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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내 머릿속의 오케스트라

2025.10.22 21:17 입력 2025.10.22 21:20 수정 유재연 국가AI전략위원회 사회분과장

“우유 하나 사 와. 아, 달걀 있으면 여섯 개 사 와”라는 아내의 말을 들은 남편이, 달걀이 있는 슈퍼마켓에서 우유 여섯 통을 사 갔다는 우스개가 있다. 프로그래밍을 하다 보면, ‘만약 …하면’이라는 조건절을 많이 쓰는데, ‘달걀이 있으면’을 일종의 조건절로 받아들이며 생긴 어느 개발자의 경험담으로 구전돼온 얘기다. 다양하게 변주되기도 한다. 아이의 이유식 재료와 명절 선물, 생활 잡화를 몇가지 주문받고 깔끔하게 미션을 완수했다는 식의 경험담은 손쉽게 SNS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이런 사연을 은근히 즐기곤 했다. ‘우리, 개발 좀 아는 사람들끼리는 무척 공감하는’ 담론이라는 식의, 조금은 우쭐함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불편함을 느끼게 된 것은 인공지능(AI)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즉 하나의 에이전트가 다른 에이전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보던 어느 날이었다. 하나의 큰 과업을 해내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작은 문제들은 매우 많다. 목표 달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쪼개고, 우선순위를 두고, 자원을 배분하고 지시하는 모든 과정이 일상 속 어느 장면들과 닮았다는 걸 깨닫던 그 순간이었다.

책임을 지고, 일을 어떻게든 끝까지 해내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머리뿐 아니라 마음도, 시간도 다 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한 곡을 완벽한 연주로 만들어내려면 원곡을 철저히 이해하고 해석하며, 각 세션의 연주자와 긴밀히 소통하고, 그들의 기량과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설득과 조율을 거듭해야 한다. 이러한 조정의 메커니즘을 ‘오케스트레이션’이라고 하는데, 실제 AI 업계에서도 널리 쓰이는 개념이다.

이는 많은 스타트업 대표를 비롯해 다양한 조직의 책임자들이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가사와 육아, 돌봄을 맡은 사람들의 일이기도 하다. 가사만 해도 그렇다. 냉장고 안에 무엇이 있고 어떤 것이 가장 빠르게 상하는지, 이 재료를 가지고 주어진 저녁 준비 시간 30분 안에 후다닥 만들 수 있는 끼니는 무엇인지, 집 안에 걸어둔 빨래에 냄새가 배지 않으려면 어떤 메뉴가 나은지, 휴지는 언제쯤 떨어지는지, 어린이집 방학은 언제인지 등 기억하고 조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 인지적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냉장고 패널에는 식재료 상황이 나타나고 유치원 알림장은 스마트폰에 꼬박꼬박 알람을 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통합적으로 관리되려면, 여전히 누군가의 ‘머리’는 끊임없이 가동돼야 한다.

다만 지휘자 혼자 악보를 외워서는 좋은 연주가 나오지 않듯, 목표와 맥락을 스스로 이해하려는 구성원들의 노력도 분명 필요하다. 결국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기술이 아니라 연주자 모두가 같은 곡을 이해하고 함께 호흡하려는 의지에서 완성되는 것이니 말이다. AI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이 현시점에서 퍽 잘 작동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맥락적 정보를 토대로 각 구성요소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제 AI는 달걀이 있다고 해서 우유 여섯 통을 사 오지는 않는다. 기술은 점점 맥락을 학습해가는데, 인간은 갈수록 그 맥락을, 그리고 맥락을 이해하려는 책임감과 의지를 점차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유재연 국가AI전략위원회 사회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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