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에 등장하는 서울 풍경. 최근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은 케데헌 속 장소를 찾아 서울 남산, 종로, 잠실 등을 돌아다닌다. 서울시 제공
그런데 2025년 세상이 변하고 있다. 서울은 이제 ‘아시아의 뉴욕’이 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글로벌 문화의 새로운 진원지’가 되고 있다고 해도 그리 과장은 아니다. K팝 덕분에 서울로 몰려드는 외국 관광객들이 명동뿐 아니라 성수동, 한남동, 남산을 찾아다닌다. ‘뉴욕타임스’가 “서울 카페 문화가 뉴욕을 앞서고 있다”고 보도하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에게 약점도 많다. 한국어라는 높은 언어 장벽, 인맥·학맥 그물망의 내부자 문화, 여전히 좁은 획일적 성공 모델. 한류가 가장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지금이 위기이기도 하다.
압축된 창의성의 생산-유통-소비 사이클
아주 오래된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는 주인공이 겪는 고민이 흥미로웠다. 공부는 잘하지만 미적 감각이 없다는 콤플렉스. 명문대를 나왔지만 ‘프라다’와 ‘자라’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자괴감. 이것은 한국 교육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지점이었다. 한국 청년들이 수능을 잘 보려고 하루 10시간씩 문제집과 씨름하던 그 시간에 뉴욕 또래들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배회하며 자신만의 취향을 만들어갔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압력을 거쳐온 서울의 젊은 세대가 지금 전혀 다른 방식의 창의성을 폭발하고 있다. 성수동 낡은 자동차 정비소가 갤러리가 되고, 을지로 인쇄소 골목이 뉴욕 힙스터들도 부러워하는 바 거리가 되는 현상. 경제적 제약을 오히려 ‘뉴트로’라는 미학으로 승화하는 감각. 이는 뉴욕이나 파리가 흉내 낼 수 없는 서울만의 창의성 DNA다.
뉴욕의 창의성은 여전히 ‘충돌’에서 나온다. 월스트리트 뱅커와 브루클린 아티스트가 같은 지하철 칸에서 부딪치고, 5번가 티파니 매장 옆에서 할랄 푸드트럭이 연기를 뿜어내는 극단적 대비. 이런 계급과 문화의 충돌이 빚어내는 긴장감이 뉴욕 특유의 에너지를 만든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브루클린 지역 임대료가 맨해튼을 넘어서고, 진짜 예술가들은 이미 디트로이트나 포틀랜드로 향하고 있다.
도쿄의 창의성은 ‘집중’과 ‘정제’의 미학이다. 긴자 뒷골목에서 라멘 하나를 30년간 연구해온 장인이 있고, 하라주쿠의 10㎡짜리 매장에서 전 세계 패션계를 뒤흔드는 브랜드가 탄생한다. 일본인은 제약을 창의성의 원동력으로 전환하는 데 탁월하다. 하지만 이런 내향적 완벽주의는 글로벌 확장성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서울의 창의성은 ‘속도’와 ‘연결성’이 핵심이다.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포착하고, 즉각 변형하며, 바이럴하게 확산하는 능력은 세계 어느 도시도 따라올 수 없다. 어제 틱톡에서 본 댄스가 오늘 홍대 앞 거리에서 재연되고, 내일이면 또 다른 버전으로 진화한다. 서울은 창의성의 생산-유통-소비 사이클을 극도로 압축했고, 이 압축 밀도가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새로 그려진 창의성 지도
줌(Zoom)으로 뉴욕 갤러리 오프닝에 참석할 수 있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비싼 항공료를 내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왜일까. 답은 ‘우연한 만남’과 ‘감각적 밀도’에 있다. 뉴욕 지하철 특유의 냄새와 소음, 타임스스퀘어의 현란한 네온사인, 브루클린 브리지를 걸을 때 느껴지는 바람. 이런 비언어적·비의도적 자극이야말로 창의성의 진짜 원천이다.2018년 한국 한 스타트업이 ‘글로벌 진출’을 외치며 뉴욕에 오피스를 열었다가 1년 후 철수했다. 최고경영자(CEO)의 회고가 뼈아프다. “뉴욕에 있다고 글로벌이 되는 게 아니었다. 서울에서 만든 제품을 전 세계가 찾아서 쓰게 하는 게 진짜 글로벌이었다.” 반대로 서울패션위크에서 주목받은 한 디자이너는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에 집착한 나머지 파리에서 실패했다. 한복 곡선을 재해석했다는 컬렉션은 “이국적이지만 입을 수 없는 옷”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로컬의 깊이도 중요하지만, 보편적 언어를 잃어선 안 된다는 교훈이다.
이제 공식이 바뀌었다. ‘뉴욕 1년=글로벌 크리에이터’라는 20세기 방정식은 끝났다. 그 대신 ‘로컬의 깊이×글로벌 연결성×디지털 활용도=창의적 영향력’이라는 공식이 등장했다. 무신사가 동대문 패션을 온라인화해 아시아 최대 플랫폼이 되고, 당근마켓이 한국 정(情) 문화를 애플리케이션(앱)으로 구현해 영국과 캐나다에 진출한 것이 이 공식의 증명이다. 하이브가 BTS를 통해 보여준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 연습생 시스템과 미국 팝 문법, 소셜미디어의 팬덤 문화를 절묘하게 결합했다.
‘뉴욕에서 1년’은 이제 물리적 경험이 아닌, 정신적 태도의 메타포가 돼야 한다. 낯선 것을 포용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계를 넘나드는 태도. 이런 태도는 서울 성수동에서도, 전주 한옥마을에서도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건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경험하고, 어떻게 연결하고, 어떻게 창조하느냐다. 서울의 빨리빨리 문화와 도쿄의 장인 정신을 결합하고, 뉴욕의 다양성과 베를린의 실험정신을 믹스하는 것. 이것이 21세기 창의성의 진짜 모습이다.
뉴욕에서 1년? 여전히 가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서울에서 1년이 더 혁신적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중요한 건 이제 우리에게 선택지가 생겼다는 점이다. 창의성 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지도에서 서울은 더는 변방이 아니라 중심이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