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9일 오전, 인천시 계양구 병방동의 한 아파트 옹벽 아래 차량들이 일렬로 주차된 틈에서 송미순(가명·62)이 살해된 채 발견됐다. 시신은 잔혹하게 훼손돼 있었지만 수백 세대가 사는 단지임에도 그날 밤 누구도 피해자의 비명을 듣지 못했다. 중앙포토
2008년 8월 19일 오전 6시30분. 인천시 계양구 병방동의 한 구축아파트 단지.
하의가 벗겨진 여성의 시신이 참혹하게 훼손돼 있다. 얼굴은 심하게 구타당했는지 피멍이 들었고, 목에는 살인자의 손아귀 자국이 깊게 남아 있다.
여기까진 강력계 형사들에겐 그저 통상적인 시신일 뿐이다. 문제는 얼굴 아래다. 피해자의 가슴을 범인이 이빨로 콱 깨문 치흔(齒痕) 자국과 더불어 신체 일부에는 막대기가 꽂혀 있다.
형사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신고자가 누구냐고 묻자, 야간 근무조인 지구대 경관은 경비원 박모(64)씨라고 했다.
“한 주민께서 지나가다가 시신을 보고 놀라서는 절 불렀어요. 그래서 바로 경찰에 신고한 거고….” 경비원은 면목 없다는 낯으로 우물거렸다.
아파트 단지엔 건물 옹벽을 따라 차량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시체는 그런 옹벽 아래에서 발견됐다. 460여 세대가 거주하는 단지에서 이런 엽기적인 범죄가 벌어진 것이다. 피해자의 절규를 주민 누구도 듣지 못했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거기다 경비 초소까지는 불과 10m 거리다.
시신에 범인에게 저항하다 생긴 방어흔도 있다. 맥없이 쓰러진 건 아니라는 의미다.
“처음부터 목을 콱 졸라서 소리를 못 내게 한 거지.” 한 형사가 의문을 품는 지구대 경관에게 시늉을 해보인다. “아니면 근처에서 죽인 뒤 여기다 유기하고 달아났거나. 아무튼 어린애만도 못한 지능이야. 진짜 숨기려면 여기 지하 보일러실에 뒀겠지. 이렇게 노상에다 둔 걸 보면 애초에 자가용도 없는 놈 같은데.”
곧이어 인근을 탐색하던 후배 형사가 달려왔다. 20m 떨어진 화단에서 불에 그을린 핸드백이 발견됐는 것이다. 화장품 세트나 카드 따위가 바닥에 흩어져 있다. 현금은 보이지 않았다.
목격자도 없고, 명확한 동기도 없고, 용의자도 없는 살인사건. 시신이 누워 있는 옹벽 위의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2008년 8월 18일 밤, 송미순(62)은 부천 친구의 생일 모임을 마치고 이 골목 부근을 따라 귀가했다. CCTV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포착됐으나 뒤를 미행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중앙포토
피해자의 신원은 송미순(가명). 62세. 아파트 근처 다세대주택 3층에서 남편과 살았다. 건물이 남편 김정석(가명)의 명의여서 임차인들의 전월세로 생활하는 덕에 형편이 부족하진 않았다.
경찰서 조사실로 불려온 김정석은 전날 오전 아내가 경기도 부천의 친구 생일파티에 다녀온다며 나갔다고 했다. 그러곤 밤새 들어오지 않아 이상하던 차에 경찰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금반지 3개와 팔찌, 금목걸이가 안 보입니다.” 감식반의 현장 사진들을 힘겹게 들여다보던 그가 말미에 언급했다. 송미순이 밤 늦게 귀가하다가 강도살인을 당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녀가 전날 밤 11시쯤, 인천 1호선 임학역에서 내린 뒤 귀가하는 장면이 거리의 CCTV에 포착됐다. 다만 여러 번을 돌려봐도 그녀를 뒤쫓거나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거동 수상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김정석을 유력 용의자로 수사했다. 송미순은 평소 화려하게 치장하고 춤추러 다니는 걸 즐겼다고 했다. 반면에 김정석은 이른 아침부터 폐지를 수집하러 돌아다닐 만큼 근면하다. 부부 간의 남모를 치정이 얽혀 있던 것은 아닐까. 가끔은 부부싸움 끝에 한쪽이 살해하고 나서 사건을 위장하려 든다.
“살인사건은 보통 피해자 중심의 수사다. 범인이 가족으로 밝혀진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일반인들은 가늠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 가슴에 남긴 범인의 치흔과 남편의 것이 일치하지 않았다. 물론 치흔이 범인의 것이라곤 단정할 수 없고, 내연관계의 누가 그 흔적을 남긴 후 시간이 흘러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을 수도 있다. 다만 증거가 없다. 부부싸움에 대한 주민 신고도, 불륜을 의심케 할 계좌 내역도.
그리고 그때 동네 양아치 무리가 살인사건에 대해 뭔가 안다고 떠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