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하도급에 무경험자 투입…국정자원 화재는 ‘인재’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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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달 28일 국정자원 화재 때 불에 탄 리튬이온 배터리가 소화수조에 담겨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지난달 28일 국정자원 화재 때 불에 탄 리튬이온 배터리가 소화수조에 담겨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국가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를 불러온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 본원 화재는 불법 하도급 업체가 공사를 진행한 데다 배터리 이설 경험이 전혀 없는 작업자들이 투입된 것으로 드러났다.

대전경찰청 전담수사팀은 22일 브리핑을 갖고 국정자원 화재와 관련해 국정자원 직원(담당자) 1명과 감리업체 관계자 1명, 공사업체 직원 3명 등 5명을 업무상 실화 혐의로 입건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수사팀은 그동안 국정자원 국장급 간부를 포함해 29명을 조사했다.

수사팀은 관련자 진술을 통해 작업자들이 매뉴얼(안전가이드)을 지키지 않은 데다 부속 전원(랙 차단기)을 차단하지 않고 작업을 진행한 사실을 확인했다. 작업 과정에서 절연제품(부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도 지키지 않았다. 배터리를 사전에 충분히 방전시키지 않은 채 작업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리튬 배터리를 분리할 때는 충전율(SOC) 30% 이하 상태에서 작업해야 한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이재용 원장은 지난 1일 국회 현안 질의에서 “사고 배터리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충전율이 기준인 30%보다 높은 80%인 것을 작업자를 통해 확인했다”고 말한 바 있다.

경찰은 작업자들이 배터리 이설작업에는 처음으로 투입된 사실을 확인했다. 작업자 대부분은 배터리 설치 경험은 많지만, 대규모 배터리를 분리한 뒤 다른 곳으로 이설하는 작업 경험이 없던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작업자 대부분이 전기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뒤 동종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유경험자로 조사됐다.

배터리 신규 설치의 경우 충전율이 낮은 상태에서 이뤄진다. 반면에 이전 설치는 충전율이 높은 상황에서 이뤄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위험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경찰은 이설 경험이 없는 작업자들이 소홀하게 작업을 진행하다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작업자들이 UPS(무정전·전원장치) 신규 설치 경험은 많지만 이설 경험은 없었다”고 말했다.

정확한 화재 원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정밀감정 결과가 나오는 다음 달 하순께 밝혀질 것으로 전망된다. 배터리 안정화 작업과 재충전과 방전, 재현 실험, 정상적인 배터리 여부 확인 등에만 한 달가량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경찰은 화재사고 수사 과정에서 배터리 이설 공사가 불법 하도급을 통해 이뤄진 정황을 확인했다. 전기공사업법에는 하도급을 통한 사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조달청을 통해 국정자원 배터리 이설작업 공사를 공동 수주한 2개 업체는 제3의 업체에 하도급을 준 뒤 공사를 진행했다. 제3의 업체는 공사를 또 다른 2개 업체에 재하도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사를 최초 수주한 2개 업체는 하도급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재하도급한 업체의 직원이 서류상으로 퇴사한 뒤 자신들의 업체에 입사한 것으로 조작한 사실도 밝혀졌다. 서류상으로는 최초 수주한 2개 업체가 공사하는 것으로 꾸민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배터리 이설 과정에서 공사를 최초 수주한 2개 업체 직원은 현장에 없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화재사고와 별도로 공사를 수주한 업체와 하도급 업체를 전기공사업법 위반 혐의로 입건할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공사 과정에 규정을 지키지 않은 부분과 불법 하도급이 이뤄진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 수사를 통해 엄중하게 처벌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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