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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기억이 지역을 만든다

입력 2024.12.02 20:54

수정 2024.12.02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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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울산은 이주민 도시다. 산업화 시기 울산에 자리 잡은 내 부모세대는 산업도시 울산을 형성한 노동이주 1세대다. 어릴 적 1997년 울산의 광역시 승격 뉴스를 보고 신났던 기억이 선연한데, 오늘날 울산도 지역소멸 위기를 겪는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1962년 박정희 정권이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해 개발이 시작된 지 약 반세기 만에, 한 도시의 압축적 성장과 쇠퇴를 목도하고 있다.

울산의 위기는 청년층의 이주만이 그 원인이 아니다. 내 부모세대는 은퇴 후 울산을 떠나 고향으로 이주하고 있다. 중장년층도 은퇴하면 울산을 떠나려는 이가 적지 않다. 이런 현상은 울산이라는 도시가 고향을 떠나온 이주민에게 귀속감을 주어 ‘울산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음을 뜻한다. 역시 이주 2세대인 나 같은 청년들도 별로 귀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대표적 ‘노잼도시’ 울산이라고 고유한 정체성의 자원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동향 친구들은 가령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란 단어를 모른다. 부모들도 이주민이자 노동자, 울산 사람으로서 자신들이 겪은 역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가 만들고 참여한 지역 역사에 침묵했다. 그 결과, 부모가 그랬듯 타지로 이주해 노동자로 사는 나 같은 울산의 자식은 전승된 기억이나 계보를 갖지 못한다. 나는 광주와 제주의 청년들이 5·18과 4·3의 기억을 만나면서 지역을 그저 ‘출신지’가 아닌 정체성으로 삼는 게 부러웠다.

지역소멸 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지역의 청년여성이 겪는 양질의 여성 일자리 부족이 꼽힌다. 하지만 이 현상은 꽤 오래된 것이다. 농촌을 떠나 공장에서 일했던 내 어머니처럼, 근현대사 내내 노동계급 여성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돌며 도시로 이주했다. 호주제가 여성의 경제적 권한을 제약하는 가운데 여성들은 식모나 공순이라는 이름의 일자리를 전전했다. 역설적으로 지역 도시들의 번영과 현재의 소멸위기 모두,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진 ‘이주의 여성화’의 결과인 셈이다.

이주의 여성화로 형성된 다른 유형의 도시도 있다. 미군의 원조로 도시기반시설이 구축되고 지역사회가 형성된 ‘원조 도시’ 동두천이 그러하다. 기지촌이라 불린 동두천을 만든 주역 중 하나는 일자리를 찾아 자의로 타의로 흘러든 여성들이었다. 그 역사의 흔적은 동두천시의 소요산역 인근에 방치된 폐건물에서 찾을 수 있다. 1973년 세워져 1996년 폐쇄된 이 건물은 미군을 성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병에 걸린 미군‘위안부’ 여성들을 격리했던 성병관리소였다. 현재 동두천시가 건물 철거를 강행하면서, 지역 시민사회는 건물을 보존하라며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동두천시의 한 공무원은 주민들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 “수치와 오욕의 상징”을 철거한 “새롭고 밝은 미래”를 말했다. 그 기억과 상징이 한때 동두천의 번성의 바탕이었고 지역사회가 그에 공모했다는 점에서, 선택적 망각을 선언한 셈이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 동두천에 정착해 지역 제조업을 떠받치는 아프리카계 난민에게 쏟아진 혐오를 동두천시가 방관했던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여전히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과 유입되는 이주민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과연 소멸위기에 처한 동두천을 살릴 수 있을까? 청년여성이나 이주민의 존재가 지역소멸의 타개책이라면, 과거에 지역이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부터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인터뷰했던, 이태원의 상인은 참사의 기억을 잊지 말고 기념해야 한다고 했다. 애도와 추모를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이태원을 찾아야 상권도 살 것이고, 그것이 이태원이 ‘이태원다운’ 모습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기지촌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지역 사람을 늘리려면 지역 사람을 기억하는 게 먼저다. 지역을 만든 사람들, 그 기억이 다시 지역을 만들 차례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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