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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 [역사와 현실] 감찰권의 이상한 능력
    감찰권의 이상한 능력

    1631년 음력 8월 마지막 날,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에 사는 김령은 멀리 담양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해 초 예안현감으로 재직한 나무송이 보낸 편지였다. 그는 갑자기 파직을 당해 고향 담양으로 돌아간 후, 현감 시절 친분이 깊었던 김령에게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전했다. 김령도 지역 송사를 잘 처리했던 나무송의 파직이 의아한 터였다.나무송이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던 1631년 봄, 예안현에서는 소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워낙 작은 고을이어서 외지에서 온 도둑이 아니라면 범인은 쉽게 잡힐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난당한 소는 흰 점이 뚜렷해서, 예안현 내에 있는 소를 조사해 찾으면 일은 쉽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송의 적극적인 수사에도 한동안 흰 점이 있는 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고을 내에 새로 소를 구한 집이 있기는 했다. 김시익이라는 사람의 여종과 그의 남편이 소를 새로 구했다면서 관아에 고하고, 그 사실에 대한 입안(立案·어떤 사실에 대한 내...

    2025.10.22 21:04

  • [역사와 현실]삼법사
    삼법사

    지난 9월26일 정부조직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고 나흘 뒤 검찰청 폐지와 기획재정부 분리를 핵심으로 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창설된 검찰청은 내년 10월1일 법률이 공포되면 새로운 정부 기관들로 개편된다.이번에 검찰청을 개편하는 이유에 대해 정부는 그동안 검찰이 보여주었던 선택적 수사와 기소 편의주의를 들었다. 그에 따라 조직 개편의 방향으로 검찰이 독점했던 수사와 기소 기능의 완전한 분리를 통한 민주적 통제 확립을 강조했다. 그동안 검찰이 수사해야 할 일을 수사하지 않거나, 수사할 일이 아닌 것을 수사해 기소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회 여론이 뒷받침된 결과일 것이다.내년 10월이면 기존에 검찰이 담당하던 역할은 세 기관이 나누어 맡게 될 것이라고 언론이 전한다. 공소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그리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그것이다. 법무부 산하에 공소청이 설치돼 기존 검찰의 ‘기소...

    2025.10.15 21:35

  • [역사와 현실]옛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은
    옛것은 가고 새것은 오지 않은

    전쟁에서 교착상태라는 게 있다. 양군의 전력이 엇비슷해 조금의 진전도, 변동도 없는 상황을 뜻한다. 1차 세계대전이 그런 경우였다.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초기 돌격이 저지된 후 양군은 참호를 파고 대치하며 교착상태에 빠졌다. 정치에도 그런 교착상태가 있다. 즉 세력 A와 세력 B가 투쟁할 때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한 채 둘 다 탈진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세력은 도돌이표처럼 각자의 주장만 무한 반복하며 출구나 타협책을 전혀 찾지 못한다. 이에 국민들은 정쟁에만 몰두할 뿐 삶을 돌보지 않는 정치에 염증과 무관심을 내보이며 불만과 좌절감을 쌓아나간다.역사에서 교착상태는 기성 헤게모니가 붕괴한 결과로 나타난다. 여기서 헤게모니란 강제적 지배가 아닌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지도력이고, 이 지도력은 자신의 생각을 ‘상식’으로 제시해 자연스럽게 지배하는 힘이다. 그런 헤게모니 역량이 소진되면 위기가 온다.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이탈리아...

    2025.10.01 22:22

  • [역사와 현실]기술과 돌봄, 정조의 능행
    기술과 돌봄, 정조의 능행

    “농장다리 아래 그늘이 진 데가 있었어. 한여름이면 노인네들이 거기 모여서 시조창을 하면서 노닥노닥했지. 거기에 제방이 있는데, 내가 그걸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참 좋아했다.” 아버지가 문득 풀어놓은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다. “하루는 내가 거길 기어 올라가다 떨어진 거야. 그랬더니 한 노인네가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환약 같은 걸 꺼내서 먹여줬다. 아마도 청심환 아니었나 싶어.” 아버지의 이야기 마무리는 약간 씁쓸했다. “요즘 같으면 어디 그렇게 돌봐줬겠냐? 그 시절엔 그래도 그런 정이 있었다.”아버지를 보내드리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자동 결제가 될 것이니 돈 내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요즘엔 그렇게도 되냐며 감탄하시더니, 택시 잡기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셨다. 조부모님 납골당 공원에는 택시가 잘 들어오지 않아서, 갈 때 아예 택시와 흥정을 해서 참배하고 나오는 시간 동안 대기를 해달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앱을 깔면 된다는데, 내...

    2025.09.24 21:13

  • [역사와 현실]코드 인사와 승진의 논리
    코드 인사와 승진의 논리

    1796년 음력 7월21일자 <노상추 일기>는 불쾌함으로 가득 차 있다. 노상추가 거쳤던 삭주부사 자리에 음관(蔭官)인 온양군수 변위진이 제수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작은 군현이나 변방에선 과거 합격 없이 조상 음덕으로 관직을 받는 음관이 배치되는 사례가 간혹 있지만, 당상관인 부사 자리에 음관을 발탁한 일은 이례적이었다. 게다가 노상추의 불쾌함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변위진은 병마절도사 백동준의 후실 처남으로, 무과 합격 없이 병마절도사 후광에 힘입어 ‘선전관에 천거’(이를 줄여 ‘선천’이라고 불렀다)된 이른바 남항천(南行薦) 출신이기 때문이었다.선천은 왕을 시위하는 선전관을 미리 천거해 두는 제도인데, 무과는 워낙 많은 인원을 선발하다 보니 고위직 무관이 되려면 반드시 선천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변위진은 가문 후광으로 천거된 남항천 출신이어서, 쉰이 넘도록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음관 부장으로 겨우 6품에 올라 온양군수가 되었다. 이처럼 서출인 데다 남항천 ...

    2025.09.17 20:44

  • [역사와 현실]평택 미군기지의 지정학
    평택 미군기지의 지정학

    음력 660년 6월18일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대규모 함선들을 이끌고 중국 산둥성 라이저우시를 출발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배 1900척이 동원되었다. <삼국사기>는 “많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1000리를 이어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를 함락시키기 위한 당나라의 13만 병력과 신라의 5만 병력 간 연합작전이 시작되었다.당나라 군대는 서해를 건너 3일 뒤에 덕물도에 도착했다. 덕물도는 오늘날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다. 라이저우시에서 덕적도까지 직선 해상 항로로 올 수는 없었다. 라이저우시→장산곶→교동도→강화도→덕적도→당은포 코스가 당시 당나라와 신라를 연결하는 항해 루트였다. 황해도 장산곶은 한반도에서 육지로는 가장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10여㎞ 떨어진 곳에 백령도가 있다. 산둥반도 끝에서 장산곶까지는 직선거리로 190㎞가 살짝 넘는다. 중국과 한반도의 최단거리다. 중국 출발지에서 장산곶, 장산곶에서 덕적도까지 해상으...

    2025.09.10 20:46

  • [역사와 현실]스프레차투라, 천재의 기술
    스프레차투라, 천재의 기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천재들의 시대였다. 조토와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천재적 예술가들이 그토록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배출된 것은 기적과도 같다. 그런데 관점을 바꿔보자. 당대에 배출된 것이 천재라기보다 천재의 개념이라고. 르네상스 시대에 천재의 개념이 나타났고, 이 개념이 그들에게 붙여진 것이라고 말이다.사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예술의 개념도 얼추 그 시대에 등장했는데, 예술의 어원인 이탈리아어 ‘아르테’(arte)는 본래 기예나 기술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의 조상은 직종의 기능을 보유한 장인으로서, 어쩌면 이탈리아 장인 문화야말로 현대 예술이 뻗어 나온 뿌리인 셈이다.르네상스 이탈리아는 현대적인 순수 예술의 개념이 싹튼 비옥한 토양이었다. 그림은 손이 아니라 머리로 그린다는 미켈란젤로의 확신은 새로운 개념의 등장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예술가의 자부심도 덩달아 치솟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

    2025.09.03 20:54

  • [역사와 현실]외환위기와 한국학의 전산화
    외환위기와 한국학의 전산화

    1997년 말 대한민국을 강타한 외환위기를 기억할 것이다. 이 위기의 시대, 정부가 주도한 정보통신 분야 지원은 2000년대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만들었다. 특히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균질하고 빠른 인터넷망은 현재 한국의 인상을 만드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느린 인터넷이나 와이파이망에 분노하는 밈, 외국인이 한국의 빠르고 편리한 정보통신망에 감탄하는 장면 같은 것은 이제 진부할 정도다.이 시대 정보통신 분야의 지원은 한국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처음에는 일자리를 잃은 이들을 위해 마련된 공공근로사업 형태로 학계에 자잘한 일거리가 떨어졌다. 그러다 1999년 장기적인 계획에 따른 본격적인 일감이 만들어졌다. 정부에서 고급 정보기반을 구축하겠다는 기치 아래 ‘한국역사통합정보시스템 구축 사업’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이는 고문헌과 고지도, 근현대 발간된 자료 등 한국학 제반 분야의 자료를 전산화하겠다는 사업이었다. 고문헌의 한자를 ...

    2025.08.27 20:44

  • [역사와 현실]기록 앞에 설 부역자들
    기록 앞에 설 부역자들

    1634년 음력 5월, <광해군일기> 편수가 끝났다. 1633년 12월 <광해군일기> 중초본이 완성됐고, 이를 기반으로 이듬해 5월 정초본이 마무리됐다.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실록’이 아닌 ‘일기’로 명명됐지만, ‘실록’이든 ‘일기’든 사초(史草)로만 존재했던 조각의 기억들이 체계적인 기록이 됐다.기억이 기록이 되면, 기록 대상이 된 인물들은 역사의 판단 앞에 서기 마련이다. 그 17년 전인 1617년 겨울, 이영구 등 당시 70여명의 과거 합격자 행적도 역사의 판단 앞에 섰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은 개인 노력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보면 국왕이 내린 가장 큰 은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합격자 발표가 이뤄지면, 합격자들은 국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를 담은 사은례(謝恩禮)를 행했다. 사은례의 핵심은 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 큰어른인 대비를 향한 배례였다. 감사와 충성의 의미를 담는 행사였기에 국왕만큼이나 왕실의 큰어른에 대한 ...

    2025.08.20 20:39

  • [역사와 현실]조선시대 인물 평가
    조선시대 인물 평가

    사람들은 조선왕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로 조선시대의 치열한 당파 싸움, 즉 당쟁을 든다. 그런데 지금의 여당과 야당을 보면 달리 생각해야 할 듯하다. 여당과 야당의 다툼이 조선시대 당쟁보다 덜하지 않다. 그런데, 권력을 두고 대립하는 정치집단 사이에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인들 갈등과 다툼이 없겠는가? 국익보다 당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아도 흔한 일이다. 모두의 이익보다는 내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전두환의 제5공화국 몰락 후 40년 안 되는 기간 동안 많은 정당이 등장했다. 여당과 야당 중심세력의 특성이 유지되면서도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로 민심의 향배에 따라 정당들이 출몰했다. 조선은 왕조국가였다. 그 때문에 국민이 아닌 국왕 마음을 얻는 사람 뒤에 사람들이 모였고 정치세력이 형성됐다.널리 알려진 대로 선조 때 당파로는 서인과 동인이 처음 성립되었고, 점차 세력을 얻은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서인, 북인, 남인...

    2025.08.1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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