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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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파키스탄 상호방위협정, ‘美 주도 중동 질서’ 균열 신호

‘오일머니’ 사우디, 파키스탄 핵우산으로 이스라엘 견제 노림수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5-10-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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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왼쪽)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겸 총리는 9월 17일(이하 현지 시간)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이 전략적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뉴시스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왼쪽)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겸 총리는 9월 17일(이하 현지 시간)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이 전략적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뉴시스 

    파키스탄 파이살라바드는 카라치, 라호르에 이은 제3의 도시다. 펀자브주에 있는 이 도시 이름은 원래 리얄푸르였는데, 파키스탄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해준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을 기리고자 1977년 현 지명으로 개칭했다.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랜드 마크인 파이살 모스크 역시 파이살 국왕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모스크는 최대 7만 명이 기도할 수 있는 파키스탄 최대 규모 사원이다. 파이살 국왕은 이 모스크 건설에 거액을 기부했다. 

    파이살 국왕은 파키스탄의 핵 개발도 비밀리에 지원했다. 인도가 1974년 첫 핵실험을 실시한 직후 당시 줄피카르 알리 부토 파키스탄 총리는 파이살 국왕을 찾아가 자국의 핵무기 개발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부토 총리는 “국민이 풀뿌리를 캐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을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파이살 국왕은 부토 총리의 이런 요청을 받아들여 상당한 자금을 기꺼이 지원한 바 있다. 

    수니파로 뭉친 두 국가

    양국은 1960년대부터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어왔다.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는 같은 수니파인 파키스탄을 형제국으로 간주한다. 사우디는 1979년 시아파 맹주인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이 붕괴되자,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또한 1998년 파키스탄이 핵실험으로 미국 등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아 어려움을 겪을 때는 하루 5만 배럴 석유를 파키스탄에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파키스탄도 사우디를 가장 가까운 이슬람 국가로 여긴다. 파키스탄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와 접경지대에 군 병력을 파견해 사우디를 보호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지금도 사우디에 1500여 명 군사고문단을 보내 훈련 등을 지원하고 있다. 사우디에는 현재 파키스탄 노동자 250만 명이 거주하며 일한다.   

    밀월관계인 사우디와 파키스탄이 9월 17일(이하 현지 시간) 상호방위협정을 공개적으로 체결해 중동과 남아시아 지역은 물론, 국제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사우디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와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이 전략적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 협정의 골자는 양국 중 어느 한 나라에 대한 침략을 양국 모두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해 모든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서 공동 대응한다는 것이다. 또 양국의 방위협력을 여러 측면에서 발전시키고 어떠한 침략에도 맞서는 공동 억지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명시했다. 공동 억지력은 핵무기를 의미한다.



    미국 원자력과학자협회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170개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파키스탄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공인하는 핵보유국(nuclear-weapon state)은 아니지만, 국제사회로부터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아왔다. 서방 언론들은 파키스탄 핵무기를 ‘이슬람 폭탄(Islamic Bomb)’이라고 부른다. 이슬람 국가 중 파키스탄이 유일하게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와자 아시프 파키스탄 국방장관은 9월 18일 국영 TV와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의 핵 억지력이 사우디에도 제공되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가진 것, 보유한 능력을 이 협정에 따라 사우디에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시프 장관은 “상호방위협정은 양국이 서로에게 제공하는 포괄적인 조약”이라면서 “어느 한쪽에 공격이 가해질 경우 공동으로 방어하고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제사회에선 그동안 양국이 비밀리에 핵 공유를 내용으로 한 협정을 맺었다는 설이 나돌았는데, 이제는 이를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리야드 남쪽 알 술라이일 지하에 비밀 미사일 격납고를 건설해 파키스탄의 핵 탑재 미사일을 비축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8년 3월 미국 CBS와 인터뷰에서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사우디도 핵개발에 뛰어들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오일머니’와 ‘이슬람 폭탄’의 결합

    주목할 점은 사우디가 파키스탄과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한 이유가 이란 핵개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9월 9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지도부를 제거하겠다며 가자지구 전쟁의 휴전을 중재해온 카타르를 공습했다. 중동의 유일한 비공식 핵보유국인 이스라엘은 그동안 하마스를 지원한 이란까지 공격했고, 심지어 휴전 중재국 카타르까지 공습하는 등 주변 국가들과의 무력 충돌을 불사해왔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유무형으로 지원했다. 이에 사우디로선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고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미국 언론들은 사우디의 이 같은 변화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누적된 실망감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알리 시하비 사우디 정치평론가는 “이스라엘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사우디는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고 있는 점을 우려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협정은 자국 안보 불안 해소를 위한 사우디의 의지가 구체화한 결과이며, 미국이 주도해온 중동 지역 안보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중요한 신호라고 할 수 있다.

    파키스탄이 사우디와 협정을 맺은 이유는 인도를 견제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파키스탄은 그동안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인도와 영토 분쟁을 벌였다. 특히 파키스탄과 인도는 4~5월 국경 지역에서 전투기, 미사일을 동원한 무력 충돌까지 벌였다. 파키스탄은 핵전력에서 인도와 대등하지만 재래식 전력에서는 상당히 열세다. 인도는 핵무기 172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크리스토퍼 클래리 미국 뉴욕주립대 교수는 “인도는 파키스탄보다 핵무기 운반이 가능한 항공 전력이 더 우세하고 해상 전력도 앞서며 지상 전력도 막강하다”고 지적했다. 

    인도는 현재 국내총생산(GDP)이 4조1900억 달러(약 5880조 원)로 세계 5위에 해당한다. 중국을 대체할 세계 공장을 꿈꾸고 있다. 반면 파키스탄은 GDP가 3746억 달러(약 525조7000억 원)에 불과한 세계 44위 개발도상국이다. 인도의 2023년 기준 국방예산은 738억 달러(약 103조6000억 원)로 파키스탄(63억4000만 달러·8조9000억 원)보다 10배 이상 많다. 파키스탄으로선 사우디와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해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인도를 견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사우디의 오일머니로 자국 군사력을 현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원유 생산국인 사우디는 원유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머니로 국제사회를 좌지우지해왔다.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10월 9일 카타르 도하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뉴시스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10월 9일 카타르 도하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뉴시스

    사우디와 중국 관계 긴밀해질 수도

    오일머니와 이슬람 폭탄의 결합은 인도와 이스라엘은 물론, 미국과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사우디의 지원으로 강경한 대(對)인도 정책을 추진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뿐 아니라, 파키스탄의 핵무기 공격을 유발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에도 대비해야 한다. 걸프 지역 국가를 상대로 일방적인 군사 행동을 하기 전 신중한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군사 전문가들은 이번 협정을 ‘게임체인저’라고 부르면서 이스라엘이 일종의 확대된 위협 방식에 대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파키스탄군은 핵 탑재가 가능한 중거리탄도미사일 샤힌-3 등을 개발해 실전 배치했다. 라비아 악타르 파키스탄 라호르대 안보전략정책연구센터 소장은 “이번 협정은 핵무기를 다수 보유한 이슬람 국가가 사우디 곁에 있다는 상징성을 강화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중동지역에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사우디가 미국 뜻에 무조건 따르기보다 독자적 판단에 따라 행동할 것임을 이번 협정을 통해 보여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우디와 중국의 관계가 파키스탄을 고리로 더욱 긴밀해질 수 있다는 점이 미국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파키스탄은 그동안 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전투기를 비롯한 각종 군사 장비 등을 중국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중국은 파키스탄과 우호 관계를 강화하면서 사우디 등 중동 지역에 적극 진출해 영향력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으로선 ‘핵보유국’임을 강조해온 북한이 파키스탄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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