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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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랑잠 랑잠 차를 몰고 가다가도 아는 누가 걸어가면 모른 척을 한다. 각자의 시간이 있을 것이기에. 작가들이 문우가 회의다 함시롱 각별함이 오히려 ‘거시기’해서 나는 근처에도 안 가고 지낸다. 다만 그래도 같은 동네 사는 소설가 누이랑은 둘이 ‘가끔씩’ 조직 활동을 한다. 누이와 며칠 전 오랜만에 커피를 같이 마셨는데, 내가 요새 하도 바삐 지내니깐(맨정신으로 살기 힘들어서 그런 건데) 그러다 몸 상할라 염려해 여러 가지 잔소리를 시전. 그중 하나가 독일 말. 그란 당케 저란 당케, 우짠 당케, 당케 쇤~ 독일어가 기본으로 되는 동네라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먹을 수 있지. “그게 뭐래요?” “으응~ 랑잠 랑잠~” 아! 라앙자아암~, 천천히 쉬엄쉬엄하라는 예쁜 독일 말. 옛날에 어디선가 주워들었는데, 잊고 살았다. 랑잠은 두 번 거듭 말해야 진정성이 느껴져. 누이는 두 번 연결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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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조용필과 꼬추잠자리 고추보다 매운 걸 꼬추라 하는가. 가왕 조용필 노래 ‘고추잠자리’는 요쪽 함평 양반 김순곤 선생이 작사한 노래다. 요 노래 말고도 ‘못찾겠다 꾀꼬리’도 있는데 가왕이 사이키델릭에 빠졌을 때 대표곡들이다. 전라도에선 세게 발음을 해서 꼬추는 있어도 고추란 없는데, ‘꼬추잠자리’가 날아 재끼는 가을볕 아래 다복한 명절들 보내셨는지. 고추 농사가 올해 어찌 되었는가 보려면 김장 담글 때 갓 빻은 고춧가루 냄새를 맡아 보면 안다. 밭에서 잘 컸는지, 볕마당에 잘 말렸는지, 곱게 빻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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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차꾸차꾸 우리 동네선 ‘자꾸자꾸’를 ‘차꾸차꾸’라 말한다. 자꾸나 차꾸나 뭐 비스무리하다만 차꾸차꾸라 할 때 마음이 더 쓰이고 종종거리게 된다. 쓸데가 많은 말인데, 주로 생각나고 보고 싶을 때 쓰면 살갑고 따수워. “자네가 겁나게 차꾸차꾸 생각나드랑게” “자네가 차꾸차꾸 보고 싶드라고” 하면서 끈적하게 감아대는 소리. “오메 뭔 숭한 소리를 그라고 대놓고 한당가” 함시롱 싫지 않은 표정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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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목댕기와 자유인 들리는 평양발 뉴스에 남쪽 형제들 두고 노여움이 가득해. 나는 종이접기 천재, 아랫동네 꼬마애 ‘해와’랑 놀면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린 일조차 괜스레 미안하고 마음이 쓰여. 찔벅찔벅 성질 건들지 말고, 다투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구만 그래. 평양에선 넥타이를 목댕기라고 한다덩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굵은 소금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 목줄을 끊고 달음질치는 자유로운 순례자와 예술가들을 대변하고자 함이다. 그래도 예쁜 넥타이 진열장을 보면 어울리는 어른 생각이 나기도 해. 저번엔 은퇴식을 가진 한 어른에게 넥타이 아니 평양말로 목댕기 하날 선물해 드렸다. “사모님과 경양식집 데이트하실 때 매세요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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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누나 무스쿠리 위로 누나들이 몇 있는데, 작년 한 누나가 사고로 떠나고 나머진 나이 차이가 제법 있어 누님이라 높여 부른다. 울 누나들은 팝송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그리스 여가수 ‘나나 무스쿠리’ 카세트테이프도 집에 굴러다니던 걸 기억해. 최근 가수 박인희 샘의 어떤 글을 보니, 그리스 사람이 경영하는 한 가게에서 들은 노랫소리가 무스쿠리 음반이었단다. 내게 파시라 하니 아끼는 음반이라 절대 팔 수 없대서 박인희 자신 노래가 담긴 테이프랑 간신히 맞바꿨대.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는 ‘자매혼’을 느낀다. … 그리스 사람이 한국의 박인희라는 이름을 어디 들어보기나 했겠는가. 자기처럼 나나 무스쿠리를 좋아한다니까 그 간절한 마음을 보고 바꿔주었겠지.” 박인희 샘의 독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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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나그네새 기온이 뚝 떨어지덩만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가 들려. 너무 다른 너, 깜짝 놀란다. 갈꽃들이 드디어 뽐내려고 채비를 한다. 너무 다른 공기, 겨울 철새들도 머잖아 찾아오겠지. 지난주 람사르 문화관이 있는 창원시 주남저수지에 벗님들과 생태탐방 겸 다녀왔다. 비치된 ‘겨울철새 생태지도’를 하나 집어 들고 왔는데, 집에 와서 찬찬히 펼쳐보니 물닭, 흰뺨검둥오리, 알락오리, 쇠기러기, 큰고니, 재두루미, 흰비오리, 뿔논병아리, 가창오리, 청둥오리, 노랑부리저어새, 흑두루미… 새들 사진과 얘기들이 잔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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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발로바시 바깥을 떠돌다 돌아오니 마당에 수북한 풀. 이러다 배암이 혀를 내밀며 슥 나오겠네. 집 주변으로 길목 초입까지 풀이 우거지면 이장이 시키지도 않는 울력을 혼자서 척척 한다. 예초기를 들고 숨을 할딱이면서 잡초 제거를 하는데, 엔진 굉음에 개들이 제집으로 후딱 숨는다. 갈퀴로 풀을 그러모아 버리고 반듯해진 마당을 뛰놀게 하면 머슴을 부리는 상전처럼 어그적어그적 나타나서 몸을 뒹굴며 낮때를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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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심심해도 괜찮아 “시인은 모름지기 장례식 관값이나 남기면 돼. 각혈하고 죽어야 진짜지.” 가난한 지리산 시인 형의 농반 진반. 진짜 그리 살다 죽은 시인도 있다.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이시카와 다쿠보쿠. 이름에 ‘석(石)’자가 붙어 있는데, 시인 백석이 하도 그를 흠모해 ‘석’자를 빌려 썼다는 말도 있다. 다쿠보쿠는 신문기자로 목에 풀칠하며 지냈는데,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조선침략전쟁을 반대해 우익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온 가족이 폐결핵으로 죽고 자신도 26세 젊은 나이에 죽었다. 아내의 고향인 북해도 하코다테에 유골을 이장했지. 다쿠보쿠가 쓴 <삿포로>란 미완성 소설이 있다. 소설은 시골에 낙향한 기자 이야기. 자기 경험담을 싱겁고 밍밍하게 썼는데, 1908년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북해도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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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밥심과 옛집 변두리 암자 같은 한옥에 수도승처럼 기대 사노라니 차려 먹는 요깃거리도 간소하기 짝이 없다. 국수나 만두, 떡국을 쑤어 먹기도 하고, 면류 요리를 좋아도 해. 가족들은 그래도 밥을 먹어야지 ‘밥심’으로 사는 거지 하며 쓴소리를 해. 누가 기록한 조선시대 유물 책을 보니 보통 청동 밥그릇이 1700㎖ 크기. 요새 밥공기는 350㎖ 정도란다. 무려 한 끼니에 공깃밥 다섯 그릇을 먹었대. 물론 임금이나 양반 말고 누가 날마다 쌀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겠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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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더위팔기 말복 지나자 폭염이 수그러들기는 했다만 여전히 부채나 선풍기를 끼고 지내야 해. 옛 어른들은 더위를 사고팔았는데(?), 대보름날 아침에 소락때기(큰소리)를 지르면서 “내 더우 내 더우~” 그러면 말대꾸를 하는 사람이 더위를 뒤집어쓴대. “내 더우 폴랑게 째깐 사주소” “까지꺼 일루 줘보소. 지비 더우 하나 못 사줄 꺼싱가.” 그래놓고선 잔뜩 더위에 혼쭐이 나면 “니 더우 내 더위 맞더우~” 이렇게 말하면서 다른 이웃에게 더위를 되팔았대. 더위팔기를 해대는 통에 늦더위가 기승이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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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복숭아밭 치와와 여름 하면 단물이 꽉 차서 들고 걷기조차 벅찬 수박, 토실토실 영근 포도송이도 탐스러워. 나는야 주먹만 한 연붉은 복숭아를 좋아해. 물컹물컹한 황도, 깨물다가 잇몸이 흔들릴 지경인 아삭한 천도복숭아를 먹노라면 삼국지의 도원결의, 그 복숭아나무도 떠올라. 저번 주엔 간디청소년학교를 세워 교장을 지낸 양희창 형이랑 둘이서 중국 허난성 난양에 다녀왔다. 난양 하면 제갈공명의 땅. 위쪽 허베이성에선 유비와 관우, 장비 삼형제가 형제의 연을 맺었다지. 그 여파인가, 유비의 책사인 제갈공명의 땅 난양에도 도원결의의 상징 복숭아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더군. 만날천날 복숭아만 ‘미친 듯이’ 정말 먹어댔다. “무슨 복숭아를 그렇게 좋아해. 여기 복숭아가 맛이 달긴 해.” “세상에서 먹어본 복숭아 중에 가장 맛난 거 있죠. 거짓말 아니랑께요.” “안 뺏어 먹을 테니 많이 들어요.” 형이 더 가져다주었다. 또 돌아오는 길 동네 촌장님이 한 꾸러미를 안겨주어 열차 칸에서도 먹고, 정저우에 돌아와 묵은 호텔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개조차 내가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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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의 시골편지 요강 나비 푸세식 변소는 특히 여름에 냄새 진동. 구더기도 바글바글. 안채와 멀리 떨어진 변소를 가려면 언니 오빠 누나 형이 꼭 따라가주어야 해. “꼼짝 말고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줘.” 진짜 기다리는지 내뺐는지 일을 보다가 확인도 하지. “지금 밖에 있지?” “아니~ 없다~” 칫, 없긴 뭐가 없어. “사실 나 니 언니 아니야. 히히히히~” 귀신 흉내를 내면 “그만해~ 무서워. 무섭다니까~” 측간 귀신 아니라 모기 흡혈귀가 변소 안과 밖에서 피 사냥을 시작해. 변소에 나타난다는 측간 귀신 이야기라도 들은 뒤엔 변소를 무서워 못 가고 옷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꾹 참아. 똥을 누는 중에 머리를 너풀너풀 풀어 헤친 측간 귀신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 똥 위에 주저앉아 발을 구르며 엉엉 울어버릴 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