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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감]날린 시간이 만들어준 것
    날린 시간이 만들어준 것

    과제 제출일에 “쓰던 글을 날렸어요”라 말하는 학생을 가끔 마주할 때면 겉으론 고개 끄덕이면서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문서 프로그램상 자동저장 기능이 내장된 데다 작업 도중 수시로 저장할 텐데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저마다 방법이 다르겠지만, 그간 난 시간대별로 일련번호 붙인 문서를 몇십분 간격으로 드라이브에 저장하고 ‘내게 보내는 메일’로도 발송하는 고전적 방법을 사용해왔다. 실수로 몇문장 삭제될 순 있더라도 몇시간 동안 작업한 분량이 통째로 사라질 순 없다고 여겨왔다. 직접 겪기 전까진 그랬다.중요한 원고를 제출하기 전날 밤이었다. 선배 선생님 두 분이 지구 건너편에서 초고를 읽은 후 변경내용 추적 기능으로 수정사항과 제언을 꼼꼼하게 적어 보내주셨다. 조언들로부터 도출한 결론은 절반 이상을 ‘다시 쓰기’였다. 마감 앞둔 막바지 단계라 힘내서 밤새워보기로 했다. 앞부분부터 한 문장씩 고쳐가다 마침내 마지막 단락의 수정을 앞두고 창밖을 보니 동틀 무렵이었다. 졸음을 밀어내...

    2025.10.21 20:27

  • [공감]불안과 기대 사이
    불안과 기대 사이

    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주인공 슈미트. 그는 조용히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닫는다. 40여년간 다닌 보험회사에서 마지막 퇴근이다. 동료들의 환송회도 마치고 후임자에게 업무 인계도 끝냈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짓누른다. 익숙했던 일상을 뒤로하고 새로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 한편으로 이제야 비로소 진짜 나의 시간을 가진다는 기대감. ‘불안과 기대 사이’, 은퇴자의 복잡한 마음을 보여준다.2025년 학습자중심교과교육연구에 실린 한 내러티브 연구에 따르면 은퇴를 앞둔 중년 남성들은 서운함, 씁쓸함, 아쉬움 등 불안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은퇴 전 불안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삶의 구조와 정체성이 흔들릴 때 생기는 복합적 심리 상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불안은 경제적 문제다. 매달 고정적인 급여가 없는 생활을 떠올리며 “내가 모은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병원비나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마음이 무거워...

    2025.10.14 21:09

  • [공감]영포티에게
    영포티에게

    성호씨, 얼마 전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못다 한 말을 글로 전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먹해하고 긴장을 한 듯했지만 맥주 한 잔 마신 다음부터는 술술 말문을 풀더군요.“열심히 일해서 몇년 전 운좋게 서울에 아파트를 사는 데 성공했습니다. 순조롭게 승진을 했고, 연봉도 만족스럽습니다. 좋아하던 아티스트의 콘서트에 가고, 패션이나 음식 기호도 확고해서 섬세한 취향이라는 평을 들어요. 교육비가 많이 들기 시작했지만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도 거르지 않습니다. 하프 마라톤을 뛸 정도로 운동도 제대로 합니다.”이렇게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사는 40대 초반이라고 자신하는데, 20대 후배들이 성호씨를 대하는 눈길과 태도가 거리감이 있어 서운하다는 얘기였지요. 또 하나, 같은 팀 20대 여자 후배가 잘 웃고 싹싹하게 대해서 살짝 내게 호감이 있나 생각한 적 있다고도 했지요. 지금은 결혼반지를 챙겨 끼고 다닌다면서.성호씨가 바로 ‘영포티’라 불리는 세대입니다. 젊게 사는 중...

    2025.09.30 21:54

  • [공감]좋아질 때까지 좋아해본 것
    좋아질 때까지 좋아해본 것

    20대 초반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시기, 학교 근처 작은 와인바에서 일한 적이 있다. 주말 저녁에 그곳에서 일했다. 친구들과 MT에 가서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카스 같은 술만 마시다가 다양한 와인과 위스키, 코냑, 칵테일 등을 접하며 미식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읍 단위 지역에서 나고 자라 이제 막 서울로 온, 김치찌개와 청국장 등 한식에만 익숙하고 기껏해야 아웃백이나 애슐리를 가는 것이 연중 최고 경사였던 내게 신세계였다.복잡한 이름을 가진 고급술들을 하나씩 익혀가면서 술의 세계가 엄청나게 넓고 풍부하며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그 역사가 길고, 이것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섬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복잡한 외국어 이름들이 즐비한 메뉴판과 약간은 고상 떠는 바의 분위기 안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을 관찰하는 것도 큰 공부였다.‘여기 분위기 되게 좋아.’ 데리고 온 연인 앞에서 가능한 한 그럴싸하고 멋들어지게 주문하고 싶어 무리하는...

    2025.09.23 21:24

  • [공감]긴장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긴장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김유정의 단편을 읽다 말고 난데없이 선생님께 연애담 좀 들려달라 조르기 시작했다. 초가을의 나른한 오후, 문학 수업 시간이었다. “이 녀석들 이거” 손사래 치던 그분은 결국 교과서를 덮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열일곱의 여고생들은 또랑또랑해진 눈빛으로 침 넘기는 소리도 안 내며 경청했다. 수업 마침 벨이 울려 교실을 나서던 선생님이 덧붙였다. 지나간 연애사를 복기해보니 사랑이 시작된 계기는 저마다 달랐으나 식어간 지점은 매번 같았더란다. 이제 저 사람은 내가 긴장하며 살피지 않더라도 곁에 남아주겠구나, 확신이 서면 그만 헤어지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나중에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아 두려거든 상대를 계속 긴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충고하셨다.우리는 책상을 쿵쿵 두들기며 “우우~” “그게 뭐예요” 야유했다. “저 선생님 바람둥이 맞네, 맞아” “거봐. 눈매나 입술 모양이 그렇댔지?” 소곤대고 킥킥거렸다. 덩달아 웃었지만, 그날 들은 이야기가 은연중에 각인된 모양이다. 세간...

    2025.09.16 20:58

  • [공감]키오스크 앞에서 멈춰 선 마음
    키오스크 앞에서 멈춰 선 마음

    할아버지는 아내의 생일에 꽃다발을 선물하고 싶었다. 새벽에 찾은 꽃집은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키오스크 앞에서 결제하지 못한 채 꽃을 들고나왔다. 할아버지는 영업시간이 되어 다시 찾아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현금을 지불했다. 신문 기사에서 읽은 이야기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무인 카페 키오스크 앞에서 “커피 한 잔만…”이라며 지나가는 이에게 도움을 청한 노부부의 사연이 있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따뜻한 커피를 건네받은 노부부는 만족해했지만, 나는 편리한 기술 뒤에 숨겨진 고령자의 불편함을 보았다.영국의 노인자선단체 ‘에이지UK’가 2024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고령층에게 꼭 필요한 기술은 세 가지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 숫자를 이해하고 다루는 ‘수리력’, 그리고 온라인 서비스와 디지털 환경에 자신 있게 참여하는 ‘디지털 기술력’이다. 특히 디지털 기술력은 음식 주문, 온라인 구매, 대중교통 이용 등 생활의 단순한 영역에서부터 은행 업무, 공과금 납부...

    2025.09.09 20:53

  • [공감]소박한 기대와 뜻밖의 결과
    소박한 기대와 뜻밖의 결과

    주말 오후, 서울 필운동의 자주 가던 카페에 들렀는데 사장이 서비스로 에클레어를 주셨다. 단골 인증을 받아 뿌듯해하며 곧 자리를 양보하고 건너편 편집숍에 트레킹화를 사러 갔다. 맞는 사이즈가 없어 실망하고 나오려는데 40% 세일을 하는 다른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남은 한 켤레가 딱 맞았다. 말 그대로 ‘득템’이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기대와 실망을 하며 산다. 뜻밖의 선물을 받으면 기쁘고, 기대했던 물건을 구하지 못해 실망했다 의외의 발견으로 기뻐한다.기대를 하는 과정과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를 비교해보면 무엇이 더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쾌락은 도파민 분출에 의해 느껴지고, 그 결과 보상회로에 자극을 줘서 다시 그 행동을 하고 싶어지게 된다.처음에는 도파민은 원하는 결과에 대한 반응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연구를 해보니 도파민 방출은 ‘이제 즐거운 일이 일어날 거야’라는 예상과 더 연관이 있었다. 도파민은 행동을 하기 직전 결과에 대한 기...

    2025.09.02 20:54

  • [공감]비일관성을 허락하기
    비일관성을 허락하기

    일상생활을 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때는 비일관적인 성격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어느 날은 다정했다가 어느 날은 차가우면 아이 입장에서 불안할 것이다. 팀원이 많은 상사가 기분이 오락가락하면 일하는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그러나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변화한다.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우울해진다. 어제는 사랑스러웠던 친구와 오늘은 절교하고 싶다. 몇년간 홀딱 빠졌던 취미가 어느 날 아침 하기 싫어지고, 오랫동안 미워했던 아버지를 갑자기 용서하게 되기도 한다.관계에서의 비일관적인 성격과 태도는 상대를 불안하게 하고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나도 일기를 읽어보면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성격파탄자가 따로 없지만 수업을 할 때는 의젓하고 격려하는 오은영 선생님 자아가 운전대를 잡는다. 반대로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 때야 천방지축 자아가 나타나기도 한다. 누군가 일관적으로 다정하다...

    2025.08.26 21:42

  • [공감]싸구려 커피
    싸구려 커피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갓 주목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가까운 후배가 이 노래 한번 들어보라며 동영상 링크를 보내줬다. 제목이 ‘싸구려 커피’라 했다. 후배와 달리 당대 국내 인디 음악계를 거의 알지 못했던 난, 별 기대 없이 재생 버튼을 누르고 저편에 앉아 책을 펼쳤다. 몇 소절 지나지 않아 책에서 눈을 뗀 채 노랫말에만 귀를 쫑긋했다. 이제껏 경험 못한 독특한 감각이면서도 정서적으론 친숙했다. 몇번씩 반복해 들으며 이 ‘화상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랩인지 타령인지 모를 톤으로 “언제 땄는지도 모르는 미지근한 콜라가 담긴 캔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 아뿔싸 담배꽁초가”라 읊조리는 대목에 이르면 매번 웃음이 터졌다. 그게 어떤 상황일지 그려져서였다. 요컨대 이런 장면이었다.늦여름 오후, 공강 시간에 학회실로 들어서니 실내금연 규정에 아랑곳하지 않은 선후배들이 몰래 피워댄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구멍 숭숭 난 낡은 소파에선 몇몇이 기타를 딩둥거리고 있고, 허세 넘치는 고뇌와...

    2025.08.19 20:00

  • [공감]가상현실로 떠나는 시니어들의 설레는 여행
    가상현실로 떠나는 시니어들의 설레는 여행

    “다리가 떨릴 때 말고, 가슴이 떨릴 때 여행 가라”는 말이 있다. 여행은 설렘이나 열정이 있을 때 가야지, 다리가 떨릴 때면 이미 늦었다는 뜻일 것이다. 혹은 망설임과 두려움에 다리를 떨지 말고, 가슴이 뛸 때 과감히 도전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인생에서 행동의 타이밍과 동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이다.나는 여행이 주는 설렘을 좋아한다. 어릴 적 소풍 갈 때면 너무도 설레어 잠 못 이루곤 했다. 나는 여행 갈 곳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과정 또한 즐긴다. 여행 책자, TV 속 여행 프로그램이나 여행 크리에이터의 영상을 보며 마치 그곳에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알아가면서 나의 마음은 어릴 적 소풍 때처럼 설렌다.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서 여행은 점점 힘들어진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 여행을 포기하는 이들도 많다. 동행이 없어 혼자 떠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좁은 생활 공간에 자신을 가두게 되며, 여행의 설렘은 추억...

    2025.08.12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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