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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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그깟 공놀이가 그리는 새로운 지형도 갈매기, 곰, 공룡, 독수리, 마법사, 쓱, 영웅 군단, 줄무늬, 푸른 피, 그리고 호랑이. 얼핏 무관해 보이는 이 단어들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내는 세계가 있다. 모르는 이들에겐 이상한 암호명 나열처럼 보이겠지만 아는 이들에겐 곧장 도파민이 솟구치는 신호, 프로야구 이야기다. 지역 간 갈등과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와는 다른 맥락으로 프로야구는 지역 기반의 확고한 ‘연고 문화’를 바탕으로 몸집을 키웠다. 부산은 롯데, 호남은 기아, 충청은 한화처럼 실로 오랫동안 출신지에 따라 응원 팀이 정해졌고, 그 소속감과 연대가 야구 팬덤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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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공공디자인, 꾸미기 아닌 문제 해결의 언어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의 한가운데, 시민들이 그늘막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없던 풍경이다. 서울 서초구가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도 재난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 그늘막 설치를 추진했고, 1년여 준비 끝에 2015년 6월 첫선을 보였다. 이제 전국 어디서나 익숙해진 이 시설물은 공공디자인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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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실패를 다룰 수 있는 감각 실패를 박제한 교실 한 칸짜리 전시 공간에 들어섰다. 이름하여 ‘실패박물관’이다.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가 하면, 인공지능(AI) 기반 프로그램의 힘을 빌려 설계는 해냈지만 재료 수급과 조립 과정에서 막혀버린 프로젝트도 있었다. 친환경 캠페인으로 상품을 기획하고도 플라스틱 포장 용기를 사용해 메시지가 희석됐다는 자기반성도 전시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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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삶을 무르익게 하는 건 전략보다 질문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는 동안 서울시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전원생활교육과 귀농귀촌종합센터에서 수탁운영하는 귀농귀촌교육 기본공통과정, 일종의 ‘생활형 농촌 교육’을 연이어 받았다. 경제활동의 토대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편리한 생활·문화 인프라와 촘촘한 사회적 연결감 등 도시를 쉬이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전업 귀농으로 삶을 전환하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그마하더라도 텃밭과 정원을 가꿀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길 바라고, 그 속에서 거둔 것들로 밥상을 차려내는 생활을 그린 지 제법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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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서리를 기다리며 여름이면 봉선화를 따다가 손톱에 꽃물을 들인다. 그 자체로 재미도 있지만 꾸미는 데 서툴러 그런지 홀로 겸연쩍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때 손을 내밀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꽃단장이지” 하고 으스대기에도 그만이랄까. 손끝에 남은 꽃물이 시간을 가늠케 해 보통날에 잠시 여유를 갖게 하는 것도, 그렇게 어깨가 움츠러드는 계절에 이르러 은은히 사라지는 것도 맘에 든다. 여러모로 참 매력적인 계절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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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어디에 발붙이고 사는가 어린이날과 부처님오신날이 겹친 지난 연휴, 모처럼 엄마와 시간을 보내려 고향 집에 내려갔다. 이튿날, 어린이날 선물을 잔뜩 기대했을 조카로부터 “고모, 우리도 이제 할머니 집으로 출발해요” 하는 전화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엄마의 전화가 울렸다. 외사촌 오빠였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인사라도 하려나 싶어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는 엄마는 내게 곧 큰외삼촌의 부고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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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산불 그리고 기후여행자 3월22일 의성군에서 피어오른 불씨가 산자락을 타고 바닷가 영덕군까지 번져 경북 북동부 지역에 크나큰 피해가 발생했다. 산림청 발표에 따르면 순간최대풍속이 초속 27m인 강풍을 타고 시간당 8.2㎞ 속도로 이동한 불길이 928㎞에 달하는 화선을 만들었다. 소실 면적은 4만5157㏊. 이 숫자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헤아릴 필요도 없이 ‘최악’ ‘최대’라는 수식과 함께 보도된 산불 현장은 우리의 마음까지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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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대저토마토’를 아십니까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 즈음 김해국제공항 인근의 한 토마토 농가로 명산지 취재를 다녀왔다. 부산 강서구 대저동 일대에서 재배하는 대저토마토, 일명 ‘짭짤이토마토’가 제철맞이를 하는 시기다. 농산물 소비의 폭이 좁은 1인 가구라는 것이 변명이 될는지. 들어는 봤어도 먹어본 기억은 없었던 터라 사실 좀 짐작이 안 됐다. 과일은 물론 토마토처럼 열매를 식용으로 하는 과채류도 당도가 주요 품질 기준으로 작용한다. 근래 신선식품 코너에서 ‘○○브릭스 이상’이라는 홍보 문구를 심심찮게 발견하게 되는데, 이 브릭스(brix)가 당도를 백분율로 나타낸 단위다. 품질을 가늠하는 절대 지표는 아니나 브릭스 수치가 높을수록 열매가 맛있게 잘 익었다는 인식이 높다. 많이 사라진 풍경이지만 후식이나 간식으로 얇게 저미듯 썬 토마토에 하얀 설탕을 솔솔 뿌려 먹었던 시절도 있잖은가. 그런데 대놓고 짭짤한 토마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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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무슨 일 하세요? 수없이 물었던 말이다. 그만큼 답해야 했던 말이기도 하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말. 한국 사회에서 ‘하는 일’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은 소속과 지위를 확인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니 물을 때였든 답할 때였든 그리 흔쾌했던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기어이 묻고, 들어야 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추진한 현대사 구술채록 사업 가운데 하나로, 역대 대통령을 보좌했거나 이에 관계된 일을 수행했던 이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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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들킬 결심 새해를 맞고 며칠 안 지나 겨우내 눈과 서리를 견디며 더 단단하고 더 달달해진다는 해남 겨울배추 수확 현장에 다녀왔다. 수년째 월간으로 발행되는 농업 전문지에 지역명과 나란히 등호를 붙여도 될 만큼 이름난 지역 특산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2월호 취재였다. 월간지 발행 특성상 한 달을 앞당겨 준비하는데, 보통 때 같으면 원고를 마감하고 열흘여 여유가 생기지만 임시공휴일까지 더해진 설 연휴가 곧이고 2월은 짧은 달이다. 그제 2월호를 마감하고는 봄맞이 3월호 취재 후보군을 살피다가 아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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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함부로 하지 못하게 현재는 필히 과거가 된다. 그리고 그 과거는 일부만이 역사로 기록되어 왔다. 지금껏 무엇이 어떻게 선별되어 역사로 기록되었는지, 왜 그것들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게 되었는지 새삼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올해 국가유산청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국가유산사랑’에 ‘근대와의 조우’라는 글을 매달 연재했다. 광주 양림동, 나주 영산포, 진주 에나길, 경주 읍성 둘레, 원주 대성로, 제주 모슬포 등 각 지역에서 반나절 찬찬히 걸어 둘러볼 수 있는 국가등록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동선을 짜 이야기를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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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영의 숨 지역의 내일을 밝히는 축제, 양림골목비엔날레 꽃과 단풍,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그리고 특산품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총동원되는 축제의 계절이다. 나들이하기 좋은 이 황금철을 놓칠세라 지역 간은 물론 지역 내에서도 축제 경쟁이 치열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느껴질 때가 적지 않다. 올가을은 내심 기대했던 축제가 열린 광주 양림동에서 맞았다. 사실 광주와 축제가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1980년 5월이 중력으로 작동하는 듯한 광주는 가뿐히 걸음하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다. 주저하며 거리를 두던 내가 광주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축제 이전에 양림동 덕분이다. 양림동의 근대는 일제의 영향력 아래 근대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이 묻어나는 그것과 다른 양상을 보인대서 관심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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