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도 두렵지 않다, 요즘 주목받는 ‘네오블루칼라’
진윤근 교수는 억대 연봉을 마다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사진 한국산업인력공단]
‘최연소 명장.’
진윤근(54) 한국폴리텍대 에너지산업설비과 교수를 따라다니는 별칭이다. 현대중공업(HD현대중공업)에 재직 중이던 2013년, 그는 선박건조 용접 부문 명장에 올랐다. 공고 졸업 후 용접 일을 시작한 지 20여 년 만이었다. 만 42세 명장은 대한민국 제조업계에서 전무후무하다. 진 교수는 35년간 조선 분야에 근무하며 직접 개발한 용접 관련 특허도 28개나 따냈다. 곡선으로 움직이는 ‘자동 판계용접 장치’와 수직 용접 시 용융금속의 흘림을 막는 ‘받침쇠’ 등이 노력의 산물이다. 회사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명장이 된 지 꼭 10년 만인 2023년, 그는 돌연 산업 현장을 떠나 학교에 자리 잡았다.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후학 양성에 나선 이유가 뭘까. “이대로는 뿌리 산업의 대가 끊길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단다.
진 교수는 “최근 세계가 조선·방산 등 K제조업을 주목하며 기술의 중요성이 다시금 떠오른 건 기쁜 일”이라면서도 “산업 현장에서는 블루칼라가 ‘스킬 엔지니어’로 진화하는데, 사회적 인식과 대우는 아직 부족한 게 안타깝다”고 전했다. 지난 10일 그를 한국폴리텍대 울산캠퍼스에서 만났다.
- 인공지능(AI) 시대의 블루칼라는 어떤 모습인가.
- “사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라는 이분법적인 용어조차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산업 발전에 속도가 붙으며 경계가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산업 고도화 시대, 엔지니어들은 고숙련된 전문 기술로 새로운 어떤 것, 그러니까 혁신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블루칼라의 스킬 엔지니어로의 진화다. 과거처럼 단순 노동에 그쳐선 안 되고, 이른바 ‘네오블루칼라’가 되는 것이다.”
- 산업 현장이 점차 자동화되는데 블루칼라의 역할이 지속할까.
- “조선업만 놓고 보자면 현재 용접 자동화 비율이 85% 정도 된다. 그런데 그게 최대치다. 나머지 15%는 사람 손이 닿을 수밖에 없다. 선박 구조물이라는 게 얽히고설킨 아주 복잡한 형태로 돼 있다. 프로그램을 세팅하면 로봇은 1부터 10까지 같은 값으로 용접한다. 그런데 구조물이 어떻게 직선일 수만 있을까. 갭 크기에 따라 다른 손기술이 들어가야 한다. 내가 곡선으로 움직이는 용접장치를 개발하긴 했어도 사람처럼 구현할 순 없다. 벌크선 한 척 길이가 400m, 높이와 폭은 각각 38m, 36m다. 거대한 크기지만 쭈그려 앉아야만 겨우 작업할 정도의 협소 공간도 많다. 이런 일은 로봇이 대체할 수 없다.”
진 교수가 꼽은 ‘조선 기술’은 100여 개. 그는 “용접뿐 아니라 전기·설비 등 모든 직종에 있어서 AI가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불이 난 국가정보자원관리원도 AI나 로봇이 대체 못할 좋은 예로 들었다. 정보자원관리원의 데이터 보관과 분석은 AI가 한다. 하지만 여기에 필요한 설비를 만들고, 유지·보수하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진 교수는 “그게 미래 블루칼라의 역할이니 더는 단순 노동자로 치부할 순 없다. 제자들에게도 기능과 기술을 겸비한 스킬 엔지니어가 돼야 한다고 늘 얘기한다”고 말했다.
- 학생들을 가르치며 블루칼라의 위상 변화를 체감하나.
- “폴리텍대의 경우 학생들의 연령대가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매년 입학생의 연령대가 높아져서 올해는 만 28세에 육박한다. 이들 대부분이 사회생활 경험이 있고, 30%가량은 타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학교로 돌아온 ‘U턴’ 학생이다. SKY는 물론 대학원 출신도 있다. 학업이 우수한 학생들도 기술을 배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폴리텍대에 들어오는 것이다. 내가 1989년 처음 취업할 때만 해도 기술을 배운다는 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진짜 배가 고파서 기술을 배우려는 애들이 과연 몇이나 되겠나. 자기 적성을 찾아서 혹은 더 높은 목표를 위해 기술을 배우려는 것이다. 블루칼라가 블루칼라의 위상을 스스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도 현장에선 숙련 기술인이 부족하다고 한다.
- “명장이 되려면 한 직종에서 최소 15년 이상의 숙련 기술을 닦아야 한다. 그렇게 익힌 기술은 물론 개인적 성과이기도 하지만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된다. 문제는 명장 후보자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마이스터고나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는 느는데 우리 사회가 아직 그 친구들을 받아들일 여건이 안 된 것 같다. 그 친구들이 15년 동안 현장에서 배우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숙련 기술인, 나아가 명장이 될 수 있다.”
- 기술 강국의 명맥이 이어지려면.
- “기술자에 대한 충분한 기회와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협력사 직원들도 노력하면 정규직 시켜주고, 교육도 꾸준히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인재가 부당한 대우에 실망해 현장을 떠나고, 그 자리를 저숙련 외국인 노동자가 채우게 놔두는 것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다. 우리나라 조선업이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해운업이 발달해서도, 엄청난 자본이 투입돼서도 아니다. 손기술이다. 우리와 똑같은 설계도를 보고도 다른 나라가 우리처럼 만들 수 없는 건 결국 손기술 차이다.”
진 교수는 “우리 손기술은 천부적인가”라고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AI 시대에도 그 좋은 DNA는 대물림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