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 출구-뫼비우스의 고리에서 탈출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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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 출구-뫼비우스의 고리에서 탈출하는 법

입력 2025.10.22 06:00

수정 2025.10.2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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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8번 출구인가. 8은 뫼비우스의 띠와 닮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고리에서 탈출하는 법은 끊는 것이다. 끊으면 나선이 된다. 지적으로 설계된 영화다.

㈜미디어캐슬

㈜미디어캐슬

제목: 8번 출구(The Exit 8)

제작연도: 2025

제작국: 일본

상영시간: 95분

장르: 스릴러, 공포

감독: 카와무라 겐키

출연: 니노미야 카즈나리, 고마츠 나나, 코치 야마토

개봉: 2025년 10월 22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수입: ㈜미디어캐슬

배급: NEW

원작 게임에 에셔(M.C. Escher)의 그림 포스터가 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리뷰를 쓰면서 유튜브에 올라온 게임플레이 영상을 확인해보니 역시 없다. 감독의 해석이다. 영화 속 지하철역 통로에 게시된 에셔 전시회 포스터 그림은 에셔의 그림 ‘뫼비우스의 띠 II(붉은 개미)’(1963년 작)다. 안쪽과 바깥쪽의 구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는 에셔의 여러 작품에 영감을 준 도형이다.

영화, 그리고 원작 게임의 배경이 된 8번 출구로 향하는 지하철 통로는 묘하게 처음과 끝이 연결돼 있다. ‘틀린 그림 찾기’처럼 미묘하게 변형이 일어나 있는데도-영화와 게임의 안내판에는 그것을 ‘이상 현상’이라고 지칭하고 있다-그냥 통과하면 8번 출구 번호는 0으로 바뀐다. 이상 현상을 감지하고 뒤돌아가면 똑같은 통로의 시작 지점이 다시 나오는데 숫자가 바뀌어 있다. 0에서 1로, 1에서 2로…. 그렇게 8번 성공하면 탈출할 수 있다. 게임에서는 그게 엔딩이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처음과 끝이 없는 미묘하게 뒤틀린 공간이 모사하는 게 딱 ‘뫼비우스의 띠’다. 왜 하필 8번 출구인가. 에셔의 그림처럼 8은 뫼비우스의 띠와 닮았다. 8번 출구로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장소의 맨 마지막에는 롯폰기(六本木)가 아닌 하치본기(八本木) 교차점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도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원작 게임에도 나오는 설정이다).

공포 게임에 더한 감독의 ‘해석’

영화가 시작되면 BGM으로 볼레로가 깔린다. 주인공이 아이팟으로 듣는 음악이다. 만원 지하철. 젊은 엄마가 안고 있는 아기가 뭐가 불편했는지 큰 소리로 울고 있다. 서 있던 남자가 “아이를 안고 출퇴근 시간에 전철을 타는 건 민폐야”라고 호통을 친다. 이 남자가 선을 훌쩍 넘었다는 것은 전철 칸에 탄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지만, 모두 외면한다. 젊은 엄마는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달래보지만 아이의 울음은 그칠 줄 모른다. 주인공도 다시 귀에 아이팟을 꽂고 볼레로 음악으로 아이가 우는 소리와 남자의 호통 같은 ‘소음’을 차단한다. ‘메이와쿠(迷惑·민폐)’를 극도로 혐오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있음 직한 풍경이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내린 남자는 시공간이 뒤틀린 이 기묘한 8번 출구의 통로에 갇힌다. 갇히기 전 남자는 헤어진 여자친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아이가 생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원작 게임엔 없는 캐릭터 서사 부여다.

영화는 크게 세 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장은 ‘헤매는 남자’, 즉 주인공 이야기다. 두 번째 장은 ‘걷는 남자’이고, 세 번째 장은 ‘소년’이다. 게임에서 초기화되면 끝없이 나타나 걷는 남자는 그냥 ‘아저씨’다. 걷는 남자 서사 부여 역시 이 작품에서 빛나는 부분이다. 주인공이 처음에 목격한 갓난아기를 안은 여성과 자신의 아이를 밴 헤어진 여자친구, 그리고 게임에는 등장하지 않는 세 번째 에피소드의 소년 이야기는 모두 이 영화의 서브플롯과 직결돼 있다. 다 이야기하면 재미없을 듯하니 영화관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백룸 공포를 스크린으로 옮기기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난제는 수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백룸 호러 또는 리미널 스페이스 공포물을 화면으로 옮겼는데, 등장인물에 서사를 부여한 탓인지 그리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뭔가 이상한 현상이 눈에 띄었다면 게임의 룰대로 그 즉시 뒤돌아보지 않고 뒤로 도망치는 게 맞다. 주인공과 나중에 동행하는 소년은 뭐가 이상한지 한참을 쳐다보고 있다가 악몽 같은 사건을 경험한다는 전개가 조금 걸린다. 일본 정극 코미디 영화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뭔가 툭툭 끊어지는 전개와 비슷하다고 할까. 일본 쪽 자료를 보니 감독도 그런 난감함을 느꼈는지 원작 게임엔 없는 주인공이 천식을 앓고 있다든가 하는 설정을 더해 공포감을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볼레로로 시작한 영화는 볼레로를 듣는 주인공 시점으로 마감한다. 수미쌍관이다. 처음으로 돌아와 아기를 안은 여성이 모욕당하는 만원 지하철에서 자신의 나약함에 눈물만 글썽거리고 있던 주인공이 뭔가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 영화는 끝난다. 시작도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고리에서 탈출하는 법은 끊는 것이다. 끊으면 나선이 된다. 지적으로 설계된 영화다.

일본 영화와 문화의 낯설면서도 묘한 익숙함

ⓒ정용인 기자

ⓒ정용인 기자

시사회가 열리던 날, 인쇄된 홍보 팸플릿을 받았다(사진). 얼마 만인가. 마지막으로 홍보팸플릿을 받은 것이 한 10년은 된 것 같다. 예전에는 기자나 배급 대상 시사회를 할 때 명함 등으로 신분 확인 후 표와 함께 인쇄된 20~30쪽 내외의 홍보 책자, 그리고 엽서 크기의 인쇄된 스틸사진을 받는 것이 ‘국룰’이었다. 스틸사진은 스캔해서 사용하라는 뜻이었으리라. 먼저 없어진 것이 스틸사진이다. 하긴, 지면 인쇄 작업도 한 20년 전부터는 JPEG 등 압축 디지털 사진 파일을 곧바로 사용하기 때문에 출력된 사진을 따로 스캔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다음 없어진 것이 보도자료다. 인쇄된 보도자료 대신 QR코드로 대체된 것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 10년 정도 된 것 같다. 이를테면 도장 찍는 로봇이나 글씨 쓰는 기계처럼 여전히 ‘21세기형 아날로그’가 지속하고 있는 일본 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도 나름 첨단이라 영화 시사회는 새로 단장한 서울 용산의 스크린X 관에서 열렸다. 가운데 스크린 말고 양 벽면까지 스크린이 연장돼 나오는 것으로, 한국에서 처음 개발된 포맷이다. 이 코너에서 리뷰했던 스크린X 작품으로 기억나는 건 <보헤미안 랩소디>(브라이언 싱어 감독·2018)다. 시사회에서 스크린X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나중에 동네 극장에서 가족과 영화를 다시 봤을 때는 확실히 스크린X 버전이었다. 일본 쪽 자료를 보면 영화는 처음에 만들어질 때부터 스크린X 버전뿐 아니라 IMAX 버전과 4DX 버전 등 다양한 상영포맷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2003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시민사회 행사 취재를 하러 가서 며칠간 묵었던 곳이 요요기역 인근이다. 행사는 주로 낮에 열려 해가 지면 요요기역을 출발해 복잡한 미로 같은 신주쿠역에서 한국의 2호선과 닮은 야마노테 선으로 갈아타 목적지인 이케부쿠로나 아키하바라 같은 곳으로 가곤 했다.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케 하는 8번 출구의 통로를 제외하고 영화의 배경으로 쓰였던 좁은 지하철 계단 등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해 찾아보니 실제 세트를 제외한 현지 로케는 요요기역과 신주쿠 동쪽 히가시신주쿠역에서 찍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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