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인구 200만명 붕괴 직전, 급페달 밟는 농촌 붕괴
김덕영씨 부부가 전남 강진군 자택 마당에서 자녀들과 휴식을 취하고 있다. 황건강 기자
“내년 2월 결혼합니다.”
지난 18일 전남 강진군 병영시장에 위치한 파스타 가게. 서울 토박이인 임고은(36)씨가 미소를 지으며 주방에 서 있는 한 남성을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예비 신랑 박민재(30)씨는 부산에서 나고 자라 직장에 다니던 ‘부산 사나이’. 30대 절반이 결혼하지 않는 시대에 400여㎞ 떨어진 서로 다른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 남녀가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강진에 터를 잡고 가족이 되기로 한 계기는 강진 특산물인 여주였다.
2년 전 서울에서 청년 창업을 준비 중이던 임씨는 쓴 오이로 불리는 여주로 피클을 만들 생각에 강진을 찾았다. 생애 처음 와본 곳이지만 푸르른 자연이 이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침 강진군청과 청년협동조합 ‘편들’에서 진행한 청년 홈스테이에 참가하게 되면서 그의 강진살이가 시작됐다.
홈스테이를 마친 뒤에도 강진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던 그는 결국 귀촌을 결심했다. 그러자 임씨와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 박씨도 부산의 회사를 그만두고 흔쾌히 강진행에 동참했다. 임씨는 “오래 살려고 올해 자비로 집도 구입했다. 서울처럼 집값이 비싸지 않아 자가 마련이 어렵지 않았다”며 활짝 웃었다.
국내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는 시대. 농촌 소멸 위기 속에 귀촌을 선택한 3040세대는 이들만이 아니다. 올여름 전남 강진군 옴천면의 한 마을로 이사를 마친 직장인 김덕영(42)씨도 강진의 자연환경에 반해 귀촌을 선택했다. 1남 4녀의 아버지인 김씨는 도시에선 다섯 자녀가 마음껏 뛰어놀긴커녕 층간소음을 걱정해야 하는 환경이 늘 마음에 걸렸다. 결국 그는 서울 회사엔 격주로 출근하는 대신 급여를 낮추기로 하고 지난 8월 말 귀촌했다. 김씨는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지만 아이들과 뛰놀던 추억을 쌓을 시간은 지금뿐”이라며 “아이들이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잘한 결정이다 싶다”며 만족해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이들처럼 농촌살이를 선택한 귀촌 가구는 지난해 31만8658가구 42만2789명에 달한다. 각각 전년 대비 4.0%, 5.7% 늘어난 규모다. 같은 기간 귀농 인구가 20% 이상 줄어든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이들 대부분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농촌’에 살기 위해 귀촌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림축산식품부 조사에서도 귀촌을 선택한 이유로 자연환경(19.3%)과 정서적으로 여유 있는 삶(19.0%)이 첫손에 꼽혔다. 더 이상 ‘농촌=농업’으로 여기지 않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귀촌을 결심한 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적 관문도 만만찮다. 당장 주거 문제가 넘어야 할 산이다. 농촌에 연고가 있는 경우(74.3%)가 대다수인 귀농인들과 달리 귀촌인의 절반(48.9%)은 농촌에 연고가 없는 도시 출신이다 보니 살 집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반면 소멸 위기에 처한 농촌 마을에선 갈수록 늘어나는 빈집이 골칫덩이다. 방치된 빈집은 안전 문제로 이어질 우려도 크다. 그런 가운데 강진군은 이런 빈집을 리모델링한 뒤 월 1만원만 받고 귀촌인들에게 제공하는 ‘강진품애(愛)’ 사업을 도입해 호평을 받았다. 경쟁률이 22대 1에 달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모은 이 사업을 통해 지난 2년간 78가구 218명이 귀촌해 강진에 정착했다. 인구 3만여 명인 강진군의 이 같은 성공 사례는 전국 농촌 지자체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고 정부 우수 정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일곱 식구가 함께 강진으로 이주한 김씨도 귀촌 결심 후 살 집을 마련하는 게 첫 번째 과제였다. 당장 그의 발목을 잡은 건 나이였다. 지자체들이 귀촌을 결심한 이들에게 각종 지원과 혜택을 제공하고 있지만 정작 40대는 지원 자격에서 제외돼 있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김씨는 “다행히 강진군에선 나이 제한을 두고 있지 않아 강진품애 사업에 지원해 귀촌할 수 있었다”며 “농촌의 고령화 문제로 젊은이들이 더 필요한 게 현실이겠지만 농촌에서 자녀를 키우고 싶어 하는 40대에게도 문턱을 낮추면 어린 미래 세대가 함께 귀촌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주거 문제를 해결한 귀촌인들의 두 번째 고민은 직업 문제였다. 농사를 지어도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경험담 속에 농촌에서 농사짓기를 망설이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나 고속철도와 재택근무, 온라인 상거래 등의 발달로 지역 간 거리가 크게 좁아지면서 귀촌인들의 고민도 한결 가벼워졌다. 임씨는 “요즘 귀촌을 결심하는 사람들 중에 농사로 돈을 벌어 생활하겠다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며 “인터넷 시대를 맞아 농촌에서도 얼마든지 생업을 유지하며 삶의 질도 높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박준기 한국농업경제학회장(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농촌 공동화를 막기 위해선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농촌에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제반 환경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며 “정부와 지자체도 이를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 개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