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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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심은 나무 농경문화 시절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나무를 심었다. 아기의 탄생을 축원할 때도, 선비의 입신출세를 축하할 때도, 가문의 화평을 기원할 때도 나무를 심었다. 또 병마에 시달리며 쓰러져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도 나무를 심었다. 경북 구미시 선산읍 신기리, 낙동강이 굽어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송당정사(松堂精舍)’에는 병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심어 키운 한 그루의 모과나무가 있다. 뿌리에서부터 여러 갈래의 줄기로 나뉘며 아름다운 생김새를 이룬 나무는 나무 높이 10m의 큰 나무가 됐다. 이 모과나무에는 의술을 펼친 실천성리학자, 박영(朴英·1471~1540)의 실천과 철학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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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부부의 연을 맺은 1300년 옛사람들은 나무와 사람의 생명을 다르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에게 어미가 있으면 아비가 있어야 하듯, 나무에도 할배나무가 있으면 할매나무가 있어야 했다. 인천 영종도의 용궁사에 서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도 그처럼 사람의 뜻에 따라 ‘할배·할매’의 인연으로 1300년을 해로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백운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하는 이 절집은 조선 철종 5년(1854)에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며 ‘용궁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원군이 손수 남긴 것으로 전하는 편액이 걸린 요사채 곁에 선 느티나무가 할배나무이고, 큰법당 마당에 서 있는 나무가 할매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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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사라진 조선의 옛 정자를 지키다 유난히 늦은 듯해도 계절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가장 먼저 가을의 기미를 드러낸 건 나무들이다. 뜨거운 햇살 받으며 지상의 양식을 짓던 나뭇잎에는 붉고 노란 기운이 올라앉았다. 또 하나의 계절에 담긴 사람살이의 자취를 품고 나무는 세월의 지붕이 된다. 서울 광진구 화양동 주민센터 앞 작은 공원에는 700년 세월의 자취를 지켜온 느티나무가 있다. 나무 높이 28m, 가슴높이 줄기 둘레 7.5m에 이르는 이 느티나무는 서울의 느티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규모도 가장 큰 나무다. 게다가 기품을 잃지 않은 오래된 나무의 생김새는 감동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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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소나무가 품은 겸허의 미 소나무는 우리 겨레가 가장 사랑하는 나무다. 사철 변하지 않는 소나무의 푸른 빛은 선비들의 시와 그림에 지조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소나무 가운데 나뭇가지를 땅을 향해 축 늘어뜨리며 자라는 특징 때문에 ‘처진소나무’라고 부르는 종류가 있다. 경북 청도군 동산리 동창천 곁에 서 있는 ‘청도 동산리 처진소나무’는 처진소나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나무다. 나무 나이 200년쯤 된 이 나무는 나무 높이 13.6m 정도로 여느 소나무 노거수와 견주면 그리 큰 편이 아니다. 하지만 땅에 닿을 듯 늘어뜨린 가지, 특히 서쪽으로 뻗으며 땅으로 처진 나뭇가지의 생김새는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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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시인 묵객의 숨결 스민 소나무 물러갈 듯했던 무더위가 다시 기승이다. 개울가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천렵하던 개구쟁이 시절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큰 나무가 있다. 경남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개울가의 반송이다. 부챗살처럼 갈라져 솟아오른 줄기가 아홉 개로 나뉘어서 ‘구송(九松)’이라고 부르는 ‘함양 목현리 반송’이다. 이 나무는 나무 높이 15m, 나뭇가지가 펼쳐나간 폭은 사방으로 15m 정도 되며, 나무 나이는 300년 정도로 짐작된다. 여느 소나무에 비하면 큰 나무라 할 수 없어도 반송 중에서는 큰 편인 데다 나뭇가지 펼침이 더없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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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독립군 나무’를 돌아보아야 할 이유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어귀에는 ‘독립군 나무’라는 비장한 이름으로 불리는 늙은 느티나무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연락 거점이었던 역사를 간직한 까닭에 붙은 이름이다. 나무 나이 370년, 나무 높이 20m의 이 나무는 생물학적 잣대로만 보면 평범한 느티나무 노거수일 뿐이다. 뿌리에서 올라온 줄기가 둘로 갈라진 생김새가 조금 별나게 보일 뿐 특별히 아름다운 것도, 주변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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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임금의 아버지가 탐낸 소나무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풍치 좋은 별서(別墅·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를 탐냈다. 조선 후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이야기다. 그가 탐낸 별서는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1796~1870)의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였다. 김흥근에게 팔 것을 여러 차례 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한 대원군은 아들 고종과 함께 이 별서를 찾아 하룻밤 묵었다. 임금이 묵은 집에 신하가 살 수 없다는 당시의 예법을 이용하려는 ‘꼼수’였다. 결국 삼계동정사를 거저 얻게 된 이하응은 ‘바위 언덕 위에 놓였다’ 해서 별서의 이름을 ‘석파정(石坡亭)’으로 바꾸었으며, 자신의 호도 ‘석파’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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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여름, 물가의 나무에서 위로를 얻다 봄에는 장맛비처럼 비가 퍼붓더니, 정작 장마철에는 ‘먼지잼’이라 할 만큼의 가는 빗방울만 뿌리며 지나가는 듯하다. 장마철을 유난히 기다려온 나무가 있다.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 종류가 그렇다. 이 가운데 우리의 토종 나무인 왕버들이 있다. 왕버들 중에서 어린 가지와 잎자루에 부드러운 털이 돋아나는 종류를 ‘털왕버들’이라고 따로 분류하는데, 왕버들과의 미세한 차이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개체수가 많지 않아 귀하게 여기는 털왕버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이 서울 근교에서 발견해 등록한 우리 토종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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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살아있는 신화, 태안 흥주사 은행나무 충남 태안의 고즈넉한 고찰 흥주사에는 절집의 온 역사를 담고 서 있는 큰 나무가 있다. 나무 높이 20m, 둘레 8.5m의 거대한 ‘태안 흥주사 은행나무’다. 절집의 창건 설화에서부터 수많은 사람의 염원을 끌어안으며 스스로 신화가 된 나무다. 고려시대인 900년 전 한 노승이 부처를 모실 터를 찾던 중 백화산 기슭에 이르러 꿈결에 “네가 누운 곳은 매우 상서로운 곳”이라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았다. 놀라 깨어난 노승은 그 자리가 부처를 모실 좋은 자리임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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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천성 이겨내고 나라를 지킨 나무 나라 위해 몸 바친 희생의 역사는 사람에게만 새겨진 것이 아니다. 말 없는 생명들도 겨레에 닥친 모진 세월을 함께 견뎌왔다. 제 본성마저 거스르며 나라 지키는 파수꾼이 된 나무가 있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다. 강화도는 예로부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임금이 피난처로 선택한 천혜의 요새였다. 여러 피난 경험 끝에 조선의 조정은 강화도에 돈대와 외성 등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그러나 흙으로 쌓은 성벽은 비바람에 무너앉기 일쑤였다. 이에 영조 때에 강화유수 원경하의 제안에 따라 탱자나무 울타리를 성벽에 심기로 했다. 땅속 깊이 뻗은 뿌리가 성벽을 튼튼히 지켜낼 뿐 아니라, 날카롭고 억센 가시는 철조망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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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백성의 고된 삶 위로하는 나무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는 백성의 고된 삶을 위로하기 위해 한 관리가 심고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키운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 이름까지 아예 ‘위민정(慰民亭)’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푸조나무다. 나무 나이 500년을 헤아리는 이 푸조나무는 조선 영조 때 이 고을의 도호부사를 지낸 전천상(田天祥·1705~1751)이 ‘고된 노동에 지친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심은 나무다. 농사일에 지친 백성이 잠시라도 나무가 드리우는 싱그러운 그늘에 들어 편히 쉬게 하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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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어머니 향한 천년의 그늘 전남 장흥군 옥당리 당동마을에는 ‘효자송(孝子松)’으로 불리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장흥 옥당리 효자송’이라는 이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큰 나무다. 곰솔은 바닷가에서 자라기에 해송(海松), 줄기가 검은빛이어서 흑송(黑松)이라고 불러왔으며, 우리말로는 ‘검은 소나무’ ‘검은솔’이라고 부르다가 ‘곰솔’로 바뀐 우리 소나무의 한 종류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나무이지만, 사람의 정성만 담기면 내륙에서도 자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내륙의 곰솔은 특별한 사연을 간직했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