은 화려하지만, 불빛이 언제까지고 꺼지지 않을 수 있을까.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2025년 7월14일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의 야경. 공장들의 불빛은 화려하지만, 불빛이 언제까지고 꺼지지 않을 수 있을까.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답답해요. 산업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해 자금을 저리로 빌려준들 목숨만 연장하는 것이어서 큰 의미가 없어요.”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여수산단)에서 30년째 플랜트 제조 관련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ㄱ(60)씨는 2025년 9월1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2024년부터 석유화학 업계 대기업에서 시작된 위기가 이젠 협력업체들까지 미치면서 다들 실의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이 수년 전부터 석유화학에 어마어마하게 투자했고, 중동 국가들도 석유화학 제품을 만들어 팔겠다고 나선 지 오래”라며 “자동차와 조선업 기반이 있는 울산은 그래도 분위기가 좋은데, 석유화학에만 ‘올인’한 여수는 지역경제가 바닥부터 휘청거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기업 발주액 44% 줄어 지역경제 침체

국내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 산업단지인 여수산단이 위기에 봉착했다. 1979년 가동을 시작한 뒤 국내 석유화학 제품 생산량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던 여수산단은 최근 대기업들이 잇따라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2024년 엘지화학과 롯데케미칼에 이어 2025년 8월8일 여천엔씨씨(NCC)가 3공장 가동을 임시 중단했다. 여수산단에 국내 최대 에틸렌 생산설비를 갖춘 여천엔씨씨는 과거 1조원대 영업이익을 냈던 곳이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들에게 ‘연봉킹’으로 꼽히던 직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2022년부터 3년간 적자가 누적됐고, 지난 1분기에만 498억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전남도 쪽은 “영업 부진에 따라 임시 가동 중단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동을 언제 재개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중국발 공급과잉이 여수산단 위기의 직격탄이 됐다. 한국은 2021년 기준 연간 1270만t의 에틸렌을 생산해 규모로는 세계 4위 국가다. 그런데 중국은 2021년 화학산업 자립화를 위해 대규모 투자에 나서 에틸렌 생산 능력이 2019년 2711만t에서 2023년 5174만t으로 4년 만에 두 배 늘었다. 2017년 한국 화학제품 수출의 46%가 중국을 향했지만, 2023년에는 36%로 줄었다. 최준열 여수상의 사무국장은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로 수출이 뚝 끊겼고, 원가 경쟁력을 앞세운 중동도 경쟁자”라며 “여수산단은 에틸렌 등 범용 제품 중심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나 대산(충남 서산), 울산보다 더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수산단 불황은 지역경제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대기업 발주액은 2022년 2조145억원에서 2024년 1조1195억원으로 44.4%나 줄었다. 대기업 발주액이 줄면 협력업체 매출 감소와 노동자 계약해지(해고)로 이어진다. 여수산단 입주업체는 316곳(대기업 25곳)이며, 여수산단의 가동률은 2021년 96%에서 2025년 1월 77.6%로 18.4%포인트 감소했다. 여수시의 2025년 법인소득세는 67% 이상, 지방소득세도 49% 감소했다.

2025년 8월14일 여수국가산업단지 안 여천엔씨씨 3공장 앞은 임시 가동 중단으로 한산했다. 정대하 기자

2025년 8월14일 여수국가산업단지 안 여천엔씨씨 3공장 앞은 임시 가동 중단으로 한산했다. 정대하 기자


건설노조 여수지부 “하청노동자·일용직부터 해고”

일자리도 사라지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자료를 보면, 2025년 2분기 기준 여수산단 내 석유화학기업 140여 곳에 고용된 인력 규모는 1만6770여 명으로, 2024년 같은 기간에 견줘 30% 감소(5070여 명)했다. 최규연 한국산업단지공단 전남지역본부 혁신기획팀 팀장은 “대기업 공장에서 정기 보수 등 발주량을 줄이면서 협력사들이 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25년 6월 기준 여수플랜트 건설노조 조합원은 3900여 명으로 외환위기 이후 최대치인 5508명이 감소했다. 장창환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여수지부 사무국장은 “여수산단 대기업 직원들은 아직 문제가 없다. 하청 노동자들과 일용직이 해고 1순위”라며 “일부는 울산 등 타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일부 조합원은 ‘퀵’이나 대리운전을 하며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대안을 찾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석유화학 업계가 공동 생존을 도모하려면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 능력을 최대 25% 감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각 기업이 강력한 자구 노력이 담긴 사업 재편안을 우선 마련해야만 금융, 규제완화 등의 내용이 담긴 지원을 해줄 수 있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이에 10개 석유화학 기업 관계자들은 2025년 8월20일 총 270만~370만t 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을 감축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현재 국내 전체 나프타분해시설 생산능력 1470만t의 18~25%에 해당하는 규모다. 정재경 여수시 화학소재산업팀장은 “업체에서 2025년 10월 말까지는 자구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후 정부가 기금 조성으로 업체에 지원해, 숨통을 틔워야 한다”고 말했다.

2025년 9월17일 국회에서 열린 ‘석유화학산업위기, 여수국가산단 및 지역경제 회생을 위한 토론회’에서 최홍준 한국화학산업협회 대외협력본부장은 “중국 등 경쟁국이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을 왜곡하는 상황에서도, 정부가 사업재편 및 원가구조 개선을 지원한다면 경쟁국과 경쟁할 수 있다”며 “석유화학산업에 대한 적절한 지원이 늦어질 경우 전방산업(최종소비자에게 직접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과 민간 실물경제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25년 8월14일 전남 여수시 무선지구 가게에 임대 광고판이 붙어 있다. 무선지구는 여수국가산업단지과 가까워 여수산단 노동자들이 자주 찾는 식당이 많다. 하지만 여수산단 경기 악화로 가게 곳곳에 ‘개인 사정으로 영업을 중단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정대하 기자

2025년 8월14일 전남 여수시 무선지구 가게에 임대 광고판이 붙어 있다. 무선지구는 여수국가산업단지과 가까워 여수산단 노동자들이 자주 찾는 식당이 많다. 하지만 여수산단 경기 악화로 가게 곳곳에 ‘개인 사정으로 영업을 중단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정대하 기자


재정 지원, 연구개발 촉진 등 특별법 절실

주철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당장의 고통을 덜어줄 임시방편을 넘어, 위기 극복을 위한 근본 대책이 시급하다. 특별법 제정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주 의원이 발의해 2025년 6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회부된 특별법에는 사업재편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 방안과 전기요금 감면 및 보조, 석유화학 핵심 전략기술의 연구개발을 촉진하는 시책 수립·시행 등과 관련된 규정이 담겼다. 여수산단의 한 협력업체 대표 ㄴ씨는 “중국에서 따라올 수 없는 석유화학 소재나 자동차 내장재, 항공기 특수 석유화학 제품은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고용 전환도 향후 중요한 과제다. 주무현 지역산업경제연구원장은 토론회에서 “공정전환 특별지역으로 지정해 사업구조 재편 과정에서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재배치하고, 취업 알선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성호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광주전남지부장은 한겨레에 “코로나19 때도 호황이었던 여수산단 대기업들이 범용 제품 위주로 ‘캐파’(생산능력)만 키우다가 가격경쟁력을 잃었다”며 “납득할 만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회사가 어렵다며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여수=정대하 한겨레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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