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에 반도체 회사 팔았다가…유럽車 생산 올스톱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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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간주 디어본의 포드 공장에서 픽업 트럭이 조립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미시간주 디어본의 포드 공장에서 픽업 트럭이 조립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이 미중 갈등의 덫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이 유럽에서 사들인 구형 반도체 기업을 정조준하면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 정부가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인 넥스페리아의 반도체 수출을 통제하면서 유럽 자동차 업계가 며칠 내 생산을 중단해야할 위기에 처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블룸버그는 “반도체 부족 사태가 일주일 안에 주요 부품 공급업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고, 10~20일 내 업계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고 전했다. 독일자동차산업협회(VDA)의 힐데가르트 뮐러 회장은 “가까운 시일 내에 생산이 중단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넥스페리아는 폭스바겐, BMW, 메르세데스-벤츠 등 주요 완성차 업계의 핵심 부품에 필수적인 범용 반도체를 생산한다. 완성차 업체는 넥스페리아 칩이 들어간 부품을 공급받아 조립하는데, 완성차 한 대에 넥스페리아 칩 약 500개가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넥스페리아 인수 배경엔 미국 압력?

독일 함부르크에 위치한 넥스페리아 건물. 로이터=연합뉴스

독일 함부르크에 위치한 넥스페리아 건물. 로이터=연합뉴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넥스페리아는 유럽과 미국, 아시아 전역에 생산시설을 갖춘 다국적 기업이다. 영국·독일에선 실리콘 박막을 프레스하고 중국·필리핀·말레이시아에선 칩을 조립한다. 2019년 중국 스마트폰 제조업체인 윙테크테크놀로지에 인수됐다.

넥스페리아는 지난해 미국 정부가 모회사인 윙테크테크놀로지를 무역 블랙리스트에 올리면서 미·중 갈등의 중심에 섰다. 지난달 30일 트럼프 행정부는 블랙리스트 기업의 자회사까지 제재 대상에 포함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바로 다음 날, 네덜란드 정부는 기술 유출을 이유로 넥스페리아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비상조치를 발동했다. 윙테크테크놀로지 창업자인 장쉐정(張學政) 넥스페리아 최고경영자(CEO)가 정직 처분을 받고 축출됐다.

이를 두고 빈센트 카레만스 네덜란드 경제부 장관은 “우연의 일치”라며 “정부의 결정은 미국의 압력이 아니라 장쉐정 CEO가 유럽연합(EU) 밖으로 지식재산권을 이전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법원이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앞서 6월 미국 측 관계자들은 네덜란드 외무부와의 회의에서 “넥스페리아가 장쉐정 CEO를 교체하지 않으면 넥스페리아가 (블랙리스트의)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네덜란드가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이런 조치를 할 수밖에 없었단 얘기다.

블룸버그는 “또 다른 네덜란드 기업인 ASML도 미국의 압력으로 중국에 장비 수출을 중단해야 했다”며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으로 격화되고 있는 미·중 갈등에 유럽 기업들이 어떻게 휘말리고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짚었다.

기술 견제하는 사이 구형 칩 장악한 中

지난 2019년 6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양자 회담에 참석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019년 6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양자 회담에 참석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넥스페리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의 최첨단 반도체 개발을 견제하면서도 구형 칩 생산에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동안 중국은 구형 반도체 생산을 늘리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고, 외국 기업 인수에도 적극 나섰다. 그 결과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인공지능(AI)에 쓰이는 최첨단 기술엔 못 미쳐도, 구형 반도체 시장에선 점유율을 크게 높였다.

이와 관련, 컨설팅업체 로듐그룹의 레바 구종 이사는 “(중국에 기업을 매각한 이들이) 크게 후회하고 있다”며 “모든 정부가 이런 상황을 매우 불편해하며 기업들이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이번 사태로 세계 곳곳으로 공급망을 분산시켰던 기업들의 ‘독립화’가 가속화될 거란 분석이 나온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넥스페리아 사태는 지정학적 갈등이 글로벌 공급망을 무너뜨리는 걸 보여준다”며 “유럽에서 개발하고 중국에서 제조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더는 지속 불가능해졌다”고 짚었다.

이날 왕원타오(王文濤) 중국 상무부장과 카레만스 장관은 전화 통화에서 넥스페리아 사태의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왕 부장은 “네덜란드 정부가 넥스페리아에 한 조치는 글로벌 산업과 공급망의 안정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며 “시장의 원칙과 법치주의를 고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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