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 유가족 등이 27일 건설의 날 기념식이 열린 서울 강남구 건설회관 앞에서 안전한 건설 현장을 위한 손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버지는 안전모조차 지급받지 못했고, 현장에는 추락을 막기 위한 안전난간도 없었습니다. 30년 넘게 현장을 지켜온 숙련된 노동자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됐습니다. 그런 죽음 앞에서 회사는 단 한번의 진심 어린 사과도, 유가족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우종합건설 산재 피해자 고 문유식씨의 딸 문혜연씨는 ‘2025 건설의 날 기념행사’가 열린 27일 서울 강남구 건설회관 앞에서 유가족과 5대 종교계가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건설의 날은 단지 산업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죽음을 기억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실질적인 대책을 다짐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며 건설 현장 안전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인천공항 터미널 매장에서 공사용 가설물인 비계를 설치하다 추락사한 건설노동자 고 이재현씨의 딸 이성민씨는 “사고 직후 병원에 온 남부건설 대표는 안전의무를 다하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아버지에게 책임을 돌렸다”며 “원청과 하청은 여전히 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본적인 안전의무조차 지키지 않고 법망을 찾을 꼼수만 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건설노동자 고 강대규씨의 딸 강효진씨는 “‘세계건설 강국’이라 말하는 그 뒤에 숨어있는‘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과 불법 하도급, 구조적 문제를 그저 눈 감고 남 탓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절대 없는 일이 될 수 없다”면서 “맡은 자리의 책임과 최선을 다해 노동자의 안전을 지켜내 퇴근하지 못하는 이가 생기지 않는 그때 세계건설 강국이라 말하시라”고 했다.
지난해 건설 산재 사고 재해자 수는 3만4370여명, 사망자 수는 496명에 달한다. 올해 상반기 기준 전체 산재 사고 사망자 287명 중 절반가량(138명)이 건설업에서 발생했다.
참가자들은 건설 산재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으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조계종·성공회·원불교·천주교·기독교 등 5대 종단 종교인들도 참석해 추모와 위로를 전하고,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안전한 일터를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강현욱 원불교인권위원회 교무는 “모든 사고는 ‘운’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관리의 방기, 원청의 무책임, 하도급 구조의 희생이 낳은 사회적 참사”라며 “죽음 위에 세워진 건물을 ‘국가의 자랑’이라 부를 수 있냐”고 했다.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인 김훈 작가는 서면을 통해 “이윤은 대기업으로 들어갔고, 책임은 하청 라인의 밑바닥으로 내려갔고, 죽음과 고통은 노동자에게 전가됐다”며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건축 구조물을 쌓아 올리는 방식의 경영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참가자들은 이날 건설의 날 행사에 참석한 국무총리와 국토교통부 장관, 건설단체 회장 등에 ‘안전한 건설현장을 위한 제안을 담은 요구서’를 직접 전달하려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제안서에는 안전한 건설현장 만들기를 위한 피해자·종교계·노사정·시민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체’ 구성, ‘건설의 날’을 ‘건설 안전의 날’로 명칭 변경, 건설현장 산재를 실질적으로 근절하기 위한 대책 마련과 지속적 시행, 건설의 날 기념행사에 산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묵념’ 순서 배치 등의 방안이 담겼다.
이날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도 같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설산업과 건설노동자를 살리는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