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제재로 한국 술의 정체성이 위협받았다. GETTYIMAGES
대일본맥주에 뿌리 둔 한국 맥주
변화 기점은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이다.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에서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에 무관세를 요구했다. 조선은 재정과 주권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외국 술 역시 무관세 체제에서 급격히 조선으로 유입됐다.조선이 관세 자주권을 인정받은 건 그로부터 수년 뒤인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다. 이때 수입 주류에 처음 관세가 부과되기 시작했고 세금이 술 문화 안으로 들어왔다.
1883년 12월 20일 한성순보에 실린 ‘해관세칙’은 그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낯선 술 이름은 한글과 한자로 음역됐는데 위스키는 유사길(惟斯吉), 브랜디는 발란덕(撥蘭德), 샴페인은 상백윤(上伯允), 리큐어는 리구이(哩九龜), 보르도 와인은 복이탈(卜爾脫)로 표기됐다. 위스키와 브랜디 관세율은 약 30%로 20%인 현재보다 높았다.
맥주는 기록상 다른 술보다 더 이른 시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에 정박한 미군 함대는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며 맥주를 대접했는데, 당시 협상을 맡은 조선 하급 관리가 맥주를 받아 마신 뒤 빈 병을 한가득 들고 돌아온 사건이 서양 맥주에 관한 첫 공식 기록이다.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부터는 일본 맥주가 대거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기린, 에비스, 삿포로가 대표적이었고 특히 기린은 1888년 대형 유통사 메이지야와 계약을 맺어 1905년부터 조선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조선에서 맥주는 상류층의 향유물로 자리 잡았으며 사람들은 맥주를 일본식 발음인 ‘삐루’라고 불렀다.
일본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 맥주산업을 구조적으로 장악했다. 1933년 대일본맥주주식회사가 서울 영등포에 조선맥주를 세웠고 인근에 쇼와기린 맥주가 들어섰다. 두 회사 모두 영등포를 생산 거점으로 삼아 아사히, 삿포로, 기린 맥주를 조선에서 생산·공급했다. 해방 이후 이들은 적산기업으로 미군정에 귀속됐으며 조선맥주는 훗날 하이트맥주로, 쇼와기린은 동양맥주(OB)로 이어졌다. 조선맥주는 1998년 사명을 하이트로 바꾼 뒤 2005년 진로와 합병해 오늘날 하이트진로가 됐다. 한국 맥주의 산업적 출발이 일본 자본과 식민지 체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씁쓸한 아이러니다.
생활사의 단면을 살펴보면 변화는 더 선명하다. 냉장 기술이 부족한 시절이었기에 맥주를 우물에 넣어 보관했고, 배달할 때 병끼리 부딪쳐 깨지는 것을 막고자 짚과 왕겨를 상자에 채워 넣었다.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이다. 외국 술이 일상에 스며드는 방식은 아주 구체적이었고 그렇게 전통주 자리를 조금씩 앗아갔다.
소맥 원형은 일제강점기 혼돈주
한국 술에 특히 치명적이었던 건 제도다. 1909년 일제가 공포한 주세법은 집에서 술을 빚을 때 신고를 의무화했다. 문맹률이 높은 현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금지에 가까웠다. 이후 1916년 주세령이 시행되면서 자가 양조 문화는 사실상 소멸했다. 집에서 술을 빚을 때도 면허를 받고 세금을 내는 것을 골자로 한 주세령은 1995년까지 이어졌다. 그사이 전승 고리는 약해졌고 문헌 속 수많은 레시피와 양조 지혜, 집안마다 지켜오던 의례주는 명맥이 끊기거나 희미해졌다.술 명칭에서도 상실은 이어졌다. 일본은 자국 청주(사케)와의 구분을 이유로 한국 술에 청주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다. 사케를 부를 때만 청주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후 사케 브랜드 중 하나인 ‘정종’이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사케 전체를 대표하는 보통명사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일부 전통주에 남아 있는 ‘특선’ ‘초특선’ 같은 등급 표기는 일제 잔재다.
일제강점기에는 새로운 음주 문화도 생겨났다. 막걸리에 소주를 섞은 ‘혼돈주’, 일본 맥주에 탁주를 더한 ‘비탁’은 오늘날 폭탄주와 ‘소맥’의 원형으로 거론된다. 또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전쟁으로 인한 술 통제 속에서 기존에 유행하던 영국산 백마표 위스키(White Horse Whisky)의 수입이 끊겼다. 이에 소주에 색소나 캐러멜 등을 탄 유사 위스키가 성행했다. 전쟁과 제도가 낳은 불법·편법의 풍경이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는 한국 술의 다양성이 크게 늘어난 동시에 근간을 위협받은 시기였다. 외국 술의 대량 유입, 관세 도입, 일제의 술산업 장악과 통제로 우리 술을 스스로 평가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겼다. 나라를 잃으면 술 문화 또한 이름과 길을 잃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