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창업 회장이 조선소를 짓는 자금을 구하러 1971년 영국 최대 은행 바클레이스를 찾았다. 기술력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기업에 누가 선뜻 돈을 내놓겠는가. 정 회장은 퇴짜를 맞고 이 은행에 영향력이 있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의 롱보텀 회장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그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 회장은 호주머니에서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세계 최초 철갑선을 만든 나라”의 잠재력을 설명했다. ‘거북선 설득’에 그는 추천서를 써줬고 조선소 건설의 물꼬가 트였다.
대한민국 산업의 역사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제철소·조선소 짓고, 자동차와 첨단 반도체를 만들겠다고 할 때마다 “미친 짓” “과대망상증” 같은 조롱을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산업들이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중국의 기술 굴기에 우리 산업경쟁력은 위협받고 있다. 특히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시작된 ‘관세전쟁’으로 철강·자동차·반도체 수출은 직격탄을 맞았다.
다음달 1일까지 대미 관세 협상을 마무리 짓지 못하면 한국은 25%의 상호관세를 맞는다. 일본과 EU는 앞서 상호관세를 15%로 낮춰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더욱 다급하게 됐다. 이들은 미국산 에너지 등을 대량 구매하고 5500억달러(일본)~6000억달러(EU)의 투자액을 제시해 돈으로 관세 인하를 샀다.
벼랑 위에 선 한국 정부가 조선업을 관세 협상 승부수로 띄웠다.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로 이름 붙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이다. 트럼프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구호에 착안해 조선업 부흥을 강조하는 미국에 적극적 협력·투자·지원 계획을 밝힌 것이다. 고부가가치 선박 제조에서 세계 ‘넘버 원’ 기술과 경쟁력을 가진 조선업으로 대미 경제·통상의 돌파구를 열고 있는 것이다. 정부뿐 아니라 정치권과 기업이 모두 합심해 끝까지 국익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 한 이순신 장군의 각오처럼, 문전박대에도 포기하지 않고 54년 전 첫 삽을 뜬 조선업처럼 말이다.
영국 바클레이로부터 차관을 받고 울산에 조선소를 지은 현대그룹이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최초로 건조한 1호선 애틀랜틱 배런호 명명식을 열고 있다. HD현대중공업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