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송을 통해 ‘인간의 혀는 생고기 맛을 느낄 수 없다’는 주제가 잠시 주목을 받았다. 어느 요리사가 “생고기의 단백질 분자는 인간의 미뢰가 느낄 수 있는 분자 크기보다 커서 우리가 그 맛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했고, 거기에 수많은 미식가와 요리사들이 소셜미디어로 한마디씩 보태며 소란스러워지는 일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육회는 달콤한 배와 양념에 먹고, ‘육사시미’라고 부르는 생육은 알싸한 마늘을 섞은 양념을 곁들이니 참 그럴 법도 하다 하고 말면 될 일이었는데, ‘생고기도 숙성과 부위에 따라 맛이 다르다’든지, ‘구운 고기도 결국엔 소금을 뿌려야 맛이 난다’든지 하는 댓글들을 보며 영상을 한번 찾아봐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한참을 미루다 며칠 전에야 찾아보고 적잖은 실망을 했다. 재미난 이야기를 잔뜩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딱 그 두 문장만 나오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다. 방송의 요리 얘기가 대개 그렇다.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기 위한 대중음악의 ‘후크’ 정도로 쓰고 만다. 한동안 요리 방송의 모두가 고기를 구우며 ‘마이야르 반응’을 이야기했다. 양식 셰프가 나와 던지는 ‘당류와 아미노 화합물들의 화학반응으로 단백질의 감칠맛을 활성화한다’는 대본도 이제는 신물이 났는지, 구운 고기 대신 생고기 이야기를 방송 담당자가 슬쩍 던져본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의 의도대로 된 것인지, 아니면 시끄러운 댓글들 때문인지 한번 정확한 내용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짧은 영상도 미루고 미뤄 한 달을 걸려 보는데, 사전이나 기사를 찾아보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생고기 영상과 댓글들을 잔뜩 곱씹은 덕인지 생고기가 당겼다. 밥에 올려 비벼 먹는 육회비빔밥도 맛있고, 갓 도축한 소의 생육을 장에 찍어 오물오물하는 것도 역시 먹을 맛이 난다. 거기에 막걸리 한 모금 꿀꺽 넘기면 입안으로 소의 피 맛이 돌며 마치 내게 대단한 남성성이나 생기는 듯 기분이 묘해지기도 한다.
막걸리나 소주가 없는 서양에도 날고기를 먹는 문화는 있다. 프랑스 요리에는 스테이크 타르타르가 있다. 다진 소고기나 말고기를 다진 양파 등을 넣고 겨자와 달걀노른자에 비벼 먹는다. 그리고 그 고기를 좀 더 곱게 갈아 마요네즈 등을 더하면 벨기에의 ‘필레 아메리캥’이라는 오묘한 질감의 요리가 되기도 한다.
양식 중 가장 친숙한 이탈리아 요리에도 생고기 메뉴가 있다. 1950~1960년대 베니스의 한 식당이 원조라고 알려져 있다. 주치의로부터 고기를 생으로 먹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은 어느 백작 부인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라 한다. 그리고 이 음식의 개발자는 1400년대 말~1500년대 초 활동한 화가 비토레 카르파초 그림의 붉은 물감이 생고기의 빛깔과 닮아 카르파초라는 이름을 정했다고 하는데, 대단한 사료는 없기에 ‘믿거나 말거나’다.
어쨌든 구운 고기는 맛있고, 생고기도 그 나름의 맛이 있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야 날로 먹든 구워 먹든 상관없고, 한 점이라도 더 먹을 생각뿐이다.
박준우 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