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명도 살지 않는 읍·면 400곳…'기후안전마을' 같은 미래형 모델 확산시켜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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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1호 08면

농가인구 200만명 붕괴 직전, 급페달 밟는 농촌 붕괴

1403곳. 전국에 위치한 읍·면의 숫자다. 이 가운데 거주 인구 상위 10%에 전체 농촌 인구의 절반가량이 모여 산다. 반면 하위 10%에 해당하는 읍·면에는 고작 1.6%만 거주한다. 2000명 미만의 읍·면이 400곳을 넘어서고 이곳의 평균 고령화율은 50%에 달한다. 농촌 인구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숫자다.

최근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과제 중 하나는 ‘농촌 소멸’이다. 총인구 감소와 저출생·고령화, 청년층의 도시 집중이 맞물리면서 농촌 인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는 단순히 사람 수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가 줄고 고령자가 늘면 상점·학교·의료기관 등 기초 서비스가 하나둘 사라진다. 수도나 도로 같은 기반 시설 투자가 중단되면서 공간은 빠르게 노후화되고 청년 부족은 지역 경제를 마비시킨다. 결국 청년층은 더 빠르게 도시로 떠나고 농촌은 최소한의 기능만 간신히 유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다. 공동체 기반이 약화되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사라지고 전통문화 계승이나 농촌 경관·농업유산 관리도 멈추게 된다.

이처럼 ‘농촌다움’이 사라지는 순간 국민은 농촌을 단순히 ‘시골’로만 인식하게 되고 국토 전체의 잠재력이 함께 소멸하게 된다. 농촌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 자식 세대들이 자라나면 농촌은 글자 그대로 ‘소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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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일은 국내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유럽연합(EU)에선 2014년 이후 10년간 주요 농촌 거주 인구가 약 800만 명(8.3%) 줄었다. 이에 대해 선진국들은 정보통신기술(ICT)과 스마트 기술을 적극 활용해 생활서비스를 혁신하고 주민 협력 체계를 지원하며 농촌을 국가의 미래 자산으로 바라보고 있다.

반면 한국의 농촌 정책은 오랫동안 도시 대비 열악한 여건을 보완하는 ‘시혜적’ 접근에 머물렀다. 이젠 우리도 농촌을 ‘정책 수혜자’가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투자 대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농촌은 국토의 89%를 차지하고 있으며 식량안보·생태자원·여가공간 등 국가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런 만큼 농촌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육성하는 전략의 전환이 필요할 때다.

무엇보다 농촌 자원을 활용한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지역 특산물과 문화를 기반으로 미식·관광 벨트를 조성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기후안전마을·고령친화마을·에너지자립마을 등 미래형 모델을 확산해야 한다. 농촌은 인구 비중이 18.8%에 불과하지만 전체 사업체의 22.5%가 위치한 공간이기도 하다. 돌봄·청소·수리 같은 생활 편의 서비스 창업을 지원하고 청년들이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창업·금융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법과 제도의 정비도 절실하다. 지금의 제도와 법률은 인구가 증가하고 사업이 확장하던 시기에 맞춰 설계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구 감소와 농촌 소멸 시대에는 기존 제도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농촌 재생 패러다임에 맞게 제도와 법률을 전면 점검하고 필요한 경우 특정 지역에 인적·물적 자원이 집중될 수 있도록 과감한 규제혁신도 뒤따라야 한다.

농촌은 단순히 소멸 위기에 놓인 주변부가 아니다. 인구 감소, 고령화, 빈집과 유휴시설, 기후위기와 재해 등 국가적 난제를 농촌은 이미 앞서 경험하고 있다. 농촌의 현재는 5년 뒤 한국의 고령화율, 10년 뒤 청년 인구 구조를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다. 따라서 농촌의 변화를 연구하고 다양한 정책 실험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건 곧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농촌을 지키는 일은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일을 지키는 국가적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이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촌정책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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