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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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김장배추 아주심기 “늦벼는 이제 패는데 올벼는 익어가고/ 밭에 선 허수아비는 낟알 먹는 참새를 쫓는다/ 냇가 근처 논밭에서는 두렁 덮은 모래 걷어내고/ 무너진 두둑 돋우고 거름 주고 밭을 갈고/ 김장할 무와 배추 남보다 먼저 심어 놓고/ 싸리바자 밭을 둘러 사람의 발길을 막고…” 조선 철종 때 김형수가 쓴 ‘농가십이월속시’ 가운데 음력 7월 부분이다. 한반도의 농업 시간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유히 이어지고 있다. 새봄에 기지개를 켠다. 한여름에 모두 정신없이 땀을 흘린다. 이윽고 수확을 앞두고 한 번 쉬었다가, 가을에 수확한다. 겨울은 갈무리하는 때다. 그러고는 농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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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한여름의 진객, 등푸른 생선 “제사상에는 반드시 고등어가 올라야 해요.” 경상북도 북쪽 끝과 강원도 남쪽 끝이 만나는 바닷가에서 듣는 소리다. 부산 기장 위쪽으로, 경북 울진 일대 바닷가에 여름 제사가 돌아오면, 이곳 사람들은 봄여름에 잡아 소금에 절인 고등어를 독에서 꺼낸다. 그놈을 한여름 거칠고 질긴 호박잎으로 손질해서는, 꼬치에 꿰어, 아궁이 잔불에 걸친 석쇠 위에 올려, 모양 잡아 굽는다. 제사상에서 표가 나는 것은 그래도 고등어산적이었다. 제수에 쓸 만한 식료품이라면 손님께 내는 상이나 생일상 등 차린 표를 꼭 내야 하는 상에도 요긴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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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빙수, 달콤한 전기가 등덜미로 달음질친다 얼음 ‘빙’에 물 ‘수’자 쓰는 빙수(氷水). 인류가 물질의 어는점과 녹는점에 착안해 만들어낸 과자다. 호모 사피엔스, 사람의 꾀는 빙수에도 깃들어 있다. 주재료는 얼음이다. 얼음이든 완성된 빙수든 한여름에 오래 견딜 수 없다. 그럼에도 입속에서 녹아 사라지기 전까지는 버텨야 한다. 제과사는 이를 염두에 두고 빙수를 설계·시공한다. 여기에 유지방이 껴들면 아이스크림이다. 청량음료·냉차·소르베(sorbet)·셔벗(sherbet)·아이스크림은 뒤섞여 있다가 빙수를 통해 의미 있게 분화했다. 빙과(氷菓), 곧 얼음과자의 영역에서 빙수의 의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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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쓸모’만 남기고 사라진 바가지 하지감자 한 알, 달걀 한 알쯤 쪄 두고 점심을 지나고 싶은데 손이 허전하다. 점심거리 무심히 담아둘 바가지 하나가 집에 없다. 바가지는 원래 박을 두 쪽으로 켜 만든 주방용품 겸 용기다. 물·술·장 등을 푸거나 뜰 때 좋다. 감자·고구마·밤·호두·달걀·옥수수처럼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먹을거리를 담아두는 데에도 요긴하다. 나무·쇠붙이·합성수지 바가지도 있지만 액체에 띄워두고 쓰기에는 역시나 원래 바가지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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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선조들의 귀물, 장아찌 새봄에 마련한 장아찌가 진가를 뽐낼 계절이 온다. 장아찌. 채소·과실·과채·나무의 어린순 등을 간장·된장·고추장에 박아 맛을 들였다가, 그대로 먹거나 따로 양념을 더해 오래 두고 먹는 반찬이다. 장아찌 한 입이 밥맛을 확 끌어올린다. ‘과실’이라면, 초피(열매)·살구·매실·감 등이 매력적인 장아찌의 재료로 이어지고 있다. 순과 잎은 아니 그럴까. 초피나무, 산초나무, 가죽나무, 엄나무 등의 순과 어린잎이 다 장아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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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병어가 온다 병어가 온다. 모든 수산물이 어느새 한참 비싸졌지만 병어 떠 먹고, 저며 먹고, 뼈째 썰어 먹고, 지져 먹고, 조려 먹고, 쪄 먹고, 구워 먹고, 젓 담가 먹는 한반도 서남 바다의 일상생활이 어디 갈 리가 없다. 계절 따라 맵싸해진 무, 날빛 잔뜩 받은 애호박, 하지에 앞서 영근 감자는 병어조림과 병어지짐에 딱 맞다. 그러고 보니 전남 바다의 병어젓까지! 못 먹어봤으면 젓갈 말씀을 마시라. 이즈음 서남 바다 사람들은 병어 한입 달게 먹고 한여름 맞을 생심을 낸다. 병어와 함께 여름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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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뻔해서 허름한 조선 말고 숙수(熟手) 박이돌(朴二乭)은 토란을 가지고 별미를 만들었다. 조선 숙종도 이를 달게 먹었다. 숙수란 전문 요리사이다. 주방장직을 맡을 수 있는 최고 실력의 요리사가 곧 숙수이다. 박이돌은 자신이 만든 음식의 자취도, 요리사로서 제 이름도 남겼다. 더덕 또한 반찬을 넘는 별미가 될 만하다. 관청에 딸린 노비 강천익(姜天益)은 더덕으로 일종의 튀김과자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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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바다와 제철 한식 연구의 선구자 방신영(1890~1977)은 어회와 어채로 대표되는 조선식 회 조리법을 설명하며 “절기에 따라 있는 생선들로 하느니”라든지 “절기를 따라 하느니” 하는 말씀을 남겼다. 방신영의 시대에는 웅어·병어·도미·민어·숭어·가오리·상어·조개 등이 회 상차림과 수산물을 쓴 일품요리에 요긴했다. 냉장과 냉동 시설이 미미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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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뿌리채소 잎을 먹는 채소가 잎채소이다. 배추·상추·시금치·깻잎 등이 있다. 줄기를 먹는 채소가 줄기채이다. 양파·마늘·죽순·머위·아스파라거스 등이 있다. 열매나 헛열매를 먹는 채소를 열매채소 또는 과채(果菜)라고 한다. 오이·참외·멜론·수박·호박·딸기·토마토·가지 등이 그것이다. 꽃봉오리나 꽃을 먹는 채소가 꽃채소이다. 호박꽃·들깨꽃봉오리·브로콜리·아티초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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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김밥이 있었다 “밥은 심이 없고도 고슬고슬하게 지어서 촛물(쌀 5컵에 반 컵 정도 너무 시지 않고 달게 설탕 타고 소금간을 한다)을 더운밥에 뿌리면서 부채질을 하여 식히면 밥에 윤도 나고 먼 길을 가서도 밥이 식지 않고 맛이 있다. 김말이는 햄이나 소시지 또는 고기 볶은 것과 시금치, 표고, 박오가리, 생선보푸라기 등을 단단하게 너무 굵지 않게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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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새봄 새해가 코앞이다. 한 달 전쯤 김장하며 겨울을 바라보았듯 오늘 새해 설을 바라본다. 그 너머 대보름을 바라본다. 다시 그 너머 입춘과 새봄을 바라본다. 아니 봄은 이미 동지에 움트고 있었다. 한 해 가운데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나면 단 1분씩이라도, 낮은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대보름을 지나면 입춘 기다릴 것 없이 새봄이 박두한다. 거역할 수 없다. 언 땅 아래 잠복하던 봄은 한편으로는 움트며, 한편으로는 새순을 내밀며 새봄을 드러낸다. 정학유(1786~1855)는 ‘농가월령가’의 정월령과 2월령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움파와 미나리를/ 무움에 곁들이면/ 보기에 신신(新新)하기/ 오신채(五辛菜) 부러하랴?” “산채는 일렀으나/ 들나물 캐어 먹세/ 고들빼기 씀바귀며/ 소루쟁이 물쑥이라/ 달래김치 냉잇국은/ 비위를 깨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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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청어 온갖 수산물이 맛난 철이다. 청어가 빠질쏘냐. 특유의 그 기름기와 달큰함 깃든 풍미는 이때가 아니면 누리기 어렵다. 샛노란 알 품은 알배기가 걸린다면 더 좋겠다. 명란뿐만이 아니라 청어알젓도 진미이다. 숭어 어란뿐 아니라 청어 어란도 못잖다. 씹기 좋도록 잔가시를 끊는, 청어회에 어울리는 칼질의 법수를 아는 숙수의 손을 타면 한층 맛난 청어회를 먹을 수 있다. 칼질된 가시는 귀찮은 놈이 아니다. 씹는 맛과 재미를 더하는 부록이다. 청어는 잘 말리면 또 다른 맛이 폭 들기도 한다. 서유구(1764~1845)의 <난호어목지>, 청어 항목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