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
수백 년 도작(稻作)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
풀어헤친 가슴을 헤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
물비린내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
올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
백일홍 꽃이 피면
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
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
나는 북카페를 낼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카페를 열 것이다
천 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기고 적막이 어깨로 문 밀고 들어와 좌정하면
고요는 이마를 빛내며 노을빛으로 저물어갈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활자 앞에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아
아버지가 비워두고 간 여백을 채울 것이다
무논에 나무를 심은 일이 옳은지 그른지부터
곰곰 따져 기록할 것이다
-시 ‘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장옥관 시집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지 보름이 넘었다. 비 오기 전에 감자와 마늘을 캔다고 서둘렀던 게 민망하다.
그사이에도 백합에 이어 글라디올러스는 아래서부터 흰 꽃잎을 열어가고, 땅콩은 오종종한 동그란 잎들을 낮게 펼쳐간다. 땡볕을 머리에 인 고추와 가지는 굵어지고 옥수수알과 호박은 여물어간다. 비명도 구호도 내지르지 않은 채. 원 없이 농사짓다 올봄에 훌쩍 떠나간 아랫집 유석문씨처럼. 우리들의 아버지처럼.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장옥관 시인은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이, “수백 년 도작(稻作)한 논에” 용감하게도 “백일홍을 심었다”. “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 “풀어헤친 가슴을 헤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이기에. 그 논은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 물비린내나는 초록의 페이지”이기에. 그럼에도 아들은 쌀가마니를 낳았던 아버지의 시간을 덮음으로써, 시간의 블록으로 규정된 산업과 효용의 시간을 벗어던졌다. “무논에 나무를 심은 일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지만, 지불노동과 부불노동의 경계를 벗어났다.
“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에 “얼굴을 덮”은 새로운 시간 속에서 꿈이 자란다. 허벅지 높이까지 자란 벼들이 도열한 논들을 갈라놓는 비닐하우스가 벼들을 포위하는 농경지 바깥에서. 공유지가 사라진 근대화 이후 농민처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활자 앞에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은 시인은 “곰곰 따져 기록할 것이다”. 큰 낫을 든 시간의 할아버지처럼 추수를 닦달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떠나서. 그리고 맞아들일 것이다. “천 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기고 적막이 어깨로 문 밀고 들어”와 곁에 앉는 유일무이한 시간을. 한순간의 기회를 잡기 위해 발에 날개가 달린 카이로스의 시간을 벗어남으로써 시간을 되찾을 것이다. 노동과 일과 여가와 놀이와 관조가 백일홍처럼 연이어 피어나는 삶을.
혼자 있지만 함께하는 문화적 공유지를 상상하는 일은 흐뭇하다. 간절한 염원을 품은 희망일수록 더 그렇다. 가을이 저물어 “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에서 “아버지가 비워두고 간 여백”이 채워지는 그 카페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희망은 전염이 잘된다. 내게도 두어 마지기 땅이 있다면 장옥관 시인처럼 나무를 심고 싶다. 논물에 땀방울이 섞인 아버지의 시간을 되새기며,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아 있고 싶다. 먹고살기 위해 버려진 시간과 시간 속에 숨겨진 주름진 무늬를 들여다보고 싶다. 때로 모두가 누려야 할 시간의 해방에 대해서 격문 같은 활자를 마주하고도 싶다.
김해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