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명예훼손죄 없는 대신 징벌적 손배
보도 위축 막기 위한 섬세한 입법 요구돼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당대표가 20일 국회에서 열린 언론개혁특별위원회 허위조작정보 근절안 발표 기자회견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여당이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을 통해 악의적 허위보도를 한 언론에 최대 5배의 손해액을 배상하도록 하는 배액 손해배상제(손배제) 도입을 추진하는 것을 두고, 사실상 ‘이중 처벌’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국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해서도 형사 처벌을 하고 있는데, 민사 책임까지 징벌적 손배를 도입하는 것이 이중 처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3일 취재를 종합하면, 더불어민주당이 발표한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은 ‘불법정보’와 ‘허위조작정보’에 해당하는 콘텐츠의 온라인 유통을 금지하며, 이를 유포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는 손해액의 최대 5배를 배상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미 한국은 현행법으로 명예훼손죄를 무겁게 처벌하고 있다. 형법상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며, 신문과 잡지 등 출판물은 7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 벌금으로 형량이 더 높다.
온라인 뉴스와 유튜브에는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죄가 적용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방 목적’을 가지고 온라인상에 사실 혹은 거짓된 내용을 올려 명예를 훼손하면 처벌받는다. 사실 적시일 경우 최대 징역 3년, 허위사실일 경우 최대 징역 7년까지 처벌 가능하다.
이에 따라 정치인이나 기업 등 권력자에 대한 비판 보도를 한 언론이 고소·고발에 휘말리는 일도 흔했다. 윤석열 정부 검찰은 2022년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를 검증 보도한 언론사와 기자들을 ‘윤석열 명예훼손 혐의’로 대거 수사했다. 언론사 사무실과 기자 자택에 대한 전방위적 압수수색이 이어졌고, 취재원도 수사 대상이 됐다. 손지원 커뮤니케이션법연구소 대표(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도 처벌하는 상황에 언론에 대한 제재를 가중하는 엄벌주의는 언론의 자유를 굉장히 위축시킬 수 있다”며 “한정적인 불법행위에만 도입돼 있는 징벌적 손배제를 언론이라는 특수한 분야에 도입하려는 건 무리한 시도”라고 말했다.
징벌적 손배제의 원조격인 미국에는 명예훼손 처벌법이 없다. 대신 가해자의 악의적인 불법행위를 응징하는 차원에서 실제 발생한 손해 이상을 배상하도록 하도록 하는 판례가 축적됐다. 미국에서도 민사 배상에 형벌 기능을 넣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지만, 처벌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지난달 발간한 ‘해외 주요국의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에 따르면 징벌적 손배제가 존재하는 나라 중 영국과 호주는 언론 적용을 엄격히 제한한다. 유럽연합(EU)도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제가 없다.
시민사회와 법조계는 명예훼손죄가 존재하는데 배액배상제까지 도입하는 것은 보도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미국은 형사상 명예훼손죄가 없는 대신 민사 판례를 통해 징벌적 손배가 이뤄지고 있다”며 “한국의 경우 기존의 형사 처벌 제도에 더해 민사에 징벌적 손배까지 도입하면 사실상 이중 처벌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고 밝혔다.
입법 과정에서 보도 위축을 막기 위한 조치가 보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고민수 강릉원주대 법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법원에서 먼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액을 인정한 뒤에 징벌적 손배를 인용한다”며 “여당이 추진하는 법안이 이런 절차를 포함하는지,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을 위반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지 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같은 방안을 담은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연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예정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등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추가 개혁 과제도 추진한다고 밝혔지만, 아직 구체적인 안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