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1000만 명 넘는 목숨을 앗아 간 코로나19 병원체. GETTYIMAGES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봉건제도 토대를 흔들었다. 일손이 사라지자 농노가 협상력을 얻었고, 도시 상공업은 살아남은 이들의 선택지가 됐다. 페스트가 중세의 문을 닫고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질병의 확산 경로 또한 문명사적 흥미를 더한다. 몽골군이 크림반도 카파에서 흑사병 감염자 시신을 성안으로 던져 병을 퍼뜨렸다는 기록은 전쟁과 감염병의 어두운 동맹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질병이 전략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후 유럽 사회에는 ‘황화론’(黃禍論·Yellow Peril)’으로 불린, 동양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확산했다. 감염병은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공포를 증폭하는 장치이기도 했던 셈이다.
전쟁보다 무서운 감염병 그림자
21세기 들어서는 코로나19가 또 한 번 문명사를 바꿨다. 세계 각국이 국경을 닫고 자급과 고립으로 회귀했으며, 세계화는 멈칫했다. 인류는 기술을 무기로 감염병에 대응했지만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 비대면 경제가 표준이 되면서 개인은 ‘홀로서기’라는 새로운 사회적 습관에 길들여졌다.숫자는 냉정하다. 전쟁보다 감염병이 더 많은 생명을 앗아 갔다. 흑사병이 유럽 인구의 40~60%를 사라지게 했듯이 코로나19도 수백만 명을 직접적으로 사망케 했다. 미집계 사망자까지 고려하면 1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남긴 참호보다 바이러스가 남긴 빈자리가 더 넓다는 사실은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
문제는 기억의 휘발성이다. 팬데믹이 잠잠해지자 정부와 국민 모두 다시 안일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은 분명하다. 문명의 판을 바꾸는 진짜 위협은 총칼이 아니라 신종 감염병이다. 바이오 테러에 대비하는 국가생물안전과 고위험병원체 관리 등 보건안보 체계 확립이 필요하다. 이것을 국가안보 한 축으로 세우지 않는다면 다음 감염병은 또다시 경제와 정치, 우리 일상을 뒤흔들 것이다.
감염병은 문명의 비밀스러운 저자(著者)다. 우리는 그 손에 펜을 쥐여줄 것인가, 아니면 방어할 준비를 할 것인가. 방심은 가장 값비싼 정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