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남자' 푸틴 뒤엔 여전한 막강 팬덤…내부통제, 반서구 고삐 더 죌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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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9호 08면

집권 25년 ‘푸티니즘’ 향배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추구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1세기의 차르’라고 불린다. 총리 시절(2008~12년)에도 실질적인 1인자였던 것을 포함하면, 그의 통치 기간은 만 25년이 넘는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집권 5기를 시작했다. 6년 임기를 마치면 스탈린의 집권 기간(1924~53년)인 29년을 넘어서게 된다. 2030년 대선에서도 승리할 경우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집권하게 된다. 이럴 경우 푸틴의 통치 기간은 36년으로 18세기 예카테리나 2세의 재위 기간인 34년을 추월하게 된다. 역사상 표트르 대제(39년 재위)만이 푸틴보다 더 오래 통치한 인물로 남게 된다.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한 푸틴의 통치 이념인 푸틴주의를 분석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따른 러시아의 현 상황을 진단해봤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그래픽=남미가 기자

푸틴 대통령과 21세기의 러시아는 분리하기 어렵다. 푸틴 대통령의 통치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강한 국가 건설’을 표방한 푸틴의 국정 철학과 통치 이념은 ‘푸틴주의(Putinism)’다. 푸틴주의는 다음 네 개의 영역, 이를테면 주권 민주주의(정치), 국가자본주의(경제), 유라시아주의(대외 정책), 국제기독교 보수주의(사회)가 골간을 이룬다.

‘주권 민주주의’는 일종의 러시아식 민주주의로 국내 정치적 질서와 안정을 담보하기 위한 국정 운영 방침으로 권력 수직화, 즉 1인 권력과 연방 권력 강화를 요체로 한다. 러시아 연방의 영토적·법적 통일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고, 동시에 러시아의 혼란과 분열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외부 세력(색깔 혁명)의 준동을 차단하기 위한 정치적 방어기제다.

러시아인들 ‘제국 증후군’ 열망 해소해 줘

지난해 5월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푸틴 대통령이 레드 카펫 위를 걸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5월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푸틴 대통령이 레드 카펫 위를 걸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국가자본주의’는 국가의 시장 개입을 강화하는 것으로 약탈적 시장경제 질서를 바로잡아 국부(國富)를 키우고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경제정책 기조다. 기본적으로 시장경제 원칙에 바탕을 두면서도 석유, 가스, 전력 등 핵심 기간 산업과 우주, 항공, 원자력 등 전략 산업에 대해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옐친 대통령 집권 당시 러시아는 국영기업들이 마구잡이로 민영화되면서 국가의 막대한 부가 아무런 제약 없이 서방으로 빠져나가는 부작용을 경험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를 막기 위해 주요 국영기업들을 재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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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주의’는 푸틴의 대외 정책 지향성을 제시하는 이념이다. 궁극적으로 서구에 결연히 맞서 글로벌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 확보와 지정학적 영향력 강화를 목표로 한다. 이는 대외 정책에서 전략적 독자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다극 세계의 독자적 중심축들과 다면적인 협력 관계 확대를 통해 미국 중심의 일극 우위적 패권 질서를 견제하고 러시아의 배타적 세력권과 전통적 영향권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러시아가 주도해서 형성한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상하이협력기구(SCO), 브릭스(BRICS) 등은 유라시아주의 이념의 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제기독교 보수주의’는 푸틴의 대내외 정책에 도덕적·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다분히 자기충족적인 종교 이데올로기다. 이 종교 이념은 ‘모스크바=제3로마’라는 자부심에서 출발하고 러시아가 동로마제국의 계승자로서 기독교 정신세계의 중심지이자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의 수호자라는 메시아니즘적 종교관에 기초한다.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크렘린은 종교의 보수적 가치를 옹호하는 국가들과의 국제적 연대 확대를 추구한다. 이 네 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푸틴주의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국가주의와 반서구주의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그래픽=남미가 기자

그렇다면 러시아 민초들은 푸틴 대통령의 통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푸틴 대통령의 인기와 지지율은 선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작년 3월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치른 대선에서 77.44%라는 역대 최고의 투표율 속에서 87.28%라는 높은 득표율을 얻었다. 장기 집권과 부정 투표 논란에도 민심은 푸틴을 압도적으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여론이 푸틴 대통령에 호의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손상된 러시아의 대국적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점을 꼽을 수 있다. 2000년 집권 후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인들이 느끼는 과거 초강대국 영광에 대한 향수, 즉 ‘제국 증후군’의 열망을 해소해줬다. 미국 군사 방어시스템의 폴란드·체코 배치 무력화, 조지아 전쟁 승리,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키르기스스탄에서의 미군 축출, 시리아 내전 개입과 중동·아프리카 내 영향력 회복, 나토의 동진 차단을 위한 특수군사작전 등이 사례일 것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그래픽=남미가 기자

고난의 시기 경제 위기 탈출과 성장도 푸틴에 대한 강한 팬덤 형성에 일조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구가 강력한 제재를 가했지만, 러시아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경제성장률은 2022년 -2.1%로 선방했고 국내총생산(GDP)은 2조2404억 달러를 기록해 세계 8위를 차지했다. 2023년에는 경제가 플러스 성장세로 돌아서 3.6%의 고성장을 구가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나토와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고 우크라이나 돈바스 점령 지역 확대와 러시아에 유리한 전황도 푸틴 지지율의 고공행진을 견인했다.

푸틴의 장기 집권 비결은 푸틴주의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긍정적 평가에서 비롯된다. 푸틴과 대중 사이의 권력 관계에서 푸틴주의가 작동하는 원리는 이렇다. 푸틴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가에 질서와 안정, 경제 성장을 구현하고, 대외적으로는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위상을 확보할 테니 그 과정에서 정치적·시민적 권리와 자유, 시장 원리는 당분간 유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안정’과 ‘국가 권력의 자의성’ 교환인데, 이 ‘푸틴과의 계약’은 선거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대중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를 얻었다. 그런 측면에서 2024년 러시아 대선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끄는 푸틴 체제에 대한 일종의 ‘신임 투표’ 성격이었다.

집권 5기지만 여전히 2000년 체제 머물러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만난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AP=연합뉴스]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만난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AP=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앞으로도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발판으로 국내적으로는 침체한 경제 진작에 집중하면서 내부 동요를 차단하는 한편, 국제적으로는 다극세계의 독자적 중심축으로서 공세적이고 개입주의적인 대외 정책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공세성 강화, 나토의 동진 차단, 탈소비에트 공간에 대한 통제권 강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의 발전적 확대, BRICS·SCO와의 협력 메커니즘 활성화, 반미·반서구 세력(중국, 이란, 북한 등)과의 전략적 연대 강화, 글로벌 사우스와의 공고한 협력 체제 구축, 다극적 국제 질서의 이식, 러시아의 안보 이익을 제도적으로 반영하고 법적으로 보장하는 신국제 안보 질서 형성 등을 위한 대외적 노력을 적극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그래픽=남미가 기자

2024년 집권 5기의 출범은 ‘푸틴주의’가 국가·사회적으로 여전히 유효하고 그 기제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러시아가 2000년 체제에 여전히 갇혀 있음을 방증하고, 푸틴 5.0 시대에도 과도하게 집권화·사인화한 권력 구조 아래서 통치 체제와 사회·경제적 제도의 큰 변화 없이 서구와 대립각을 세우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할 공산이 크다는 점을 예고한다.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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