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는 1기 때인 2018년부터 대중(對中) 반도체 규제를 시작했다. 뉴스1
美 “반도체 장비 반출 허가 받아라”
미국 상무부 산업보안국(BIS)은 8월 29일(이하 현지 시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지위에서 철회한다는 내용의 관보를 게재했다. 이에 따라 수출 통제 지역인 중국 공장에 미국 반도체 장비를 들여오려면 미국 정부의 허가가 필요해졌다.BIS는 “소수 외국 기업이 반도체 장비와 기술을 중국에 허가 없이 수출할 수 있었던 조 바이든 시대의 허점을 메웠다”고 밝혔다. 이번 철회 조치는 120일 유예 기간을 둬 내년부터 발효된다. 여기에 알리바바발(發) 쇼크가 겹치면서 9월 1일 국내 반도체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SK하이닉스 주가는 9월 1일 4.83% 내린 25만6000원에 장을 마감했고, 삼성전자 주가도 3.01% 떨어진 6만7600원에 거래를 마쳤다.
미국 정부는 2022년 10월 중국 공장을 대상으로 반도체 장비 규제를 시행했다.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국 공장은 VEU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제 미국 상무부가 해당 자격을 무효화하면서 중국 반도체 공장에 미국 장비를 공급할 때마다 승인이 필요하다. 현재 반도체 주요 공정 장비는 미국 기업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BIS는 이번 조치가 시행되면 연간 1000건의 수출 허가 신청이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8월 29일 “우리 기업이 받는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미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40%, SK하이닉스는 D램의 40%와 낸드플래시의 20%가량을 중국에서 생산한다. 업계 관계자는 “유예 기간이 남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공장이 구형 제품 생산 위주로 가동되고 있어 단기적 피해는 적을 것으로 보인다. 또 2022년부터 중국 공장에 대한 규제 가능성이 대두된 만큼 관련 대비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중국 공장 규제는 오래전부터 나온 것이라서 각 기업도 중국 공장 매출을 줄여가고 있었다”며 “팹 전환이나 재배치 등을 통해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방식으로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1월 중국 시안 공장에서 낸드 웨이퍼 투입량을 줄이기로 결정한 바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도 “VEU를 지정할 때 기한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대로 해석하면 주어졌던 특혜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며 “기업들은 이에 대비하고 있을 테고,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중국 시안 공장 전경.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40%를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다. 삼성전자 제공
상호관세 위기 맞은 트럼프
이번 조치는 중국 반도체 시장 견제와 함께 미국의 영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BIS의 VEU 지위 철회 결정이 나오자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8월 30일 홈페이지를 통해 “미국의 이번 조치는 이기심에서 출발해 수출 통제를 도구화한 것으로, 글로벌 반도체 산업·공급망 안정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만들었다”며 “중국은 필요한 조치를 취해 기업의 정당한 권익을 단호히 수호할 것”이라고 밝혔다.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은 법적 문제에 부딪쳤다. 8월 29일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의거한 상호관세가 위법하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오면서다. 하지만 무역확장법에 근거한 품목별 관세는 이번 법원 판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김 전문연구원은 “관세 등 반도체 협상이 남은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이 중요하게 여기는 반도체산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채민숙, 황준태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9월 1일 보고서를 통해 “이번 VEU 지위 철회 발표는 실질적 제한 조치라기보다 미국의 전략적 압박 카드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미국 상무부는 9월 2일 한국 기업에 이어 TSMC 난징 공장에 대한 VEU 지위 역시 철회했다. 이에 대만 정부도 미국의 반도체 관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상회담이 끝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발표인 만큼 앞으로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한미 정상회담 전 미국이 삼성전자 지분 인수를 검토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흘린 것처럼 이번 VEU 지위 철회도 반도체 관세 등 앞으로의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지렛대로 보인다”며 “화기애애한 정상회담 분위기를 보여준 것은 좋지만, 사후 대처 방식을 넘어 이제는 실질적 수치로 외교 성과를 증명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문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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