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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딘가는 나아지는 중이다

입력 2025.01.05 20:58

수정 2025.01.0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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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참담한 연말이었다. 12월이 시작되자마자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로 정국은 탄핵과 수사의 소용돌이에 마비되었다. 그런 와중에, 한 해 마지막 날을 사흘 앞둔 12월29일에는 무안공항에서 최악의 여객기 참사까지 발생했다. 절망의 도가니 속에서 정치뿐 아니라 경제도 직격탄을 맞으며, 슬프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연말이 고통스럽게 흘러갔다.

많은 사람이 차마 뉴스를 켜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견디며 지나던 12월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안에 작은 기적들이 있었다. 오랫동안 소외된 어떤 사람들의 인권이 법 앞에서 인정받았고, 늦었지만 국가가 그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판결로 준엄하게 선포된 것이다.

먼저, 지난달 18일 발달장애인을 위해 이해하기 쉬운 공보물과 그림 투표용지 등 보조용구를 제공해야 한다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사건의 원고인 발달장애인 당사자 박경인과 임종운은 최초 소송이 제기된 지 거의 3년을 견뎌 이번 항소심 판결을 얻었다. 1심에서 기각도 아닌 각하 판결을 받았던 터라 더욱 절박했던 이들은 다가올 선거에서 정당한 편의를 당당히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날,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 범위에 관한 중요한 판결을 선고했다. ‘56년 만의 미투’라 알려진 사건의 재심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파기 환송한 것이다. 강간을 시도한 남성의 혀를 깨물었던 피해자 최말자는 가해자의 혀를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1964년 부산지법에서 징역 10개월의 집행을 2년 유예하는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2022년 5월, 형사재판 재심 청구까지 얼마나 여러 번 마음속 울분을 삼켜야 했을까. 재심 청구 후 4년7개월이 지나서, 대법원은 당시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피해자를 구제하고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그 사건을 다시 심리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향후 열릴 새 재판에서 정당방위 범위에 대한 진일보한 판단이 나올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로부터 하루 지난 12월19일, 대법원은 또 하나의 역사적인 판결을 선고했다. 장애계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생활편의시설 장애인 접근권 보장 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 소송의 원고 중 한 명인 지체장애인 김명학은 2018년 봄, 이 소송에 당사자로 참여하며 장애인에게 시혜와 동정을 베푸는 세상이 아닌, 동등한 사람으로서 권리를 보장받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공개변론을 거쳐 대법원은 ‘편의시설 설치 의무 대상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지 않은 국가로 인해 장애인들의 불행 정도가 매우 커서 장애인 접근권이 유명무실해졌다’고 엄중히 지적했다.

‘1층이 있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6년 넘게 이어온 이 소송이 최종 승소로 마무리되면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 캠페인도 주목받고 있다. 비장애인 중심, 성인 중심, 남성 또는 여성만을 위한 화장실에 대한 관점을 넓혀, 모든 사람이 자기 모습 그대로 편하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인식과 제도를 변화시키자는 운동이다.

세상은 느리게 변한다. 사람이 워낙 저절로 변하기 어렵다 보니, 오래 이어져온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많은 이가 낙담에 빠져 있는 이 순간에도 사회 어딘가는 나아지고 있었다. 변화를 만들려고 눈물로 켜켜이 모은 용기를 낸 누군가가 있었고, 그 옆에서 뜻을 같이하며 시간과 노력을 쏟아 연대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없이 느려서 어쩌면 무시당하고 만 것 같던 순간도 함께 지탱하며 공든 탑을 쌓았고, 그 지난한 과정 끝에 얻은 값진 결과는 어려운 삶을 짊어지고 가는 많은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쩌면 승패의 경계마저 무딘 이 혼란의 세상에 정말 필요한 것은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고통을 맞들려는 용기가 아닐까. 두 걸음 뒤로 물러서도 세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서로 더 단단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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