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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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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광받던 정치 팬덤, 어쩌다 훌리건 됐나

우리 안의 극우 9 누가 극우인가⑧
성찰 없는 열정 탓 부정적 영향 갈수록 커져… 설령 불가피한 경로라 해도 대처법 찾아야
등록 2025-09-19 15:20 수정 2025-09-23 08:16
2002년 9월30일 서울 여의도 새천년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대통령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와 함께 ‘희망의 돼지저금통 전달식’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02년 9월30일 서울 여의도 새천년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대통령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와 함께 ‘희망의 돼지저금통 전달식’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년 전에는 대다수 언론과 지식인이 입을 모아 인터넷을 예찬했다. 팬덤 정치 역시 비슷하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유명해진 2002년 무렵, 정치 팬덤은 계파 갈등과 지역주의로 얼룩진 한국 정치를 혁신할 새로운 바람으로 각광받았다. 그것은 시민 참여의 새로운 모델로서 엘리트 부패와 담합, 정치적 무관심 및 탈정치화 같은 현대 정치의 ‘만성질환’에 거의 완벽한 대안처럼 치켜세워졌다.

오늘 돌아보면 그러한 시선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과거의 논의들에서 시민의 정치 참여는 긍정적인 것이므로 팬덤 정치도 당연히 긍정적이라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면, 현재의 논의 지형은 그보다 훨씬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이다. 요컨대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정치 팬덤은 항상 옳은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굳이 20년 전 상황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논의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만 동시대적 특성을 적확히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사모’, 그 낙관론의 추억

정치학자 조재욱·강진욱·김연주는 “팬덤 정치가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된 이후 지금까지 일련의 상황을 보면 팬덤을 통제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팬덤에게 끌려다니거나 기대는 정치인이 대다수”라고 비판한다.1 정치학자 송경재는 “팬덤 정치의 확장이 과잉참여(over-participation)를 부추겨 민주주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편가르기 형태의 집단주의 문화 확산, 다원주의 훼손, 소수의 과대대표 등 민주주의의 퇴행 문제가 발생하는 점을 강조한다.2

팬덤 연구의 본산인 미디어·문화연구 분야에서도 변화는 감지된다. 커뮤니케이션학자 리베카 윌리엄스와 루시 베넷은 2005년 이후 팬덤 연구 성과를 결산하는 특별기획 논문집에서 디지털 및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발전이 팬들의 소통 방식, 창작 활동, 시민 참여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밝힌다.3 이에 따라 연구 경향도 바뀌어왔다. 기존 팬덤 연구가 ‘긍정적 애착’이나 ‘팬덤의 순기능 발견’에 머물렀다면, 이제 부정적이고 유해한 팬덤의 실제 사례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티팬덤’(anti-fandom)4이나 ‘독성 팬덤’(toxic fandom)5 같은 개념이 대표적이다.

정치철학자 제이슨 브레넌은 저서 ‘민주주의에 반대한다’에서 유권자를 세 유형으로 분류한다. ‘호빗’ ‘훌리건’ ‘벌컨’이 그것이다. ‘호빗’은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종족의 이름을 빌려온 것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며 정치에 대한 지식도 적은 유권자다. ‘훌리건’은 광적인 정치 팬으로 열정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만 세상을 우리 편과 적으로 보며 자기 신념에 맞는 지식만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외면하는 유권자다. ‘벌컨’은 미국의 에스에프(SF) 픽션 ‘스타트렉’에 나오는 외계 종족 이름을 빌려온 것으로 이들은 정치에 관심과 지식이 충분하며 이성적·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유권자다.

유권자 3유형… 호빗, 훌리건, 벌컨

많은 민주주의 이론이 유권자를 이상적 유권자, 곧 ‘벌컨’으로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브레넌에 따르면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현실의 유권자는 대체로 ‘호빗과 훌리건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브레넌은 여기서 민주주의의 구조적 결함을 본다. 무지하고 편견에 가득 찬 유권자가 너무나 많은 반면, 이성적 유권자는 극히 드물다. 이 때문에 다수 유권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나쁜 정치인이 거대한 권력을 쥐게 되고, 이에 따라 공동체 성원 모두가 위험에 처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좀더 많은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면 개선되지 않을까? 브레넌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정치 참여는 ‘호빗’을 ‘훌리건’으로 바꾸고 ‘훌리건’을 ‘더 나쁜 훌리건’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6

어떻게 해야 할까? 브레넌의 대안은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 ‘지식인 통치’다. 즉, 정치적 역량에 따라 투표권을 다시 배분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충분한 지식을 갖춘 이들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거나 아니면 기본 투표권에 더해 추가 투표권을 주는 방식이다. 브레넌에 따르면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지도자를 뽑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어서, 투표권을 “운전하는 권리나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브레넌의 주장은 확실히 상식과 직관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주장이 현대 국가에서 당장 수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브레넌의 제안대로 시험 등을 통해 투표권자를 선발한다고 치자. 그 시험은 무지한 ‘호빗’을 걸러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식하되 극단적 편견을 가진, 그러나 전략적으로 편견을 숨기는 ‘훌리건’을 판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브레넌의 논의는 팬덤 정치와 관련해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유권자의 참여, 특히 ‘훌리건’의 열정적 참여는 그 자체로 더 나은 정치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나쁜 정치를 가져올 가능성을 키운다는 점이다.

‘훌리건 정치’ 예찬론자들의 오류
2023년 3월3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더불어수박깨기운동본부가 비이재명계 의원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수박’은 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라는 뜻의 비칭이다. 연합뉴스

2023년 3월3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더불어수박깨기운동본부가 비이재명계 의원들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수박’은 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라는 뜻의 비칭이다. 연합뉴스


놀랍게도 브레넌의 유권자 분류법(호빗·훌리건·벌컨)을 가지고 ‘훌리건 정치’를 옹호하는 주장이 있다. 2017년 철학자 최성호는 한 기고문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 팬을 가리키는 ‘문빠’를 브레넌의 ‘훌리건’과 등치시킨다. 브레넌의 논의에서 ‘광적인 정치 팬’이라는 ‘훌리건’의 의미는 당연히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최성호는 ‘문빠’가 ‘훌리건’이긴 하지만 매우 바람직한 집단, 다시 말해 “성숙한 민주시민”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 정치인에 대하여 무심하고 불편부당한 제삼자적 방관자의 관점을 취하기 힘들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 그들은 훌리건임에 분명하지만, 그들이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이고, 그런 한에서 성숙한 민주시민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7

최성호에게 ‘문빠=훌리건’의 관점은 “자식을 보살피는 부모의 관점”이다. ‘문빠=훌리건’은 “그의 행불행을 나의 행불행과 등치시키며 그가 성공할 때 함께 기뻐하고 그가 실패할 때 함께 눈물 흘린다”. “누군가 타인이 자식에게 혹독한 비판을 가할 것 같으면 설혹 그 비판이 지극히 정당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자식을 두둔하고 나서는” 것처럼, ‘문빠’들은 “부모의 마음”으로 문재인 정부 편을 든다는 것이다. 그에 상반되는 관점은 “무심하고 냉정한 삼인칭적 관찰자 혹은 방관자의 시선”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를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이 곧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응원하는 것’이라는 등식부터가 오류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및 정의’와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빠’가 “성숙한 민주시민”이라는 명제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문빠’들의 주관적 믿음이다. 공교롭게도 유사한 주장을 하는 철학자가 또 있다. 철학자 박구용은 이렇게 말한다.

“박빠에게 박근혜는 공주이자 왕비이며 왕이었고, 여전히 자신들의 주인이며 주체다. 노사모에게 노무현은 슬픈 사랑의 연인이면서, 자신들을 묶어주는 사랑의 끈이다. 문빠, 혹은 문파에게 문재인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자발적 소통과 연대의 끈이다. 이 차이를 모르는 사람은 민주주의를 모르는 사람이다. 이 차이를 무시하는 사람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사람이다.”8

훌리건, 불가피한 게 바람직한 건가

박구용의 글은 신앙인의 교리문답이다. 규정과 단죄만 있고 논증이 없다. 노무현과 문재인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이 곧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의심해선 안 된다. 의심하는 순간, 즉 논리와 과학을 들이대는 순간 그는 예수를 배신한 유다가 되어 단죄당한다. 최성호와 박구용 모두에게서 열정은 상찬될 뿐 성찰되지 못한다.(최성호와 박구용에 대한 비판은 다음을 참고하라; 박권일, ‘정치 팬덤이라는 증상: ‘문빠에 대한 철학적 변론’ 비판을 중심으로’, 자음과모음 가을호, pp189~200, 2018 / 박권일, ‘문재인 정부는 어디로 가고 있나’, 황해문화 봄호, pp39~56, 2020)

그러나 앞서 브레넌도 지적했듯이,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건 바로 이런 ‘성찰 없는 열정’이다.

한편, 최성호는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의 논의를 가져와 “정치와 마찬가지로 과학도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훌리건의 세상”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에 애착을 갖는 일인칭적·행위자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훌리건이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논의를 끌어간다. 그러나 ‘훌리건이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명제와, ‘훌리건이 옳고 바람직하다’는 명제는 전혀 별개 차원이다. ‘훌리건’이 불가피하다고 해서 ‘훌리건’이 옳은 것이 되거나 바람직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오류와 비약으로 점철된 논변에도 생각해볼 부분은 있다. 정치 팬덤이 ‘옳고 바람직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훌리건’은 ‘지향할 수 없지만 제거할 수도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훌리건’에 편승하는 직업정치인까지 포함하면, 개별 팬덤만이 아니라 팬덤 정치라는 현상 전체가 ‘지향할 수 없지만 제거될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이렇듯 팬덤 정치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하다면, 혹은 필연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1. 조재욱·강진욱·김연주, ‘팬덤 정치의 민주주의 기제 가능성 검토’, 대한정치학회보 32(3). pp114~117, 2024

2. 송경재, ‘디지털 시민 정치참여의 강화와 과잉의 딜레마 정치 팬클럽을 중심으로’, ‘한국과 국제사회’ 7(3). pp191~217, 2023

3. Williams, R., Bennett, L., ‘Editorial: Fandom and Controversy’, American Behavioral Scientist. 66(8). pp1035~1043, 2021

4. Gray J., ‘New audiences, new textualities: Anti-fans and non-fans’, International Journal of Cultural Studies 6(1), pp64~81, 2003

5. Proctor, W., & Kies, B., ‘Editors’ introduction: On toxic fan practices and the new culture wars’, Participations 15(1), pp127~142, 2018

6. 제이슨 브레넌, 홍권희 옮김, ‘민주주의에 반대한다’, 아라크네. pp42~43, 2023

7. 최성호, ‘노무현의 죽음과 비판적 지지의 신화: 문빠에 대한 철학적 변론’, 오마이뉴스, 2017년 9월18일

8. 박구용,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 메디치미디어, p64, 2018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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