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10일 북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80주년 경축 열병식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김 위원장 왼쪽이 리창 중국 총리, 오른쪽은 또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겸 통합러시아당 당대표다. 연합뉴스
“이 나라를 더욱 풍요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회주의 낙원으로 일떠세울 것입니다.”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은 2025년 10월9일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80돌 경축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금과 같은 기세로 몇 해 동안 잘 투쟁하면 우리 손으로 우리 생활을 눈에 띄게 개변할 수 있고 우리가 이상하는 목표에 보다 가깝게 가닿을 수 있다”며 “인민의 믿음에 충실하기 위해 더 열심히 분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의 통치이념 격인 ‘인민대중 제일주의’를 새삼 강조한 셈이다.
폭우 속 한밤 열병식(10월10일)으로 절정을 이룬 북한의 당 창건 80주년 기념행사는 북쪽의 ‘자신감’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9월3일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80돌’ 기념행사(제1580호 참조)에 이어 북-중-러 3각 연대를 각인시킨 계기란 평가도 나왔다. 북쪽이 다자외교 무대에 복귀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고, 핵·재래식 무기의 위용도 거침없이 뽐냈다. 몇 가지 따져볼 대목이 있다.
“본 조약은 수정 또는 폐기할 데 대한 쌍방 간의 합의가 없는 이상 계속 효력을 가진다.” 1961년 7월11일 체결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 우호, 협력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북-중 조약) 제7조는 이렇게 규정한다. 조약 수정 또는 폐기의 전제로 ‘합의’를 내세운 것은, 양쪽 모두 조약을 수정 또는 폐기할 뜻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2024년 6월19일 체결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 사이의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북-러 조약)은 차이가 있다. 북-러를 ‘혈맹’의 반열에 올렸다는 평가와 달리, 조약 제23조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이 조약의 효력을 중지하려는 경우 이에 대해 타방에게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조약의 효력은 타방이 서면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1년 후에 중지된다”고 규정한다. 어느 한쪽의 마음이 바뀌면, 그것으로 끝이란 뜻이다. 북-중, 북-러 관계의 본질적 차이다. 이번엔 어땠을까?
중국은 북의 당 창건 기념행사에 통상 부주석급을 대표로 보낸다. 대체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7명)의 말석이다. 이번엔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권력 서열 2위인 리창 국무원 총리를 보냈다. 러시아도 ‘2인자’를 보냈다. 연임 제한 규정에 묶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대신해 대통령(2008~2012년)까지 지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다. 다만 그는 이번에 집권여당인 통합러시아당 당대표 자격으로 방북했다. 리창 총리는 ‘공식 친선방문’이었지만, 메드베데프 대표는 단순 ‘축하방문’ 형식인 것도 다르다. 북쪽의 대접은 어땠을까?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종합하면, 김정은 위원장은 10월9일 리창 총리를 접견해 “친선적인 담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동지’로 표현하고 “관록 있는 예술단을 파견해줌으로써 우리 당 창건 80돌을 더욱 뜻깊고 화기롭게 해준 데 대해 충심으로 되는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 리 총리의 방북을 “변함없는 지지와 각별한 우의의 정, 전통적인 조-중 친선 협조 관계를 중시하고, 가일층 강화 발전시켜나가려는 중국 당과 정부, 인민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라고 평가했다.
2025년 10월10일 북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80주년 경축 열병식에 참가한 주민들이 첨단무기가 등장하자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메드베데프 대표 접견은 10월10일 이뤄졌다. 조선중앙통신은 “동지적이며 친선적인 담화”였다고 전했다. 리 총리 접견 때와 달리 ‘동지적’이란 수식이 추가됐다. 시 주석을 단순 ‘동지’로 표현했던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에 대해선 ‘가장 친근한 동지’ ‘존경하는 동지’라고 표현했다. 메드베데프 대표의 방북을 두고는 “새로운 높이에 올라선 조-러 관계를 강력하고 전면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동맹관계로 더욱 활력 있게 확대 발전시켜나가는 데서 의의 깊은 계기로 될 것”이라며 “쌍무관계 발전에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마련하는 데서 집권당들(노동당-통합러시아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리 총리 때와 달리 김 위원장은 메드베데프 대표와 접견 뒤 오찬도 함께 했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더 있다. 리 총리 접견 때 ‘관록 있는 예술단’ 파견에 사의를 표했던 김 위원장은 정작 10월9일 평양 대동강 구역 문수거리에 자리한 동평양대극장(1500석 규모)에서 열린 중국 예술단 공연은 관람하지 않았다. 주창일 당 선전선동부장과 승정규 문화상을 대신 보냈다. 반면 같은 날 평양 중구역 서문거리에 자리한 만수대예술극장(4천 석 규모)에서 열린 러시아 예술단의 경축 공연엔 꽃바구니를 들고 직접 방문했고, 공연 뒤 무대에 올라 “훌륭한 공연”이라며 사의까지 표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짚었다.
“작금의 상황을 반영한 ‘차별 대우’로 보인다.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다. 북한의 대외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높지만, 최근 식량과 비료 등 교역량에서 중국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다. 대중국 교역량이 줄어들면 벌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러시아다. 북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2025년 7월 펴낸 ‘2024 북한 대외무역동향’ 보고서를 보면, 북한 대외무역(수출입 총액 26억9611만달러)의 98%를 중국이 차지했다. 전년 대비 0.3%포인트 낮아진 수치다. 10위권 교역 상대국엔 베트남(3위)과 인도(6위), 인도네시아(8위) 등이 눈에 띈다. 베트남에선 이번 경축 행사에 두 달 전 한국을 국빈 방문했던 최고지도자 또럼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장이 직접 참석했다. 인도네시아에선 수기오노 외교장관을 파견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형제국’, 인도네시아는 ‘비동맹운동’의 산실 격이다. 북의 당 창건 80돌 행사는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에 이어 김 위원장이 향후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 때처럼 ‘제3세계’를 중심으로 한 다자외교에 적극 나설 것임을 알리는 무대였다.
열병식에서 등장시킨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은 고체연료 엔진을 장착한 다탄두 미사일이다. 고체연료를 쓰면 액체연료에 견줘 발사 준비 시간을 크게 앞당길 수 있다. 다탄두 미사일은 이른바 ‘디코이’(미끼용 가짜 탄두)를 활용해 요격이 어렵다. 여기에 북이 8차 당대회(2021년 1월) 때 공언한 핵추진 잠수함 개발까지 성공한다면 ‘게임 체인저’가 되리란 평가가 나온다. 핵잠수함은 ‘보복타격’(세컨드 스트라이크) 능력을 상징한다. 보복타격 능력을 갖춘 상대에겐 선제타격을 가할 수 없다. 해법은 ‘대화’뿐이다. 이번 열병식에서 북은 그간 5차례 시험발사에 나섰던 ‘북극성’ 계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공개하지 않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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