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에 이란 강경파 무장 세력의 자금세탁을 도운 혐의를 받는 회사가 있었다. 30대 외국인이 국내에 설립·등기한 A법인은 2022년 미 재무부로부터 IRGC(이슬람 혁명수비대) 자금세탁에 관여한 혐의로 제재 명단에 올랐다. 국내에선 2년 연속 감사의견 거절을 받았지만 한동안 주소를 바꾸며 법인을 유지하다 폐업했다. 기자가 제재 발표가 있던 해에 명패도 없는 새 주소지를 파악해 찾아가보니 A법인은 입주 중이었다.
IRGC는 2021년 한국 국적 유조선을 나포했던 단체다. 제재가 없었다면 굳이 서울을 거점으로 자금세탁 네트워크를 돌리거나 선박 나포에 나설 유인은 약했을 수 있다. 이란은 불법 핵개발을 이유로 제재를 받고 있다.
제재의 당위가 아니라, 제재에 따라 우회경로가 생기고 돌발사건이 벌어지는 풍선효과를 말하려는 것이다. 최근 미국과 영국은 캄보디아 기반 사이버범죄 네트워크를 대규모 제재했다. 정의 구현을 위한 중대 절차이겠지만 유사 범죄도 근절될지 미지수다. 한때 마약시장을 주름잡던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이 소탕됐어도 마약 유통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공백을 대체하는 새로운 세력이 범죄의 세계에도 나타나곤 한다. 보다 음성적인 방식의 범죄·돈세탁을 우려하는 건 기우일까.
한국은 돈세탁 청정지대가 아니다.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이 관세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8월까지 외국인 가상자산 환치기 적발액은 3조7000억원에 달했다. FIU(금융정보분석원)에 따르면 국내 가상자산 의심거래는 2025년 1~8월 3만6684건으로 직전 2년치를 넘어섰다.
돈세탁은 일정선을 넘으면 시장을 뒤흔든다. IMF(국제통화기금) 연구에 따르면 FATF(국제자금세탁방지구)로부터 그레이리스트(강화된 관찰대상국)에 등재된 국가는 자본유입이 GDP(국내총생산) 대비 평균 7.6%p 감소했다. 돈세탁 경유지들이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받는 것이다.
불법 자금이 국내 금융망을 거치는 규모가 늘수록 한국 시장도 의심을 받는다. 대규모 제재가 발표되면 불법 자금의 다음 경로를 미리 점검하고 차단 강도를 높여야 한다. 허위 송장뿐 아니라 코인·텔레그램 등 새로운 통로까지 동시에 막는 일에 범정부적 역량이 집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