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년 음력 8월 마지막 날,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에 사는 김령은 멀리 담양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해 초 예안현감으로 재직한 나무송이 보낸 편지였다. 그는 갑자기 파직을 당해 고향 담양으로 돌아간 후, 현감 시절 친분이 깊었던 김령에게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전했다. 김령도 지역 송사를 잘 처리했던 나무송의 파직이 의아한 터였다.
나무송이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던 1631년 봄, 예안현에서는 소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워낙 작은 고을이어서 외지에서 온 도둑이 아니라면 범인은 쉽게 잡힐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난당한 소는 흰 점이 뚜렷해서, 예안현 내에 있는 소를 조사해 찾으면 일은 쉽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송의 적극적인 수사에도 한동안 흰 점이 있는 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
고을 내에 새로 소를 구한 집이 있기는 했다. 김시익이라는 사람의 여종과 그의 남편이 소를 새로 구했다면서 관아에 고하고, 그 사실에 대한 입안(立案·어떤 사실에 대한 내용 증명)까지 마쳤다. 그 소는 합법적으로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소를 도둑맞은 주인은 확인이 필요했다. 자신이 도둑맞은 시점에 새로 소를 구한 집이니, 지푸라기 잡는 마음으로 그 소를 살핀 듯했다. 그런데 흰 점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소를 키운 주인 눈에 그 소는 매우 낯이 익었다. 소 주인 말을 들은 나무송은 그 소를 현청으로 끌고 오게 했고, 흰 점이 있었던 부분을 물로 씻어냈다. 그러자 감추어졌던 흰 점이 드러났고, 치밀하게 준비된 소도둑 사건도 해결되었다.
나무송은 소를 훔친 자들을 옥에 가두고, 이들을 심문해 형을 확정했다. 경상감영에 보고할 때까지 장물인 소는 일단 관아에 잡아두기로 했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그는 소 주인에게 소를 돌려주었고, 소 주인 역시 현감의 처사에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현감의 현명한 처사는 고을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뒤 나무송은 이 송사를 이유로 파직되었다. 평소 나무송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헌부 관원이 송사 과정에서 소를 관아에 잡아두었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했기 때문이다. 백성의 소를 사사로이 관아에 가두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소송 심리 중에 소를 풀어줄 수 없다는 상식적인 나무송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헌부 관원은 백성의 소를 관아에 잡아두었다는 사실만 집요하게 공격했고, 그 결과는 나무송의 파직이었다. 김령의 표현대로 정말 ‘헛웃음 날 일’이었다(김령, <계암일록>).
나무송의 편지에는 억울함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러나 범죄를 감찰하고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헌부 관료의 힘은 막강했다. 아무리 그래도 심리 중 소를 잠시 가둔 일을 가지고 탄핵할 수 있을까 싶지만, 감찰권을 가진 사헌부 권력은 1%의 허물을 가지고 99% 잘한 일을 덮을 수 있었다. 단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어느 시대나 범죄를 소명하고 처벌을 요청하는 권한은 강력할 수밖에 없다. 범죄를 상대해야 하는 칼은 날카로울수록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잘한 일이 아니라 1%의 허물에 맞추어지기 마련이고, 그것만으로 칭찬받아 마땅할 지방관도 탐관오리로 만들 수 있었다. 특히 그들 눈에 사적 감정이라는 색안경까지 더해지면, 소를 잠시 잡아둔 것만으로 파직이라는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조선시대 사헌부의 감찰권은 2025년 오늘 검찰에 주어져 있다. 그러나 민주화된 우리 시대 검찰은 오히려 1%의 허물이 없어도 그들이 원하는 만큼 처벌을 만들 수 있고, 심지어 유감없이 그 힘을 행사하기도 했다. 나무송의 억울함이 조선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