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서 중국 유학생이 연루된 집단 토익 부정 응시사건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현지 수사기관은 중국 본토와도 연결된 조직적 범행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교토대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중국 유학생 왕씨는 토익시험에 대리 응시한 혐의로 현행 체포됐습니다. 왕씨는 마스크 안쪽에 소형 마이크와 전자기기가 내장된 스마트 글라스 등을 소지, 정답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당시 왕씨가 체포된 직후 공교롭게도 해당 시험장 응시생의 약 30%는 시험을 중도포기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사건 후에도 도쿄시내 한 수험장에서 동일 주소로 시험을 신청한 응시자가 100여명 확인되는 등 부정시험이 만연한 정황은 계속 드러났습니다. 지난 7일 시험 주관사측은 최근 2년여간 치러진 시험에서 800명 넘는 인원이 체포된 왕씨와 같은 주소로 응시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이 일본에서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건 한국처럼 일본도 토익시험이 자국내에서 갖는 인지도와 영향력이 상당히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토익은 비영어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미국 ETS가 개발한 시험입니다. ETS는 토익이 160개국에서 시행 중인 시험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사실상 한국과 일본을 뺀 다른 나라들에서는 인지도나 활용도가 낮습니다.
지난해 토익 전세계 응시자수는 약 323만명이었는데, 한국 50%(약 161만 명), 일본 30% (약 97만 명)로 매년 한일 양국에서 응시하는 비중이 80%가량을 차지합니다. 토익이 글로벌 시험이라고 보다 로컬 시험 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입니다.
한국, 일본과 비슷할 것 같지만 중국에서 토익의 존재감은 미미합니다. 대학 졸업 요건으로 영어검정성적을 요구하더라도 중국내 시험이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취업관련은 토익을 제출하면 되기도 하지만 다른시험에 비해 응시료가 턱없이 비싸고 시험장도 적어 선택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예를들어 중국에서 토익 응시료(독해와 청해)는 회당 808위안으로 한화로 15만원이 훌쩍 넘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유학 준비생 이라면 당연히 토플이나 아이엘츠를 주로 봅니다.
결국 중국학생들중 토익 시험을 응시하려한다면 대부분 한국이나 일본 대학진학, 또는 취업을 생각하는 경우 입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장소와 시간상 시험응시기회가 자주 있고 규제도 더 느슨한 일본에서 응시하게 되는 겁니다.
대리시험을 알선하는 한 업체는 “토익 대리시험은 일본에서만 한다”고 설명하면서 그 이유로 “중국보다 규제가 느슨하고, 실력 있는 선생님도 있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알선업자들은 보통 부정시험 방법으로 대리시험 또는 통신장치를 통한 교신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대리시험 가격은 5.9만 위안(약 1100만원), 이어폰 등을 통한 교신 방식 컨닝은 2.9만 위안(약 550만원)수준에서 가격이 형성돼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의뢰비 절반을 선불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시험 결과 발표 후 지불하게 됩니다.
통신 교신 방식은 의뢰인이 직접 시험장에 가서 시험을 치러야 하므로 부담과 리스크가 커 ‘사전강의’도 진행됩니다.
이 같은 범행수법과 조건들은 조사결과 지난 5월 중국인 왕씨의 대리시험 사건에 대한 수사당국의 조사결과와 일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왕씨 사건의 경우 대리시험 의뢰 목적이 일본 대학원 입시 활용 이었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근래 중국의 높은 청년실업률과 맞물려 일본 대학에 진학하는 중국인들이 급증한 것도 토익 부정 사건과 연관이 깊어 보입니다. 일본 대학과 대학원에서 입시에 토익점수를 활용하는 곳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현재 미대 등 일본 예술계 대학에 유학중인 중국 학생들의 비중은 전체 외국인의 70%에 달합니다.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대에서도 대학원의 경우 전체 학생 5명 중 1명은 중국 유학생 입니다.
중국에서는 시험 부정이 이미 산업화 단계에 진입한 수준 이라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미국에 거주 중인 중국 출신 풍자만화가 왕리밍(王立銘)지난 5일 뉴스위크에 글을 올려 “돈만 내면 시험 대리응시는 물론 수업 출석, 과제와 논문 제출까지 대행해 주는 업체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2022년 광저우에 있는 한 통신대학에서 치러진 기말시험에서는 전체 응시자 2831명 중 70%가 넘는 2093명이 대리시험을 치른 것으로 조사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왕리밍에 따르면 시험 부정은 종류를 가리지 않습니다. 각종 점수나 인증시험은 물론 운전면허, 공무원, 의사 자격, 심지어 중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으며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대학입시시험 ‘가오카오’(高考)에서도 부정이 존재합니다.
사용되는 장비 역시 기상천외합니다. 펜촉에 적외선 센서를 탑재해 영단어를 자동으로 번역해주는 특수펜, 정답 수신 기능이 있는 자, 옆자리나 뒷자리 답안을 확인할 수 있는 특수 안경 등 다양한 도구들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도 부정행위를 막기위해 2015년부터 시험부정에 대한 법적 처벌을 강화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왕리밍은 “그럼에도 2024년 4월까지 이전 10년간 적발된 부정행위 건수가 4000건을 넘고 연루된 인원도 1만 명을 훌쩍 넘는다” 며 “이번에 일본에서 발각된 토익 부정은 중국에서라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중국 학생들이 토익 시험 등을 부정하게 치르는 배경에는 중국 사회 특유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농촌 출신으로 도쿄에서 거주중인 한 30대 중국 여성은 마이니치신문에 “내가 만약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태어났더라면 일본에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도시와 농촌 출신을 구분하는 ‘후커우(戶口)’ 제도가 강력해 결과적으로 출신에 따라 교육, 취업, 사회적 기회 전반에서 극명한 차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여성은 자신이 주요 도시출신이 아니라 진학과 취업 등 다방면에서 차별받아온 상황에 대해 하소연 한 겁니다.
여기에 ‘훙얼다이’(紅二代·혁명원로 2세대) 같은 사회적 특권을 공인받는 계층와 금력·인맥을 앞세운 이들까지 더해져, 평범한 청년들에겐 공정한 경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돼 왔습니다.
도쿄대에서 현대 중국을 연구중인 아코 도모코 교수는 “특권층 중엔 중국에 있을때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을 수 있고, 특권층이 아닌 경우라면 중국의 불평등한 시스템 속에서 애초에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고 느끼다보니 부정행위를 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번 일본에서의 토익 부정사건은 중국 유학생의 사례로 부각되긴 했지만, 시험 부정문제는 중국인에게 국한되는 건 아닙니다.
추가적으로 적발되고 있는 토익부정사건 연루 응시생들중에는 중국뿐 아니라 일본 포함 다른 나라 국적 학생들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입니다.
토익 시험만 해도 한국에서도 내국인 또는 외국인이 연루된 대리시험 등 부정행위는 꾸준히 적발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말 일본에서 실시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어 능력 측정 시험에서는 베트남 국적 응시생 2명이 대리시험을 치른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험 결과는 외국인들의 일본 체류 자격 신청에 활용되는데, 이들은 유리한 체류자격을 위해 대리응시를 시도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3년 전에는 간사이 전력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직원이 자사 채용시험에서 웹테스트 대리응시를 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도 발생한 바 있습니다.
일본 시험개발회사 서티파이에 따르면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온라인으로 취업시험을 치렀던 응시자의 45%가 “어떤 형태로든 부정행위를 했다”고 응답했습니다.
보편화 되고 있는 생성형 AI를 사용하거나 그룹 채팅을 통해 집단으로 문제를 푸는 사례들은 국적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시험 응시자들의 편의성이 향상되고 기회가 확대되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부정행위의 물리, 심리적 장벽이 더 낮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국적 또는 국경불문 시험의 공정성과 결과의 타당성 확보문제는 앞으로 더욱 중요한 화두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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