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시장 고공행진
추석 연휴를 마치고 개장한 코스피가 10일 반도체주 강세에 힘입어 사상 처음으로 3600선을 돌파했다. 이날 코스피는 전장(지난 2일)보다 1.73% 상승한 3610.60으로 장을 마감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한국증권거래소 전광판에 당일 종가가 표시되고 있는 모습. 김정훈 기자
코스피 지수가 ‘3600’의 벽을 넘어섰다. 10일 추석 연휴 직후 열린 첫 거래일, 장 시작 2분 만에 3606선을 돌파한 뒤 3610.60으로 장을 마치며 새로운 정점을 찍었다. 지난 2일 3500선을 밟은 지 거래일 기준 하루 만에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시총 1·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대장주가 코스피 상승을 주도했다. 삼성전자는 전장보다 6.07% 오른 9만4400원에, SK하이닉스는 8.22% 오른 42만8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두 회사 모두 종가기준 최고가 기록이다. 코스닥도 전 거래일보다 5.24포인트(0.61%) 오른 859.49에 장을 마쳤다.
전날엔 엔비디아가 아랍에미리트(UAE)에 AI칩을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장중 1.8% 상승하며 사상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미국 AI 관련주가 상승하자 국내 반도체주도 수혜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국내 증시의 급등세는 세계 자산시장의 랠리와 맞물린다. 코스피는 올해 비트코인을 제치고 금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미국·일본·중국·유럽 증시도 일제히 상승세를 보이며 글로벌 자산시장이 ‘에브리싱 랠리(Everything Rally·모든 자산이 오르는 현상)’로 들썩이고 있다. 월가에서는 “비관론자의 항복(surrender of the bears)”이란 진단까지 나온다.
중앙SUNDAY와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가 집계한 ‘17개 주요 자산군별 올해 투자 수익률’(1월 1일~9월 26일)에 따르면 금(43.3%)과 국내 주식(41.1%, 코스피 기준)이 가장 높았다. 미국(23%), 일본(18%), 유럽(16%) 주식도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했다. 비트코인도 숨 고르기 후 상승세로 돌아서 17.43% 올랐다. 글로벌 리츠(8.4%)와 서울 아파트(7.5%), 원자재(1.8%)까지 강세를 보이며 자산시장은 ‘모든 게 오르는 장세’로 치닫고 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다만 원화 약세는 변수다. 1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원화값은 1421.20원에 마감, 5개월 만의 최저 수준(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떨어졌다. 미국의 관세 불확실성과 대미 투자 부담 등이 원화 약세를 자극했다. 통상 국내 시장에서 외국인 매수세가 강하면 환전 수요로 환율이 낮아지지만, 연휴 기간 달러 강세가 한꺼번에 반영되며 이례적 흐름이 나타났다.
5년 전엔 유동성이 주도, 이번엔 미국 연준발 금리 인하 기대감이 방아쇠
금은 전통적으로 ‘최후의 피난처’로 불리지만, 이번에는 에브리싱 랠리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위기 회피 수요와 유동성 랠리가 맞물린 이례적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국제 금 시세는 8일(현지시간) 온스당 4070.5달러로 최고치 기록을 다시 세웠다. 은값도 이날 장중 49.57달러에 거래되며 2011년 4월 이후 14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새로 썼다. 국내에서는 환율 불안까지 엄습하며 원화가 아닌 자산을 보유하려는 수요까지 더해졌다. 국내 시세가 국제 시세보다 비싼 ‘김치 프리미엄’이 붙으며 금 한 돈(3.75g) 가격은 80만원을 넘어섰다. 금·은 투자 전문가인 조규원 스태커스 대표는 “경기 침체 우려, 금리 인하, 인플레이션, 여기에 트럼프발 불확실성까지 겹치며 금에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고 말했다.
이재명 정부 확장 기조에 국채는 역주행
그래픽=남미가 기자
코스피는 10일 전인미답의 ‘3600’ 문을 열었다. 지난해 말 2399.49에서 올 한해 숨 가쁘게 뛰어올라 마침내 3600선을 돌파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완화 기대가 증시 전반을 뜨겁게 달구면서다. 새 정부의 상법 개정과 지배구조 개혁 추진으로 외국인 자금이 대거 유입됐다. 반도체 업황 회복 기대도 증시를 끌어올린 주요 동력이 됐다. 미국 증시도 최근 흐름이 예사롭지 않다. S&P500은 지난달까지 3개월 동안 25차례나 사상 최고치를 갈아 치웠다. 엔비디아 등 빅테크주는 AI 수요 확대의 중심에 서면서 폭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과 유럽 증시도 동반 반등했다. 일본은 엔저 효과와 기업지배구조 개선책이 맞물리며 외국인 자금이 밀려들었고, 니케이225는 지난해 말 3만9894.54에서 지난 8일 4만7734.99로 뛰었다. 유럽 역시 금리 인하 기대와 경기 회복 신호, 에너지 가격 안정에 힘입어 유로스톡스50이 같은 기간 4895.98에서 5649.74로 급등했다. 글로벌 유동성에 정책 모멘텀이 더해지며 증시 랠리가 지역과 국경을 가리지 않고 확산하는 모습이다.
에브리싱 랠리는 5년 전에도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직후 각국 정부가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전례 없는 돈 풀기에 나서자, 시장에 쏟아진 유동성이 주식·금·원유 등 대부분의 자산 가격을 밀어 올렸다. 2020년 4월부터 12월 말까지 S&P500은 53.8%, 나스닥은 72.7% 급등했고, 일본(45.3%)·중국(48.3%)·인도(80.8%)·브라질(67.4%) 등 주요국 증시도 폭발적인 상승률을 기록했다.
당시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7년에 걸쳐 풀린 유동성의 70%가 불과 1년 안에 풀릴 정도로 돈이 넘쳐흘렀다. 낙폭 과대에 따른 반발 매수까지 겹치며 “현금은 쓰레기(Cash is Trash)”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산이 뛰는, 문자 그대로의 에브리싱 랠리가 펼쳐졌다.
그러나 이번 랠리는 결이 다르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가 몰아쳤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고금리 시대를 거친 뒤 연준의 ‘보험성 금리 인하’가 방아쇠가 됐다. 팬데믹 직후처럼 모든 자산이 일제히 오르는 양상은 아니다. 금리 인하 국면에도 한국 국채는 역주행했다. 금리가 내리면 국채 가격이 오르는 공식이 국내에선 통하지 않았다. 새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로 발행 물량 부담이 커진 데다, 원화 약세와 환율 불안으로 외국인 수요마저 줄어든 결과다. 원유와 달러화 가치 역시 하락하며 이번 랠리에서 소외됐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달러·금리 같은 전통 변수와 무관하게 금이 독주하는 것처럼, 지금은 유동성의 낙수효과가 아닌 ‘가장 확실한 자산’에 쏠림이 집중되는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일종의 ‘선택적 에브리싱 랠리’에 가깝다고 분석한다.
부동산도 소위 ‘한강벨트’ 등 인기 지역 중심으로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송파구 아파트값은 지난달 29일까지 누계 기준 13.98% 올라 서울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성동구(12.03%), 서초구(10.86%), 강남구(10.73%) 등 강남 3구와 성동구도 두 자릿수 상승률을 보였다. 반면 중랑구(0.4%), 도봉구(0.41%), 금천구(0.82%), 구로구(1.86%) 등은 2%에도 미치지 못했고, 지방 아파트 가격은 여전히 하락세다. 고준석 연세대 경영전문대학원 상남경영원 교수는 “경기·인천만 해도 미분양이 쌓이고 있다”며 “지금 부동산 시장은 전형적인 ‘서울만의 랠리’”라고 했다.
시장에선 경기 둔화와 ‘K자형(양극화 심화)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고용은 정체되고 실물 경기는 둔화하는 데, 자산 시장만 활황을 보이는 불균형에 대한 불안이 짙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달 “연준은 특정 자산의 특정 가격을 목표로 삼지 않지만 현재 주가는 상당히 높다”며 증시 과열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실제로 최근 미국 증시의 총 가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63%까지 치솟았다. 닷컴 버블 정점(212%)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주가 수준은 실물 경기와 괴리가 크다”며 “경기 회복 기대도 있겠지만, 금리 인하로 인한 유동성 증가를 과대 반영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유동성 장세…‘주가 급락’ 경계 우려도
이 같은 괴리 속에서 투자자의 행태도 달라졌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욜로(You Only Live Once) 투자가 만연하고 있어 예측이 불가능한 시장”이라고 진단했다. ‘인생 뭐 있어’ 식의 단기 수익 추구가 늘면서 상한가 따라잡기(상따) 전략, 레버리지 투자, 밈 주식 쏠림이 빈번해졌고 그때그때 이슈에 따라 폭등 종목이 바뀌는 모습이다. 기업 실적이나 펀더멘털에 기초한 전망은 점점 힘을 잃고 있다. 월가에서도 랠리가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퍼질 경우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제프 슐츠 클리어브리지 인베스트먼츠 투자전략가는 “지금의 증시 랠리는 안도감을 주지만 지속 가능성에는 의문이 있다”며 “포트폴리오를 배당성장주 및 다양한 섹터로 분산할 것”을 권고했다.
향후 변곡점은 경기와 물가다. 미국 경기선행지수는 올해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간 2.7% 하락했다. 현재 랠리의 바탕이 되는 ‘유동성’의 지속 여부도 관건이다. 자비에 가백스 하버드대 교수가 제시한 ‘비탄력적 시장 가설’에 따르면, 주가는 기업의 실적보다 시장에 풀린 자금의 양(수급) 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유동성 장세는 자금이 빠져나갈 경우 주가 급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내포한다.
3600선 고지를 밟은 코스피에 대한 국내 투자자들의 시각도 엇갈린다. “이러다 4000 가겠네”라는 기대와 “이제 번지점프대에 올라섰다”는 불안이 교차하며 갈팡질팡하는 분위기다. 다만 국내 증시는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환경과 반도체 가격 상승에 힘입어 추가 모멘텀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일시적 조정은 올 수 있지만 우호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염승환 이베스트증권 이사는 “상법 개정, 금리 인하, 반도체 사이클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당분간 국내 증시 강세장은 유지될 것”이라며 “중장기적으로 코스피 4000은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다만 그는 “미·중 관계나 APEC 정상회의 결과에 따라 단기 변동성은 확대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파죽지세인 금값의 장기 전망도 낙관론이 우세하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연준의 독립성이 훼손될 경우 내년 금값이 온스당 50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도이치뱅크 역시 2026년 평균 금 가격 전망을 온스당 4000달러로 내다봤다. 다만 단기 과열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조규원 대표는 “장기적으로 금값 상승 여력은 여전하지만, 최근 단기 급등과 김치 프리미엄을 고려하면 이미 자산의 10% 이상을 금·은에 배분한 투자자는 오히려 관심이 덜한 시기를 기다리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