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를 바꾸는 사업, 갈등과 대화로 시작된다
재개발·재건축은 단순한 부동산 개발사업이 아닙니다. 낡은 주거 환경을 바꾸고, 도시 구조를 재편하는 공공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가진 거대한 프로젝트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도시를 바꾸는 일은 항상 ‘갈등’에서 출발합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소유자들의 생각이 다르고, 권한과 이익이 얽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사업방식이 다양해지고 선택지가 넓어지면서 갈등의 양상도 더 복잡해졌습니다. 조합방식, 신탁방식, 공공방식 등 각각의 추진 구조가 다르고, 이해당사자들의 기대도 다르기 때문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갈등이 생기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갈등 속에서 타협안을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유지·추진할 것인가입니다.
2. 사업방식의 세 갈래 – 조합, 신탁, 공공
① 조합방식: 주민 주도의 민주적 구조
가장 전통적인 방식은 조합방식입니다. 토지등소유자들이 스스로 조합을 설립하고 사업을 추진하는 구조죠. 참여성과 민주성이 높고, 조합이 모든 권한을 직접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민 주도형’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속도입니다. 사업 규모가 커지고 이해관계가 복잡해질수록 의사결정이 지연되기 쉽습니다. 조합 내부의 세력 다툼, 정보 비대칭, 불투명한 자금 운용 등으로 인해 갈등이 커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조합방식에서 가장 흔한 갈등 원인은 “누가 결정권을 쥐고 있느냐”와 “그 결정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느냐”입니다.
② 신탁방식: 전문성과 속도의 장점
신탁방식은 신탁회사가 사업시행자로 지정돼 자금 조달, 사업 관리, 분양, 정산까지 맡는 구조입니다. 금융회사 특유의 자금 운용 능력과 프로젝트 관리 역량을 활용할 수 있고, 복잡한 이해관계도 한 단계 정리돼 속도가 빠릅니다. 특히 대규모 재건축이나 의견이 쉽게 모이지 않는 사업장에서 ‘갈등 조정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신탁보수 구조나 의사결정 권한, 비용 산정 기준 등이 불투명하면 주민 입장에서는 “모든 걸 신탁이 알아서 한다”는 불안감이 생기고, 자칫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③ 공공방식: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
LH나 SH 등 공공기관이 시행자로 참여하는 방식은 속도와 안정성에서 강점을 보입니다. 다만 재산권에 대한 개입이 크고 수익성에서 한계가 있어 민간 선호도는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이 세가지 외에 조합과 건설사, 조합과 신탁, 조합과 공공이 같이 시행하는 '공동시행 방식'도 존재하죠.
3. 갈등의 본질 – 권한, 이익, 절차
재개발·재건축에서 갈등이 생기는 구조는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권한과 통제: 조합장이나 주민대표, 이사나 빅마우스 등 주민들 가운데 '입김'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의 문제가 항상 생깁니다. 이는 조합은 당연하게 신탁에서도 흔히 보이는 양상입니다. 여기에 시공사와 정비업체, 설계업체 등 업체들의 영향력과 이해관계도 작용하죠.
이익배분: 공사비, 분담금, 일반분양 비율, 수수료 산정 방식 등 이익의 배분 구조가 투명하지 않으면 불신이 쌓입니다.
절차의 투명성: 시공사 선정, 설계 변경, 비용 증액 절차가 불명확하면 ‘밀실 결정’ 의혹이 커집니다.
결국 갈등의 본질은 방식 자체보다 거버넌스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제도의 진화 – ‘공개모집’과 ‘전자총회’
제도도 갈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와 부산시는 공공에서 예산 및 전문인력을 지원하고, 정보 관리와 공개를 통해 부정 비리를 감시할 수 있는 '공공지원자제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원이 아니라 규제라는 오명도 많았던 제도인데, 최근엔 지원과 감시의 균형이 잡혀가는 모양새입니다.
신탁방식도 좀 더 선정절차를 까다롭게 만들어서 투명성을 강화했습니다. 2024년 12월 개정(2025년 5월부터 시행)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르면, 앞으로는 신탁방식 지정개발을 추진할 때 반드시 공개모집과 주민설명회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추진방식별 장단점을 모두 설명하고, 주민 동의를 받은 뒤 신탁사를 공개모집해야 하죠. 이때 최소 30% 동의를 모아야 하고, 구청의 확인도 필요합니다.
또한 전자총회와 전자의결 제도가 도입되면서 대규모 단지도 보다 효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도적으로 ‘초기 공감대’를 만들고 ‘절차를 투명화’하는 장치가 강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5. 갈등의 산물, 타협안 – 그리고 그 유지 구조
재개발·재건축에서 갈등이 가장 첨예할 때 등장하는 것이 ‘타협안’입니다. 공사비 부담 기준, 일반분양 비율, 사업 일정 조정, 시공사 선정 조건 등이 그 예입니다. 문제는 이 타협안이 시간이 지나도 유지될 수 있느냐입니다. 여기서 조합과 신탁은 구조적으로 큰 차이를 보입니다.
① 조합: 민주적이지만 뒤집히기 쉽다
조합은 총회 의결 구조를 통해 타협안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쉽게 변경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관 변경 요건을 보면 조합원 3분의 2 이상 출석에 출석 조합원의 과반수 찬성만 있으면 됩니다. 전체 조합원의 약 33% 정도만 찬성해도 정관이 바뀌는 셈이죠.
실제 현장에서는 이렇게 어렵게 만든 타협안이 다음 총회에서 새로운 세력의 손에 의해 손쉽게 뒤집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타협안이 정관이 아닌 ‘업무규정’이나 ‘결의안’ 수준이라면, 표결 한 번으로 무력화되기도 합니다. 조합의 민주성이 오히려 타협 유지력에는 약점이 되는 셈입니다.
② 신탁: 계약 구조가 타협을 지킨다
반면 신탁방식은 사업의 뼈대가 조합 정관이 아니라 업무협약(MOU)·신탁계약입니다. 이 계약에는 사업 구조, 분담금 산정, 공사비 조정, 수수료 기준, 주민 참여 절차까지 명문화돼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계약 변경이 총회 의결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계약은 법률행위이기 때문에 계약 당사자 간 서면 합의가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토지등소유자 재동의를 다시 받아야 합니다. 일부 조항은 양측 모두의 합의 없이는 변경할 수 없도록 설계돼 있죠.
즉, 단순히 주민 여론이 바뀌거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해서 타협안이 깨지지 않습니다. 실제 계약서에는 “당사자 합의” 또는 “의무 위반 후 3주 이내 시정 불이행” 등의 명확한 해지 요건이 규정돼 있어, 타협을 유지하는 구조가 훨씬 더 탄탄합니다.
6. 갈등 이후 유지력 비교 – 숫자로 보는 차이
이 표가 말해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주민 갈등 속에서 어렵게 도출한 타협안일수록, 조합보다 신탁에서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조합에서는 다수결 구조 때문에 정치적 역학이 바뀌면 언제든지 재논의가 가능하지만, 신탁에서는 계약 구조가 방어막이 됩니다.
7. 타협안을 더 단단히 만드는 조건들
타협안의 유지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장치들을 계약 또는 정관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전의결 조항: 공사비 증액, 분양가 전략, 수수료 변경 등 핵심 결정사항은 반드시 사전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합니다.
보수 산식·상한 명시: 신탁보수나 용역비 산정 기준을 계약서에 산식과 상한 형태로 명확히 기재합니다.
정보공개·열람권: 계약서, 비용명세서, 의결 자료를 주민이 언제든 열람할 수 있도록 보장합니다.
분쟁조정 절차: 내부조정 → 외부조정 → 중재 순으로 단계를 명문화하고 기한을 명시합니다.
재협상 트리거: 금리 급등, 분양가 하락 등 사업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발생하면 자동으로 협상 절차를 개시하도록 규정합니다.
이런 조항들이 들어가면 타협안은 ‘합의문서’ 수준이 아니라 ‘계약 조항’이 되고, 법적 구속력이 생기면서 훨씬 견고해집니다.
8. 타협 유지의 실무 전략 – 견고함과 유연성의 균형
물론 계약이 너무 단단하면 사업이 시장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렇다고 느슨하면 언제든지 뒤집힙니다. 중요한 건 견고함과 유연성 사이의 균형입니다.
예를 들어 신탁 계약에 “중요 사항 변경 시 토지등소유자 전체회의 의결 필요” 조항을 넣으면 계약 변경의 민주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조합 정관에 “경제성 급변 등 예외 상황에서는 간소화 절차를 적용한다”는 단서 조항을 넣으면 시장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죠.
현장과 학계에서 나온 이와 관련해 나온 여러 방안들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핵심 의결 사전승인제(Pre-Approval Matrix)
시공사·설계자 선정, 사업비 증액, 분양가 전략, 보수·수수료 변경은 ‘전체회의(또는 총회) 사전의결’ 원칙을 세우는 방법입니다. 위반 시 재의결·원상회복 절차를 의무화하는 구조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2) 수수료·보수의 ‘산식 + 상한’ 명문화
신탁보수는 매출·원가·성과연동 등을 조합해 '상한(캡)'을 두고, 증액 조건·절차(물가지수, 공사비 지수 등)를 특정합니다. 정부 표준계약서는 정액·상한액 방식도 허용해 남용을 예방하도록 안내합니다. 이러한 기법은 시공사와의 공사비 계약에서도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3) 업무범위·승인권 경계선
신탁의 집행 권한과 조합·전체회의의 승인 권한을 체크리스트로 분리. 예컨대 설계·시공사 선정은 전체회의에서, 집행계약·일상적 발주는 신탁·PM이 수행하는 구조입니다.
4) PM(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의견 제출권 + 재검토 권고권’
전문적인 인력을 보유한 PM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신탁을 견제, 보조하는 보완구조를 만드는 것이지요. PM이 공사비·설계 변경·분양 전략에 대해 서면의견 제출 권한을 갖고, 재검토 요구 시 신탁이 서면 통보하도록 절차화 해놓는 것입니다.
5) 자금·계정의 분리관리 + 외부감사
별도 계좌·월별 자금보고와 분기별 외부감사를 의무화해 투명성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신탁계정대여금(브릿지) 금리 산정 공식은 지표금리+가산금리로 고정하고 변동폭·상한을 규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6) 정보공개·열람권
계약서·비용명세·의결서류를 상시 열람하도록 하고, 법령상 자료공개 범위(시행령 제94조 등)를 정관에 재차 명시. 전자문서로 열람 로그를 남겨 분쟁시 입증력을 확보합니다.
7) 변경·증액의 ‘사전 보고 → 질의응답 → 의결’ 3단계
공사비·용역비가 일정 비율(예: 3~5%) 이상 변동 시 사전보고서 + 공개 질의응답(FAQ 게시) + 의결을 거치게 합니다.
8) 분쟁조정·중재의 단계별 캐스케이드
(1) 내부조정위원회 → (2) 외부분쟁조정기구(지자체·전문조정기관) → (3) 상설중재 합의(대한상사중재원) 순으로 기한·절차를 고정합니다.
9) 리스크 신호등(Trigger)과 ‘세이프티 브레이크’
분양성 악화·PF 실패·공사비 급등 등 사전 정의된 트리거 발생 시, 핵심조항 자동 재협상 개시·보수률·일정 리셋을 명문화합니다.
10) 정기 재검토 클라우즈(Sunset & Review)
6~12개월 주기로 수수료·일정·위험요인을 재검토. 미시행·지연 시 페널티/인센티브를 테이블에 올립니다.
9. 결론 – 사업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한다다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제도로만 성공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조합이든 신탁이든, 제도 자체는 죄가 없습니다. 그 제도를 누가, 어떻게 활용하고, 얼마나 투명하게 운영하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가릅니다.
특히 갈등 속에서 어렵게 도출한 타협안이라면, 그 합의를 지키는 구조를 얼마나 잘 만들어놓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다수결이라는 정치적 리스크에 노출될 것인지, 법률행위라는 계약의 틀 속에서 지켜질 것인지는 처음 설계에서 결정됩니다.
결국 도시를 바꾸는 힘은 ‘타협을 만드는 능력’과 ‘타협을 지키는 힘’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힘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구조가 무엇인지, 이제는 현명한 토지등소유자와 투자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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