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5일 경기 수원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열린 ‘F-4 팬텀 퇴역식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F-4 팬텀 전투기가 이륙하고 있다. 뉴스1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가 가장 골머리를 앓은 점이 전투기 부족이다. 제아무리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라도 우크라이나에 당장 지원할 수 있는 전투기를 쌓아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애먹인 전투기 부족
결국 실제 전투기 지원은 개전 2년이 지난 2024년 여름에야 이뤄졌고 수량도 많지 않았다.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전투기를 제공한 것은 결과적으로 미국 덕이었다. 미국이 유럽 동맹국에 F-35A 전투기를 공급함으로써 구형 기종인 F-16A/B를 퇴역시킬 여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F-35A 공급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은 상황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가 우크라이나에 기증하기로 한 F-16A/B 80~90대는 2030년은 돼야 인도가 마무리될 전망이다.유럽이 예비용 전투기를 비축하지 않은 것은 탈냉전 이후 평화가 30년 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냉전 당시 유럽 각국 공군은 많게는 1000대 넘는 현역 전투기와 수백 대의 예비 기체를 보유했다. 하지만 지금은 유럽 주요 국가라도 공군 현역 기체가 많아 봐야 200대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독일이 보유한 전투기가 230여 대, 프랑스 190여 대, 영국 170여 대다. 심지어 유럽에는 전투기가 아예 없거나 전투기 10여 대가 공군 전력의 전부인 나라도 있다. 전쟁 날 일이 없다는 확신이 공군력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 각국은 전투기 전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미국 상황은 전혀 다르다. 미국은 대규모 전쟁에 대비해 몇 개 나라 공군력과 맞먹는 막대한 양의 전투기를 비축하고 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애리조나주 투손 사막에 조성한 ‘항공기의 무덤’ 아막(AMARC: Aerospace Maintenance and Regeneration Center)이다. 아막의 정식 명칭은 미 공군 제309항공우주 정비 및 재생 센터다. 해당 지역은 사막답게 비가 거의 오지 않고 습도가 낮은 데다 토양도 알칼리성이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미 공군 제309항공우주 정비 및 재생 센터(AMARC). 미국 공군 제공
미국은 사막에 퇴역 항공기 4000여 대 보관
덕분에 항공기를 노상 방치해도 녹이 잘 슬지 않는다. 미국은 이곳에 다양한 항공기를 4000대 이상 보관하고 있다. 그중에는 미군에서 완전히 퇴역한 기체는 물론, 지금도 현역으로 뛰는 F-15·16·F/A-18 같은 기종도 다수 있다. 이들 기체는 필요하면 복원 작업을 거쳐 현역에 재투입되거나 부품 공급용으로 사용된다. 우크라이나가 그토록 애걸한 F-16도 400대 가까이 보관돼 있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 안보 태세와 비용 부담을 이유로 단 1대의 전투기도 빼주지 않았다. 그만큼 예비전력을 중시하는 것이다.그렇다면 한국 상황은 어떨까. 현재 한국 공군이 보유한 전투기는 400대가 채 되지 않는다. 이들 전력은 전국 8개 공군기지에 분산 배치돼 있다. 이들 전투기가 유사시 북한 대구경 방사포와 탄도미사일, 드론의 최우선 공격 목표다. 각 공군기지에는 적 공습으로부터 항공기를 보호하기 위한 격납고가 있다. 하지만 탄도미사일 직격을 막아낼 수 있는 격납고는 없다. 가뜩이나 전투기가 부족한 상황에서 개전 초 북한 화력전에 자칫 그 수가 더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 공군에는 예비기라는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기가 퇴역하면 버리기 바쁘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은 전투기를 한 번 사면 지속적 성능 개량으로 수명을 연장해서 쓴다. 하지만 한국 공군은 이런 성능 개량과 수명 연장에 인색하다. 기체 수명에 한계가 왔음에도 대체 전력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제야 기골을 보강하고 부품을 교체한다. 전투기 부족을 타개할 대안으로 ‘기존 전력 보강’이 거론되면 공군에선 플랫폼 자체가 낡아서 비용 대비 효과가 떨어진다고 반박한다. 과연 그럴까.
경남 양산에 안보 전시물로 설치될 예정인 F-4E를 예로 들어보자. 지난해 한국 공군에서 전량 퇴역한 F-4E는 1980년대 도입됐다. 한국보다 먼저 동일 기종을 도입한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이 기체를 지금도 현역으로 쓰고 있다. 튀르키예는 ‘터미네이터 2020’ 프로젝트에 따라 F-4E 54대의 수명을 연장하고 레이더 등 내부 전자장비를 완전히 바꿨다. 그리스도 비슷한 시기 F-4E 성능 개량 사업을 진행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서방으로부터 지원받은 F-16 전투기를 첫 공개했다. 뉴시스
전쟁 나고 전투기 주문하면 종전 후 받아
튀르키예 공군의 ‘터미네이터 2020’ 프로젝트는 이스라엘 전투기 개량 사업을 참고해 200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레이더는 기계식 레이더 중 최고 성능을 지닌 EL/M-2032가 채택됐다. 이에 따라 임무 컴퓨터·조종계통·전자전 장비도 교체돼 미국산은 물론, 튀르키예가 만든 다양한 정밀유도무기의 운용이 가능해졌다. 수명 또한 대폭 늘어 튀르키예는 이 전투기를 2030년까지 쓸 예정이다. 그리스는 F-4E AUP(Avionics Upgrade Program)를 통해 F/A-18용 APG-65 레이더와 디지털 항공전자장비, 전자장비를 도입했다. 덕분에 ‘암람’ 같은 신형 공대공미사일뿐 아니라, 미국과 나토가 운용하는 항공기용 무장을 대부분 탑재할 수 있게 됐다. 그리스도 이 기종을 2030년까지 운용할 계획이다. F-4E 같은 구형 전투기도 대대적 개량만 하면 괜찮은 성능의 전력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한국도 1990년대 초반 F-4D/E 성능 개량을 추진했지만 무산된 바 있다. 문민정부 당시 율곡사업에 대한 대대적 감사와 수사로 여러 전력 증강 사업이 취소됐다. 이 과정에서 F-4 전투기 성능 개량도 비용 대비 효과가 적은 ‘예산 낭비’로 지적돼 전면 취소됐다. 이후 30년 동안 한국 공군 F-4는 이렇다 할 성능 개량 없이 1970년대 장비와 무장을 유지했다.
F-5 시리즈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은 1970년대 초반 F-5 시리즈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이 중 주력은 F-5E/F 모델로, 개발도상국 수출용 염가형 전투기였다. 레이더 탐지거리가 30~40㎞에 불과하고 가시거리 밖 공대공 교전은 불가능하다. 한국은 F-5E/F를 1970년대 사양 그대로 운용하며 이렇다 할 개량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60여 대를 최초 사양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퇴역한 기체는 해체되거나 지자체, 학교에 기증돼 전시용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과 같은 시기에 F-5E/F를 도입한 브라질은 2001년 대대적으로 성능을 개량했다. 대당 620만 달러(약 86억6000만 원)가 들어간 개량 덕에 기체 수명이 늘어났고, 신형 레이더와 디지털 전자장비, 항법장비, 공중급유장비와의 데이터링크 시스템 등이 추가됐다. 대대적인 개량을 거친 브라질 F-5 전투기는 이보다 신형인 프랑스 공군 미라주 2000 전투기를 모의 공중전에서 제압하기도 했다. 당시 브라질 F-5 전투기는 조기경보기가 수백㎞ 밖에서 탐지한 미라주 2000 정보를 데이터링크로 수신해 ‘더비’ 중거리공대공미사일을 발사했다. 한 세대 나중에 나온 신형 전투기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요즘은 전투기 1대에 1500억~2000억 원이 우스운 세상이다. 제조 과정도 복잡해 전투기를 주문하면 짧아도 3년, 길게는 7년을 기다려야 초도 물량이 출고된다. 만약 전쟁이 터지고 전투기를 잃은 다음에 새 전투기를 주문하면 종전 이후에야 받기 십상이다. F-16V, F-15EX 등 최고급 부품이 들어가는 기체처럼 대당 수백억 원 수준의 개량을 하자는 게 아니다. 당장 현대전 수행이 어려운 ‘퇴물 플랫폼’에 적당한 성능의 레이더·통신장비·컴퓨터를 붙이고 수명을 연장하는 데는 대당 100억~200억 원이면 충분하다. 이 정도면 개전 초 현역 기체 대량 손실에 따른 전력 공백을 빠르게 메울 수 있는 예비용 전투기가 대랑 확보된다.
“공군력 세계 1위는 미 공군, 2위는 미 해군 항공 전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 공군력은 세계 최강이다. 그런 미국조차 전투기를 마르고 닳도록 개량해 쓰고, 퇴역 전투기마저 애지중지한다. 한국은 전투기가 부족하고 개전 초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함에도 성능 개량이나 수명 연장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