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은 정치체제만 바꾼 사건이 아니었다. 식량 사정, 유통 구조, 그에 대한 세금과 표준 규격 같은 생활 기초 규칙이 동시다발적으로 변하게 된 기점이었다. 이 과정에서 술 또한 원료와 제조법, 맛과 마시는 방식까지 전부 새롭게 재편됐다. 그 격변을 막걸리, 희석식 소주, 위스키라는 세 갈래로 따라가 보자.
해방 직후 막걸리는 ‘결핍의 술’이었다. 양곡 배급은 계속해서 빡빡했고 6·25전쟁과 가난 속에서 쌀은 식량으로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1965년에는 양곡관리법이 등장해 쌀과 보리로 술 빚는 것을 원칙적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당시 양조업계는 미국 원조로 국내에 들어온 밀가루를 대체 원료로 삼았다. 이에 고슬고슬한 쌀밥의 단맛과 특유의 전분 향 대신 빠르게 발효돼 거친 감촉을 남기는 ‘밀가루 막걸리’가 전국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부족한 단맛을 감미료로 보강하는 것도 이 시기 굳어진 제조법이다.
또 정부는 효율을 이유로 막걸리 양조장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했다. 면 단위 양조장을 쿼터로 묶어 합동 양조를 권했다. 술의 다양성이 줄어들었고 ‘어디서 마셔도 비슷한’ 표준적인 맛이 한국인 혀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지역에는 ‘버티는 지혜’가 있었다. 생쌀 발효처럼 적은 원료로 술을 빚는 기술, 술이 부패하지 않도록 젖산 발효를 시키는 관리 노하우가 퍼졌고, 기름진 음식에 맞는 ‘아랫술’(탁한 부분)과 깔끔한 음식에 맞는 ‘윗술’(맑은 부분)로 나눠 마시는 남도 식문화 등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후 1986년을 기점으로 막걸리 원형 회복 움직임이 나타났다. 문배주, 교동법주, 면천두견주 같은 전통주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며 잊힌 제조법과 맛을 복원하는 공적 기반이 놓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로 ‘우리 술 되찾기’ 흐름이 더 커졌으며, 막걸리는 밀가루 시대를 지나 다시 ‘쌀의 술’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70~1990년대 소주산업은 다양성보다 규모를 키우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주정을 전년 생산량 기준으로 배당해 큰 회사가 계속 생산을 과점했고, 시도별 소주 1사 체제가 시행되면서 지역 독점 구조가 만들어졌다. 360㎖ 녹색병이 규격화된 것도 이때다. 1970년대 수백 개에 달하던 소주 양조장은 통폐합을 거쳐 10개 안팎으로 줄었다. 다양성을 잃은 대가로 ‘저가·균일·대량’이라는 압도적인 효율을 얻은 셈이다.
이 과정에서 비운의 기업이 나오기도 했다. 전남 목포 삼학소주는 1960년대 전국구 인기를 누리며 납세 실적이 진로를 앞설 만큼 성장했으나, 1971년 납세필증 위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은 뒤 1973년 부도 처리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치적 괘씸죄, 가짜 소주 파동 등 갖가지 설이 꼬리를 물었고 ‘비운의 삼학’이라는 기억을 남겼다. 산업 구조와 제도의 물줄기가 얼마나 강하게 한 회사를 뒤흔드는지 보여준 사례다.
한편 1980년대 후반에는 ‘관광업소용 소주’처럼 병만 고급화한 제품, 1.8L ‘됫병’ 문화도 표준화 파도 속에 소멸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1986년 무형문화재 제도로 부활한 지역 증류식 소주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안동소주, 이강주 같은 이름이 다시 식탁에 돌아온 이유다.
1970~1980년대에는 위스키 원액을 일부 섞은 국산 제품이 속속 등장했고, 1990년대 들어 수입 자유화가 진전되면서 ‘진짜’ 스카치·버번위스키가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해방 후 한국 술은 크게 세 차례 변곡점을 맞았다. 첫째는 양곡관리법에 따른 막걸리 대체 원료 채택과 소주 희석 기술의 보편화, 둘째는 1970년대 효율·통폐합 기조에 따른 대기업 중심 주류산업 구조 형성, 셋째는 1986년 전통주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후 시작된 복원과 재해석이다. 정책은 분명 필요했고 효율은 한 세대를 먹여 살렸다. 그러나 술의 품격은 결국 다양성에서 나온다. 시대가 요구한 표준을 넘어 다시 재료와 기술, 지역과 정체성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20세기 말 이미 시작됐다. 이는 오늘날 술 문화의 변화를 예고한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막걸리, 밀가루 지나 다시 쌀로
1960년대 진로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으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삼학소주. 두레앙 제공
또 정부는 효율을 이유로 막걸리 양조장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했다. 면 단위 양조장을 쿼터로 묶어 합동 양조를 권했다. 술의 다양성이 줄어들었고 ‘어디서 마셔도 비슷한’ 표준적인 맛이 한국인 혀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지역에는 ‘버티는 지혜’가 있었다. 생쌀 발효처럼 적은 원료로 술을 빚는 기술, 술이 부패하지 않도록 젖산 발효를 시키는 관리 노하우가 퍼졌고, 기름진 음식에 맞는 ‘아랫술’(탁한 부분)과 깔끔한 음식에 맞는 ‘윗술’(맑은 부분)로 나눠 마시는 남도 식문화 등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후 1986년을 기점으로 막걸리 원형 회복 움직임이 나타났다. 문배주, 교동법주, 면천두견주 같은 전통주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며 잊힌 제조법과 맛을 복원하는 공적 기반이 놓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로 ‘우리 술 되찾기’ 흐름이 더 커졌으며, 막걸리는 밀가루 시대를 지나 다시 ‘쌀의 술’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주, 증류와 희석 그리고 효율화
소주의 근대사는 북에서 남으로 이동한다. 북한 증류 장인, 기업이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남쪽으로 넘어왔는데, 평안도 용강 출신인 장학엽 진로 창업주가 그 상징적인 예다. 다만 전통 증류식 소주가 주류로 뿌리내리기도 전에 양곡관리법이 시행됐다. 1965년 이후 순곡 증류는 사실상 금지됐고, 수입 또는 비식용 원료로 만든 주정에 물을 타서 만드는 ‘희석식 소주’가 국가 표준이 됐다. 도수는 35도에서 25도, 다시 20도 이하로 점점 낮아졌다.1970~1990년대 소주산업은 다양성보다 규모를 키우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주정을 전년 생산량 기준으로 배당해 큰 회사가 계속 생산을 과점했고, 시도별 소주 1사 체제가 시행되면서 지역 독점 구조가 만들어졌다. 360㎖ 녹색병이 규격화된 것도 이때다. 1970년대 수백 개에 달하던 소주 양조장은 통폐합을 거쳐 10개 안팎으로 줄었다. 다양성을 잃은 대가로 ‘저가·균일·대량’이라는 압도적인 효율을 얻은 셈이다.
이 과정에서 비운의 기업이 나오기도 했다. 전남 목포 삼학소주는 1960년대 전국구 인기를 누리며 납세 실적이 진로를 앞설 만큼 성장했으나, 1971년 납세필증 위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은 뒤 1973년 부도 처리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치적 괘씸죄, 가짜 소주 파동 등 갖가지 설이 꼬리를 물었고 ‘비운의 삼학’이라는 기억을 남겼다. 산업 구조와 제도의 물줄기가 얼마나 강하게 한 회사를 뒤흔드는지 보여준 사례다.
한편 1980년대 후반에는 ‘관광업소용 소주’처럼 병만 고급화한 제품, 1.8L ‘됫병’ 문화도 표준화 파도 속에 소멸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1986년 무형문화재 제도로 부활한 지역 증류식 소주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안동소주, 이강주 같은 이름이 다시 식탁에 돌아온 이유다.
#위스키, 합법과 불법 경계에서
해방 후 위스키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오갔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영국산 화이트호스 같은 수입 위스키가 일부 국내로 들어왔지만, 전쟁·외환·관세 등으로 일반에 공급되지는 않았다. 그 빈틈을 파고든 건 모조 위스키다. 일본 토리스 인기에 편승한 도리스가 대표적인데, 상표권 분쟁으로 이름을 ‘도라지 위스키’로 바꿔 단 뒤 폭발적 판매량을 기록했다. 물론 도라지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소주에 색과 향을 입힌 유사 위스키였다. 판매 1번지는 다방이었다. 찻집으로 분류돼 술을 팔 수 없는 곳에서 위스키와 홍차를 섞은 ‘위티’, 위스키에 물을 탄 ‘깡티’, 심지어 쌍화탕에 위스키를 넣은 메뉴까지 탄생했다. 한국식 위스키 문화는 다방이라는 회색지대에서 자라난 셈이다.1970~1980년대에는 위스키 원액을 일부 섞은 국산 제품이 속속 등장했고, 1990년대 들어 수입 자유화가 진전되면서 ‘진짜’ 스카치·버번위스키가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해방 후 한국 술은 크게 세 차례 변곡점을 맞았다. 첫째는 양곡관리법에 따른 막걸리 대체 원료 채택과 소주 희석 기술의 보편화, 둘째는 1970년대 효율·통폐합 기조에 따른 대기업 중심 주류산업 구조 형성, 셋째는 1986년 전통주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후 시작된 복원과 재해석이다. 정책은 분명 필요했고 효율은 한 세대를 먹여 살렸다. 그러나 술의 품격은 결국 다양성에서 나온다. 시대가 요구한 표준을 넘어 다시 재료와 기술, 지역과 정체성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20세기 말 이미 시작됐다. 이는 오늘날 술 문화의 변화를 예고한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