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과 채무가 동시에 있는 사람이 추심명령, 체납 처분 등으로 채권이 압류된 경우에도 채무자를 상대로 소송을 낼 자격을 잃지 않는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이 나왔다. 기존에는 채무자가 어디에 돈을 갚아야 하는지 애매해 법적 안정성을 해친다는 등의 이유로 소송을 낼 자격이 없다는 판례가 유지돼 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원장 조희대)는 23일 A건설사가 B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B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앞서 A사가 B씨를 상대로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과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원심은 "B씨가 A사에 3911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후 해당 금원에 대해 A사의 제3자 채권자인 C사가 압류·추심명령을 받아냈고 세무당국도 체납액 징수를 위해 압류했다. 이에 재판과정에서 B씨는 A사가 소송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이처럼 채무자의 제3채무자에 대한 채권에 추심명령이 있으면 채무자는 해당 채권에 관한 이행의 소를 제기할 당사자 적격을 잃는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번에 A사의 당사자 적격을 소멸시키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2명의 대법관은 "추심명령은 추심권능 부여에 그칠 뿐 채권이 이전·귀속되는 것은 아니며, 채무자의 소 제기 자체를 금지하는 명문 규정이 없다"고 밝혔다.
압류·추심은 '먼저 받아갈 권한'만 주는 것이지, 돈의 주인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에 A사가 돈 달라고 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는 취지다.
또 추심 채권자는 공동소송참가 등으로 관여할 수 있고, 제3채무자는 공탁 등으로 이중변제를 피할 수 있어 이해관계인에게 부당한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고 봤다. 소송이 진행된 뒤 압류를 이유로 소를 각하하면 분쟁의 일회적 해결과 소송경제에 반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B씨가 돈을 줘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헷갈리면 법원에 돈을 맡겨두는 공탁 제도를 활용하면 되고 한 번에 분쟁을 끝내고 시간·돈을 아낄 수 있다는 뜻이다.
대법원은 "명확한 법률적 근거 없이 추심명령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채무자가 당사자적격을 상실한다고 봤던 종전 판례를 폐기하고, 당사자들인 추심 채권자, 채무자, 제3채무자에게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으면서도 분쟁의 일회적 해결과 소송경제를 도모할 수 있고 추심채권자의 의사에도 부합하는 추심명령 관련 실무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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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노태악 대법관은 압류한 사람(추심 채권자) 권리가 약해지고, 실무·법적 안정성이 흔들린다고 보고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냈다. 노 대법관은 "소송경제 측면에서 난점이 있더라도 오랜 기간 실무상 확립돼 온 판례 법리를 변경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추심명령이 있더라도 채무자가 이행의 소를 제기할 당사자 적격을 유지한다고 보면 추심채권자의 추심 권능에 중대한 제약이 초래되므로 추심 채권자의 권리 실현을 최대한 보장하고자 하는 민사집행법 취지에 반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채무자가 당사자 적격을 상실한다고 보더라도 추심 채권자가 당사자 적격을 승계하므로 추심 채권자는 승계참가를 할 수 있고, 제3채무자도 추심 채권자에게 소송을 인수하게 할 것을 법원에 신청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