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닦고(修) 가문을 가지런하게 하며(齊) 나라를 다스리고(治) 천하를 태평케 한다(平)”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 동사(修·齊·治·平)에는 모두 ‘공평무사하게 하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
공평무사하게 한다는 말을 달리하면 ‘공정하게 한다’이다. 공정함이 개인부터 국가, 세계 차원에 이르기까지 기본이자 궁극의 가치로 제시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다. 공정은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이자 시대정신이다. 그렇다 보니 정치인들은 상대를 공격할 때면 줄곧 공정을 들고나오곤 한다. 공정치 못하다는 지적이 그만큼 대중에게 먹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평무사, 즉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사사롭지 않다”는 공정이 웬일인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공정을 내세우지만 속으론 공정을 불편해하기에, 공정한 나라를 부르대지만 행실은 불공정을 일삼기에 그럴 수도 있다. 공정이란 가치를 앞세웠지만 실제론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우선하기에 그렇기도 하다. 객관적, 이성적 차원이 아니라 주관적, 감정적 차원에서 공정을 거론하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 공정의 토대가 부실함을 일러준다.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장자가 제자들과 산속을 걷다가 이리저리 뒤틀린 채 오랜 세월을 산 나무를 보았다. 그는 “목재로는 도통 쓸모가 없었던 덕분에 이 나무는 장수할 수 있었구나!” 하며 탄식했다. 인간의 이해관계에 입각하면 쓸모없는 나무이지만, 나무로서는 인간에게 쓸모없는 덕분에 오래 살 수 있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인간들에게도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나무가 오래 사는 걸 부러워해야 할 터인데, 사람들은 도리어 쓸모가 없다며 욕하고 만다. 나무에게는 오래 살아 좋은 일을 두고, 사람 입장에서 쓸모없다고 폄훼했음이니 그야말로 불공정한 처사 아니겠는가?
공정은 이처럼 어느 일방의 가치 기준만으로는 주장할 수 없다. 적어도 상대의 가치 기준을 아우르는 토대 위에서라도 공정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공정을 중시한다고 자처한다면 자신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
좁은 시야로 공평무사함을 따짐은 애초부터 마음에 맞는 것만을 공정이라 우길 심산이었던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