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인구 200만명 붕괴 직전, 급페달 밟는 농촌 붕괴
지난 17일 전북 고창군 농가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고추를 분류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지금은 바쁘니까 쫌 이따가 이따가….”
가을비가 내린 지난 17일 전북 고창군 대산면. 한 농가에 외국인 근로자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논밭을 둘러보다 잠시 비를 피해 비닐하우스를 찾은 외국인 근로자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응우엔 티하(46)는 기자가 다가가자 손사래를 쳤다. “수확한 고추를 분류하고 배추 모종을 옮기는 게 오늘의 임무인데 지금은 동료들과 손을 맞춰야 하니 일을 마친 뒤에 얘기하자”면서다. 잠시 뒤 휴식시간에 마주한 그는 “베트남에 가족을 두고 홀로 한국에 왔다”며 “기회가 되면 내년에도 계절근로자로 이곳에 와서 일하며 세 딸 교육비를 마련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젠 외국인 근로자 없이는 농사 못 지어요.”
이들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한 농가 소유주인 안찬우(53)씨는 “일손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추수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벼농사와 배추·고추 등 밭농사를 함께 짓고 있다는 안씨는 “국내 인력만으로 한 해 농사를 감당하는 건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라며 “지금은 고추 수확기라 그나마 여유가 좀 있지만 조금 있으면 벼를 수확해야 하는 시기여서 일손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올해 외국인 근로자 13명을 고용했다는 안씨는 “내년엔 20명을 신청할 계획인데 그만큼 배정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지자체, 전용 기숙사 마련해 영입 공들여
안씨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이날 오후 고창군 고창읍내에서 만난 김창환(47)씨는 일손을 구하러 고창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김씨는 “파종이나 추수 시기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요즘 대부분의 농가들이 일손 구하기에 혈안이 돼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일부 농가에선 불법 외국인 근로자라도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손이 급하다”며 “그나마 고창엔 외국인 근로자가 많이 들어왔다길래 혹시 남는 일손이 없나 싶어 와봤는데 역시나였다”고 허탈해했다.
고창군은 외국인 근로자 전용 기숙사를 마련하는 등 농가 일손을 보탤 외국인 근로자 도입에 공을 들여 왔다. 올해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3200명의 외국인 근로자가 입국해 일하고 있는데, 이 정도 인력 규모는 고창군의 수요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하다는 게 현지 농민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저출산과 고령화, 수도권 인구 집중이 불러온 ‘농촌 소멸 시대’. 농가 인구 200만 명 붕괴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가을철 농촌에선 일손 구하기에 비상이 걸렸다. 통계청에 따르면 1980년 1082만 명에 달하던 농가 인구는 지난해 말 200만4000명까지 급감했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는 200만 명 밑으로 떨어질 게 확실시된다. 가구 수 기준으로는 2023년(99만9000가구)에 이미 100만 가구가 무너졌고 지난해 말에는 97만4000가구까지 줄어들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앞으로 8년쯤 뒤엔 농사지을 사람이 사실상 없는 면 단위 지역이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지속적인 인구 감소 추세 속에서 인력 부족은 농촌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지난해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서도 농업인들이 지목한 가장 큰 위협 요소로 일손 부족(49.5%)이 절반을 차지했다. 이를 해소할 방안으로는 외국인 인력 활용(26.4%)이 첫손에 꼽혔다. 이미 작물 재배 농가의 64.2%가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을 정도로 농민들 사이에선 외국인 근로자가 일상이 됐지만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란 얘기다.
고창군 외국인 계절근로자 관리센터. 최기웅 기자
이에 정부와 전국 지자체들은 계절근로(E8) 비자로 외국인 근로자들을 초청해 농가에 인력을 공급하고 있다. 계절근로 비자는 외국인 근로자가 농가와 계약해 농번기에 국내에 체류하며 일한 뒤 농한기엔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한 제도다. 외국인 근로자는 고용 농가의 재계약 요청이나 추천을 받으면 이듬해 다시 E8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지난해 E8 비자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 근로자는 6만7778명에 달한다. 정부도 농촌 현장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 올해부터 별도의 연장 신청 없이 국내 체류 기간을 최장 8개월로 늘려주고 E8 비자 대상자도 전년 대비 41.2% 늘어난 9만5700명을 배정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선 상태다.
그러나 농업 현장에선 단순히 외국인 근로자 규모를 늘리는 것만으론 인력 부족 문제가 해소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고 있다. 당장 농가 입장에선 주로 동남아시아 출신인 외국인 근로자들의 농업 숙련도를 일정 수준 국내 인력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까지 높이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외국인 근로자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적응할 만하면 계절근로 비자 기간이 끝나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상황도 반복되기 일쑤다.
3년째 외국인 계절근로자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캄보디아 출신 쁘록 나완(33)도 “한국에 온 첫해엔 캄보디아에선 본 적이 없는 기계로 농사를 짓는 모습에 당황하기도 했고 어려움도 많았는데, 다행히 3년간 경험하다 보니 한국식 농법에 익숙해지면서 지금은 한결 편해졌다”며 “앞으로 본국으로 돌아가면 이 농법을 적극 적용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전용 기숙사에서 통역관들과 대화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자체들도 자체 예산으로 현지인 통역관을 채용하는 등 외국인 근로자 대책 마련에 나섰다. 올해 초부터 고창군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통역관으로 근무 중인 레티 이엔리(35)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문화적 차이에 따른 것”이라며 “사소한 일이라도 통역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다 보면 오해도 줄고 만족도 또한 높아지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농가 소득 늘려 ‘돌아오는 농촌’ 만들어야
문제는 농촌 소멸이 갈수록 가속화하는 현실 속에서 외국인 근로자 도입은 미봉책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청년층의 지속적인 유출과 남은 인력의 고령화라는 양대 난제에 직면한 농촌의 붕괴를 막으려면 보다 근본적인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실제로 지난해 국내 농가 인구의 절반 이상(50.8%)은 70세 이상 고령층인 반면 50세 미만은 16.3%에 불과했다. 농업 종사자 열 명 중 8~9명은 50세 이상인 게 오늘날 한국 농촌의 현실인 셈이다.
한때 인기를 모았던 귀농도 점차 시들해지는 추세다. 중장년층도 도시 생활을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해지면서 “나이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 볼까”라는 인식도 급격히 줄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매년 1만 가구 이상 농촌으로 향하던 귀농 인구도 지난해엔 8243가구로 전년에 비해 20% 이상 줄면서 귀농 인구 1만 명 시대를 마감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농촌 소멸에 제동을 걸려면 농업 소득뿐 아니라 농업 외 소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농가 평균 소득은 5060만원으로 도시근로자(2인 가구 기준) 평균인 6576만원보다도 1500만원 이상 적은데, 그중에서도 농업 소득은 958만원에 불과하고 숙박·음식점 등 관광·레저 소득은 2014만원으로 두 배 이상 많았던 실정이다. 생산성 향상 등으로 ‘농업’을 살리는 방안과 농업 외 소득 증진을 통해 ‘농촌’을 살리는 방안을 함께 강구해야 한다는 제언이 잇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명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농업 소득이 정체된 가운데 국내 농가의 75%는 농업 소득만으론 생활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도시에도 다양한 산업이 존재하는 것처럼 농촌에서도 농사를 짓지 않고도 소득 창출이 가능해져야 농촌 경제도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렬 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장은 “지금의 농촌은 지역 공동화 위기에 처한 지방 소도시들의 10년 뒤 미래 모습일 수 있다”며 “정부와 지자체도 보다 체계적인 정책 지원을 통해 더 늦기 전에 ‘다시 찾는 농촌’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