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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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레놀이 자폐 유발? 자폐는 유전이 주요 원인

[강석기의 뇌과학 리포트] 트럼프 발언에 논란 확산… WHO “결정적 증거 없다”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입력2025-10-04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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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의 말과 생각, 감정과 행동은 뇌과학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우리를 움직이는 뇌. 강석기 칼럼니스트가 최신 연구와 일상 사례를 바탕으로 뇌가 만들어내는 마음의 비밀을 풀어준다.
    미국에서 자폐 유발 논란의 대상이 된 해열진통제 타이레놀. 한국존슨앤드존슨 제공

    미국에서 자폐 유발 논란의 대상이 된 해열진통제 타이레놀. 한국존슨앤드존슨 제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월 22일(현지 시간) 뜬금없이 “임신부가 (해열진통제) 타이레놀을 복용하면 자폐아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타이레놀에 ‘자폐와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증가 연관성’을 명시한 경고 문구를 부착하게 할 것이라고 거들었다. 이런 움직임의 배후는 ‘백신 음모론자’로 유명한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 보건복지장관으로 보인다. 케네디 장관은 4월 기자회견에서 “8세 기준 자폐 유병률이 2000년 ‘150명에 1명’에서 2022년 ‘31명에 1명’으로 급증했다”며 자폐를 “환경 독소가 퍼뜨리는 전염병”이라고 규정했다. 그러고는 조만간 환경 독소의 실체를 밝히겠다고 공언했는데, 5개월 뒤 타이레놀이 그 주범으로 지목된 것이다.

    그렇다면 타이레놀은 정말 자폐를 일으키는 환경 독소일까. 그리고 20여 년 사이 자폐 유병률이 5배 가까이 늘어나 전염병이라고 부를 만큼 심각하다는 게 사실일까. 타이레놀이 나온 게 1955년인데, 2000년대 들어 갑자기 자폐 급증에 기여했다는 게 말이 될까.

    자폐 진단 기준 느슨해지며 급증

    1960년대 미국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은 “냉담한 엄마가 자폐아를 만든다”고 주장해 자폐아를 둔 어머니들 가슴에 못을 박았다. 환경의 한 범주인 양육에서, 즉 외부에서 자폐 원인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자폐에 대한 과학연구가 진행되면서 자폐 발병에는 환경보다 유전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란성쌍둥이 중 1명이 자폐일 경우 다른 1명이 자폐일 확률은 80%에 이른다. 유전적 요인이 꽤 되는 우울증의 경우 30~50%에 머문다. 이후 자폐 유전자(정확히는 변이형일 때 자폐 위험도가 높아지는 유전자) 연구에서 관련 유전자를 많이 찾아내는데, 예상대로 다수가 뇌에서 발현되는 유전자였다. 특히 신경세포(뉴런)를 연결하는 시냅스 관여 유전자가 여럿이었다. 즉 자폐는 뉴런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긴 결과라는 얘기다.

    그런데 자폐의 주요 원인이 유전이라면 어떻게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에 자폐가 급증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급증한 건 자폐가 아니라 진단과 인식”이라고 설명한다. 자폐를 진단하는 기준이 훨씬 느슨해지면서 과거에는 자폐로 여기지 않던 가벼운 증상도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어도 ‘자폐스펙트럼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ASD)로 바꿔 부르고 있다. 또 언어장애나 지적장애 같은 증상이 없어도 ‘사회적 무관심과 반복적 행동’이라는 기준을 충족하면 자폐(ASD)로 진단한다.



    물론 자폐 급증이 모두 진단이나 인식 변화 때문은 아니다. 연구 결과 자폐 유병률 증가에는 여러 요인이 조금씩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예가 부모의 고령화다. 특히 아버지 나이가 많은 게 자녀의 자폐 위험성을 높인다. 나이가 들수록 정자 게놈에 유해한 변이가 쌓이기 때문이다. 장내미생물 조성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에 따르면 자폐인 사람의 46~84%가 위장관질환을 갖고 있고, 분변을 분석한 결과 장내미생물 조성이 유의미하게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장내유해균이 내놓은 대사산물이 뇌 발달에 영향을 미쳐 자폐 위험성을 높였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이 모든 환경 요인을 합쳐도 유전 영향력에는 못 미친다는 게 현재 과학계의 대체적 결론이다.

    타이레놀은 자폐와 상관관계일 뿐

    그럼에도 케네디 장관은 자폐에 미치는 유전의 영향이 미미하다면서 환경 요인을 찾아 없애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가 이번에 발표된 임신부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 복용 중지 권고다. 이런 권고에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8월 학술지 ‘환경 보건’에 아세트아미노펜이 신경발달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의 메타연구 논문이 실렸다. 메타연구란 기존 연구를 모아 통계적으로 분석해 결론을 내는 방식이다. 선정한 46건 가운데 27건이 유의미한 연관성을 보였다며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전문가들은 ‘환경 보건’에 실린 논문의 결론이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임신 중 타이레놀을 복용해 설령 자폐 확률이 약간 높게 나오더라도 이는 타이레놀 때문(인과관계)이 아니라 해열진통제를 복용하게 만든 증상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즉 타이레놀은 증상을 없애려고 복용한 약물일 뿐이고(상관관계), 고열과 통증을 유발한 감염이나 염증이 근본적으로 태아의 신경발달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이런 논리라면 타이레놀은 오히려 자폐 위험성을 감소시켰을 수 있다.

    “다른 해열진통제도 많은데 굳이 타이레놀을 복용할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세트아미노펜은 타이레놀뿐 아니라 여러 진통제에 들어 있는 성분이다. 두세 개 성분이 섞인 진통제 가운데 아세트아미노펜을 포함한 것도 꽤 된다. 아세트아미노펜이 해열진통제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건 효과 대비 부작용이 적기 때문이다. 아세트아미노펜 대신 복용할 수 있는 진통제는 대부분 부작용이 크다. 예를 들어 아스피린, 이부프로펜, 나프록센 같은 약물은 임신 초기에 쓰면 유산 위험성이 높아지고, 태아 신장과 폐 발달 장애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고 약을 안 쓰고 참다가는 고열이나 염증이 지속돼 태아 발달에 훨씬 위험하다.

    이처럼 득보다 실이 될 가능성이 큰 조치에 대해 미국 의사들이 반발한 것은 물론, 미 산부인과학회를 비롯해 영국 의약품·의료제품규제청, 호주 의약품청 등 각국 관련 기관도 트럼프 대통령과 케네디 장관의 권고를 거부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즉각 “관련성을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가 없다”며 불안감이 세계로 확산하는 것을 차단했다.

    최근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자폐증 데이터과학 이니셔티브(ADSI) 프로그램에 따라 5000만 달러(약 700억 원) 규모의 자폐 연구비를 받게 될 13개 연구 그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 프로그램은 유전 요인과 환경 요인의 상호작용이 자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합리적 방향 같지만 많은 과학자가 이 프로그램이 케네디 장관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 세계 최고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강석기 칼럼니스트는… 서울대 화학과 및 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 연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를 거쳐 2012년부터 과학칼럼니스트이자 프리랜서 작가(대표 저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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