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쉰 살에 찾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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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쉰 살에 찾은 나

입력 2025.09.12 14:38

수정 2025.09.1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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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국 작가
/ 언스플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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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이유 없이 나 자신을 비하하며 산 적이 있다. 1차에 낙방하고 2차로 들어간 고등학교 시절이 그랬고, 대우그룹에 다닐 적이나 대통령을 모실 때도 문득문득 그랬다. 아니, 그 이전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의 명절날에도 그랬다.

어느 날, 두 살 터울인 형과 어른들 몰래 골방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형이 변소에 간 틈을 타 형의 술잔에 요강에 있는 오줌을 따라놓았고, 그걸 마신 형이 나를 개 패듯 할 때, 나는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몸을 움츠렸지만 맞는 게 싫지 않았다.

벌레 취급을 받은 적도 있다. 중학생 때 전주에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 화장실에서 쪼그려 앉아 용변을 보는데, 청소하는 아저씨가 양동이에 물을 퍼와 내게 쏟아부을 기세로 “당장 나오지 못해” 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제발 문 좀 닫아 주세요” 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지만, 결국 나는 용변을 보던 중 개처럼 끌려 나왔다.

이런 장면은 또 있다. 대통령과 회장에게 혼이 날 때, 한없이 쪼그라들고 땅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했다. ‘이 시간도 가겠지.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거야’ 하면서 마음을 진정하려 해도 내 정체가 탄로 났다는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한 일은 늘 못마땅했다.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나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접고 살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요즘 뭐가 잘 풀린다 했어’,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내게 뭘 더 바라겠어’ 이런 체념과 끊임없는 자기부정 속에 살았다.

나 같은 사람의 특징이 있다. 나와 닮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질투와 시기를 많이 한다. 매사에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으니 모든 게 안 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울과 공허와 후회를 달고 산다. 그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 끊임없이 상대방의 관심과 애정을 요구한다. 그런데 누구보다 자기애가 강하다. 자기부정과 자기애는 동전의 양면이다.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일수록 더 자신을 아낀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관계

모든 관계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사랑하는 법은 알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 싶으면, 먼저 자신부터 소중하게 여기고 아껴줘야 하는 데 말이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동안 정작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하며 살아온 내게, 자신과의 관계는 그저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철학자 니체는 “무슨 일을 하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라”라며, 자기를 사랑하는 게 변화와 성장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장점을 찾아 칭찬하는 것일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나의 어두운 면, 즉 부족함과 실수, 약점, 때로는 추한 모습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 실패했을 때 자책하는 대신 위로하는 것.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가치관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특징이 있다. 일단, 상대방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잘 알기에 굳이 상대방에게서 인정받으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또한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안에서 조율하는 과정을 거친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건강해진다. 어느 한쪽에 기울어짐 없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자기를 아끼고 존중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존중과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을 받아들이는 데도 너그럽다. 자신도 그리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상대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나를 알아야 한다. 나에 대해 탐색하고 탐구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이 부족하고 미흡한지 알아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첫걸음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고, 실수하며, 때로는 한없이 나약하다. 그런 부족함과 모자람을 솔직하게 받아들이자. 자기 자신에게 ‘나는 왜 이것뿐이 안 될까?’ 같은 비난 대신 ‘괜찮아,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 같은 격려의 말을 하자.

스스로에 대해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왜 내 삶을 두고 그래야 하는가. 그게 난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나 말고 누가 나를 귀히 여기겠는가. 내가 나를 보듬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쉰 살 이후, 비로소 나를 찾았다. 스스로를 싫어하고 미워한, 세월의 뒤안길을 돌고 돌아 나로 돌아왔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둘째. 나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살아보니 크게 잘난 사람도 크게 못난 사람도 없다. 다 거기서 거기다. 남의 삶을 기웃거리지 말고 내 길을 가면 된다. 나는 나다우면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다. 삶은 나답게 살 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게 분수에 맞는 삶, 무리하지 않는 삶이다. 못하는 걸 잘하려고 하지 말자. 내가 잘하고 편안하고 즐거운 것에 집중하자. 해야 하는 것 말고 하고 싶은 걸 하자. 그것이 한 번뿐인 인생 멋지게 사는 길이다.

모든 건 내 마음이다.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이라는 세상의 언명이 나를 구속하지 못한다. 남이 나를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내 말에 토 달지마’, ‘너는 왜 쟤처럼 못해?’, ‘다른 사람들이 너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아?’

삶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도 나답게 사는 길이다. 자신의 머릿속을 다른 사람으로 가득 채우고, 다른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선을 명확히 하고, 이를 지키는 것은 나 자신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행위다. 건강한 경계는 결국 더 좋은 관계를 맺는 바탕이 된다. 건강한 경계선을 그리는 것.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중히 여기는 것. 나를 존중하지 않는 관계에서는 과감히 물러서는 것. 이런 것이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 방법이다.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다. 언스플래시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다. 언스플래시

셋째,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다. 매일매일 나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일상에 치여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을 잊고 살기 쉽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시작된다. 마치 친한 친구를 대하듯 나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줘야 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차 한잔 마시거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는 것,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독서, 명상, 가벼운 산책 등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오롯이 내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다른 사람의 기분보다 내 기분, 다른 사람의 생각보다 내 생각, 다른 사람의 기대보다 내 희망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이런 소소한 순간이 모여 나를 사랑하는 하루가 되고, 그런 하루가 모여 나를 사랑하는 삶이 된다.

모든 만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하지만 싫건 좋건 나와는 평생 함께 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관계는 자신과의 관계다. 건강한 관계의 시작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한다. 내 마음을 지킬 수 있어야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힘도 생긴다. 나와의 관계가 굳건해질수록 세상과 맺는 모든 관계도 더욱 건강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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