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이하 현지 시간) 네팔 카트만두에 있는 람 찬드라 파우텔 대통령 관저가 반정부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고 있다. 뉴시스
새 총리 임명 이끈 네팔 Z세대
네팔 청년이 대거 반정부 시위를 벌인 직접적 원인은 정부가 9월 5일(이하 현지 시간)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X(옛 트위터) 등 26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접속을 차단하고 사용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네팔 청년들은 가짜 뉴스 확산을 막겠다는 이유를 든 정부의 이번 조치에 거세게 반발했다. 네팔에선 SNS가 젊은 층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다. SNS는 해외 이주 네팔 노동자들이 가족과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네팔 전체 인구 3050만 명 가운데 20%는 빈곤층이며, 네팔 경제에서 해외 이주 노동자가 보내오는 돈은 국내총생산(GDP)의 27%를 차지한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네팔 청년(15~24세) 실업률은 20.82%에 달한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Z세대는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숙박업 등 소규모 창업을 해 SNS에서 홍보하거나 콘텐츠를 만들어 생계를 꾸려왔다. 따라서 SNS 차단은 해외에 있는 가족과 연결을 끊는 것은 물론, 외화를 벌어 생활하는 이들과 청년 창업자의 생존권까지 위협하는 조치다.
게다가 네팔 Z세대는 지난해부터 고위 정관계 인사들의 자녀인 ‘네포키즈(nepokids)’에 분노해왔다. 네팔판 ‘금수저’인 네포키즈는 사치품과 명품으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는 물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거나 유명 외제차 앞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과 영상을 SNS에 게시하며 부를 과시했다. 이에 네팔 Z세대는 그동안 SNS에서 반부패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왔다. 그러자 네팔 정부는 이를 막으려고 SNS를 단속하는 조치에 나섰다.
네팔 Z세대는 9월 8일부터 거리로 나서며 누적된 분노를 폭발했다. 이들이 수도 카트만두를 비롯해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실탄까지 사용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다. 격분한 이들은 대통령궁과 총리 관저, 국회의사당, 대법원, 검찰청 등은 물론, 전현직 장관과 유력 정치인의 집에도 불을 질렀다. 시위 사태가 갈수록 격화하자 샤르마 올리 네팔 총리가 사퇴했고, 정부는 SNS 사용 금지 조치도 철회했다. 서방 언론들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것은 SNS 사용 금지 조치를 계기로 부패한 정부를 향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이번 시위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주도했다. 이들은 네팔 국기를 흔들며 “SNS가 아닌 부패를 척결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사흘간 시위 사태로 최소 72명이 사망하고 2113명이 다쳤다. 결국 Z세대의 지지를 받아온 수실라 카르키 전 대법원장이 임시 총리로 임명돼 수습에 나서고 있다. 여성인 카르키 임시 총리는 2016년 7월부터 1년간 대법원장으로 일하면서 강단 있는 판결과 부패에 강경히 맞서는 모습을 보여 젊은 층에게 인정받았다. 카르키 임시 총리는 하원을 해산하고 내년 3월 5일 총선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방글라데시 국기를 든 시민들이 8월 5일 ‘7월 봉기’ 1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시작된 학생 시위는 반정부·반독재 투쟁으로 확대돼 당시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퇴진 후 인도로 망명했다. 뉴시스
평균 소득보다 10배 많은 의원 연봉
네팔 시위 사태에 앞서 2022년 7월엔 스리랑카에서 고타바야 라자팍사 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방글라데시에선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쫓겨났다. 스리랑카의 경우 라자팍사 대통령과 그 일가의 부패 및 실정으로 국가 부도 사태에 놓이자 젊은 층과 시민들이 대통령궁을 점령했고, 라자팍사 대통령은 해외로 도피했다. 라자팍사 대통령 가문은 2005년 이후 20년 동안 대통령과 총리 등을 배출했으며, 정부가 맺은 계약에서 수수료를 뜯어내는 등 재산을 축적해왔다.방글라데시에선 공무원 채용 시 실력보다 특정 집단에 혜택을 주는 할당제에 분노한 학생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경찰이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수백 명이 숨졌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까지 시위에 참가했다. 20년간 권좌를 지킨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는 결국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했다. ‘국부’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의 딸인 하시나 전 총리는 5연임을 하며 수도 다카 주변 노른자위 땅을 소유하는 등 부정 축재를 해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인도네시아에선 8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하원의원 580명이 지난해 9월부터 월 5000만 루피아(약 420만 원)에 달하는 주거 수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젊은 층이 주도하는 시위가 시작됐다. 하원이 이 수당을 올해 10월 이후 폐지한다고 밝혔음에도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동티모르에서도 전현직 국회의원들에게 새 차량과 평생 연금을 지급하려던 계획이 대학생들의 거센 항의 시위로 좌초됐다. 동티모르 의회는 9월 17일 국회의원 65명 전원에 대한 고급 도요타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지급 계획, 전직 의원의 연금을 평생 보장하는 법안을 모두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대학생들은 그동안 수도 딜리에 모여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2002년 독립한 인구 130만 명의 섬나라 동티모르는 고질적인 경제 실패·실업,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으며 인구의 40%가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국가다. 그럼에도 2023년 의원 연봉은 3만6000달러(약 5000만 원)로 국민 평균 소득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친중 정부 무너지자 당황하는 중국
이 5개국에서 벌어진 시위의 공통점은 Z세대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들 국가의 중위 연령을 보면 동티모르 20.8세, 네팔 25.3세, 방글라데시 26.0세, 인도네시아 30.4세, 스리랑카 33.3세다. 미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아시아 개도국들 Z세대의 분노에는 △청년 실업 △부를 독점한 정치 엘리트 △부패 문제가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청년(15~24세) 실업률은 스리랑카(22.3%)와 네팔(20.8%), 인도네시아(16%)가 모두 세계 평균(13.5%)을 웃돌았다. 방글라데시(11.46%)도 3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였다.이른바 젠지 혁명은 2010년대 초반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을 연상케 한다. SNS를 통한 여론 확산, 청년층이 주도한 저항, 부패한 기득권에 대한 분노 등이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랍의 봄이 독재 타도와 민주화라는 정치적 구호에 집중했다면, 젠지 혁명은 경제 불평등과 사회 부조리 해결이라는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요구를 내세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네팔은 물론, 스리랑카와 방글라데시가 모두 친중 성향의 국가라는 점에서 이들 국가의 정권 붕괴에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이 3개국은 중국이 추진하는 현대판 실크로드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에서 핵심 파트너 역할을 맡아왔다.
중국은 이 3개국의 정권교체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들 국가의 정권 붕괴로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시험대에 올랐다고 지적했다. 서방 전문가들은 이런 정치적 급변이 중국의 오랜 라이벌인 인도와 미국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젠지 혁명은 앞으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필리핀에서도 9월 21일 청년층을 중심으로 공공사업 비리 카르텔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202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청년 인구가 많고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 입장에서 젠지 혁명은 이제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