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제지역 확대 카드 만지작…투자심리 자극 '풍선' 터질라

    규제지역 확대 카드 만지작…투자심리 자극 '풍선' 터질라

     ━  들썩이는 집값, 대책은   서울 강남에서 시작된 아파트값 상승세가 최근 성동·마포구 등 주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사진은 성동구의 한 아파트 부동산중개업소에 붙은 매물 광고. [뉴시스] 정부는 27일 초강력 ‘가계부채 관리방안’을 발표하며 “필요하다면 규제지역 추가 지정 등 시장 안정 조치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근본 해법인 공급 확대가 지연되면서, 수요 억제를 위한 추가 규제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다.   대출 규제 외에 유력한 수요 억제책으로는 규제지역 확대가 거론된다. 규제지역은 조정대상지역, 투기과열지구, 토지거래허가구역(토허구역) 등을 일컫는다. 규제 지역으로 지정되면 일반 무주택자의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은 70%에서 50%로 줄어든다. 토허구역은 실거주 의무를 부여해 갭투자(전세 끼고 매매)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권대중 서강대 일반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는 “시중 유동성 축소와 규제지역 확대가 맞물리면, 양도세 중과 등으로 인해 시장 안정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서울·수도권 집값 하반기에도 오를 것” 88% 150만호·250만호 큰소리 대책 그만…꼼꼼하고 실현 가능한 공급계획 내놔야 하지만 규제지역 확대가 과거의 정책 실패를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론도 제기된다. 2017년부터 2020년에는 서울 전역과 수도권 대부분이 조정대상지역 및 투기과열지구로 지정됐다. 단기적으로는 해당 지역의 거래가 급감하고 청약 쏠림도 완화됐다. 그러나 규제를 피해 수요가 인접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서울 규제 직후 김포, 파주, 인천 등 수도권 제외 지역 집값이 급등했고, 뒤늦게 해당 지역까지 규제를 확대하는 ‘쫓고 쫓기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고준석 연세대 상남경영원 교수는 “섣부른 규제 확대로 매물이 잠기게 되면 주거 비용은 더 증가하고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은 멀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제경 투미부동산컨설팅 소장은 “서울 공급을 늘리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 규제를 강화하면, 잠시 숨 고른 뒤 다시 상급지 중심으로 가격이 급등하는 부작용을 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규제지역 지정이 자칫 잘못된 시그널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과거 규제지역 확대 당시 일부 투자자들 사이에선 “정부가 상승 가능성이 큰 지역을 콕 집어줬다”는 해석이 퍼졌고, 이는 정책 의도와 반대되는 기대심리를 자극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시장 과열을 이유로 어떤 대책을 제시하든 논란의 빌미가 되고 투기심리를 부추길 수 있다”며 “특단의 대책 등을 제시하지 말고, 구체적이지 않게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대응”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 등 핵심 지역이 ‘불장(불붙은 시장)’을 주도하면서, 부동산 양극화 해소를 위한 세제 개편 요구도 커지고 있다. 박지민 월용청약연구소 대표는 “취득세 중과를 완화하면 일부 지역에 집중돼 있던 수요가 외곽 및 지방까지 퍼지면서 기형적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일 나눔연구소 대표도 “다주택자 중과세로 지방 주택을 팔고 서울 아파트로 가는 현상이 심화한다”며 “종합부동산세를 주택 수가 아닌 금액 기준으로 부과하고, 지방은 취득세를 완화해주는 등 지방을 살려 서울 집중화 현상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대출 규제의 실수요자 보호 방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수도권·규제지역 내 주택담보대출 최대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하고 6개월 내 전입을 의무화한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방안에 대해, 박민수 더스마트컴퍼니 대표는 “고가 주택에 대한 대출을 막아버리면 현금 부자들만 좋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차별적 환경이 된다”며 “젊은층과 실수요자에 대한 보완적 적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지영 신한 프리미어 패스파인더 전문위원 역시 “규제 강화가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에 제약이 될 수 있다”며 “DSR의 미래소득 반영 등 차등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2025.06.28 01:58

  • 150만호·250만호 큰소리 대책 그만…꼼꼼하고 실현 가능한 공급계획 내놔야

    150만호·250만호 큰소리 대책 그만…꼼꼼하고 실현 가능한 공급계획 내놔야

     ━  들썩이는 집값, 대책은   수도권 3기 신도시인 남양주시 왕숙지구 전경. [연합뉴스] 인구 1000명당 주택 수 423.6가구, 자가 보유 비율 60.6%(2021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비교하면 주택 수는 27위, 자가 비율은 33위다. OECD 회원국은 34개국이다. 한국의 이 같은 ‘만성적인’ 주택 부족 문제는 집값 상승의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집값이 들썩이는 상황 역시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결과지만, 그 이면에는 주택 부족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1000명당 자가 보유 61%, OECD 꼴찌서 2등 중앙SUNDAY가 학계·연구기관·산업계·전문위원을 대상으로 부동산 관련 긴급 설문조사를 한 결과도 비슷하다. 하반기 서울·수도권 집값이 상승할 것이라는 응답이 88%(30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그 이유로 ‘주택 공급 부족’(43%·26명)을 첫손에 꼽았다. 복수 응답이 가능한 질문이었지만, 두 번째로 응답이 많았던 ‘금리 인하’(18%·11명)보다 두 배 많았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서울은 주택 수요보다 주거환경이 좋은 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공급마저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금리 인하 시기 등과 맞물리면서 집값이 들썩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이전 정부가 주택 공급에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집값이 급등하던 2022년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임기 내 250만 가구 공급을 추진했고,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말 150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며 수도권 3기 신도시를 지정했다. 숫자만 놓고 보면 ‘공급 과잉’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주택을 공급한 노태우 정부(200만 가구)와 맞먹는다. 다만 문재인·윤석열 정부의 주택 공급은 설익은 계획, 코로나19 등으로 공허한 외침에 그쳤다.   관련기사 “서울·수도권 집값 하반기에도 오를 것” 88% 규제지역 확대 카드 만지작…투자심리 자극 ‘풍선’ 터질라 삼성증권이 최근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2015~2021년까지 7년간 서울·수도권 아파트 착공은 연평균 21만5036가구였다. 그러나 2022년 13만9967가구, 2023년 10만2476가구, 지난해 15만1473가구로 눈에 띄게 줄었다.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주택은 충분하다”며 공급을 틀어막은 영향이다. 임기 말 뒤늦게 공급 확대에 나섰지만, 코로나19와 인플레이션, 고(高)환율·고금리·고유가가 덮치면서 실적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올해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4월까지 누적 착공 실적은 3만1126가구로, 이 추세대로라면 올해 서울·수도권 아파트 착공 물량 역시 12만 가구 정도에 그칠 전망이다. ‘믿었던’ 3기 신도시마저도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착공한 3기 신도시 아파트는 1만1000가구로 전체 17만4122가구의 6.3%에 그친다. 남양주 왕숙지구 A1·2블록과 B1·2블록은 내년 12월 입주가 목표였지만 2028년 3월로 1년 이상 미뤄졌다. 이경자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은 “빌라와 오피스텔이 대안이 못 되는 가운데 3기 신도시마저 공정률이 낮아 주택 공급은 2028년까지 계속 줄어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상황이 이렇자 이재명 정부도 공급 확대 방법을 찾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20일 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정기획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이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중산층·서민 대상 주택 공급 확대 공약 이행 방안을 보고했다. 구체적으로는 재개발·재건축 절차 완화와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는 방안을 내놨다. 이와 함께 공공기관·기업 등이 보유한 유휴부지를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전문가는 그러나 공급 규모보다는 꼼꼼하고 실현 가능한 공급 계획을 내놔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최근 주택시장 불안과 관련해 “(수도권에서는) 구체적인 주택 공급안이 더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말 설익은 주택 공급 대책을 쏟아내면서 혼란을 자초한 바 있다. 2020년 8·4 주택 공급 대책 때 내놓은 서울 태릉골프장 아파트 1만 가구 건설이 대표적이다.   단독·다세대 등 비아파트 공급도 확대를 그래픽=남미가 기자 이 사업은 주민·지자체의 반대 목소리로 사업이 무산될 위기다. 당시 나왔던 서울 서부면허시험장·용산코레일부지 등지의 사업도 좌초됐거나 좌초 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개발업체 대표는 “도심에서는 빈 땅이라고 해서 무조건 아파트를 지으면 주변 지역은 교통이나 상·하수도 부족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다”며 “이런 고민 없이 졸속으로 사업을 추진하니 주민이나 지자체의 반발이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본지 설문조사에서 현실적인 주택 공급 방법(복수응답)으로 ‘재개발·재건축 규제 완화’(41%·28명)와 ‘공공기여 등 건축 규제 완화’(18%·12명), ‘상업용지 등의 주택용지 변경’ (16%·7명)를 꼽았다. 박합수 건대 부동산대학원 겸임 교수는 “도심 주택 공급의 80%가 재개발·재건축인 만큼 사업 절차를 간소화하고 걸림돌이 되는 초과이익환수제도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형일 나눔연구소 대표는 “공공기여 비율과 같은 일반 건축 규제 역시 완화해 사업의 채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이 외에도 공사비 안정화를 통해 멈춰 선 기존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따르면 4월 건설공사비지수는 131.06으로 2020년(100 기준)보다 30% 이상 올랐다. 채산성이 떨어져 아파트 분양을 포기하는 사업자가 나오고,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에서는 급증한 공사비 문제로 시공사와 조합이 대치를 반복하고 있다. 지난해 말 공사비 증액 문제로 갈등을 빚으며 공사가 중단된 서울 노량진6구역 재개발 사업은 서울시의 중재로 최근에야 문제를 해결했다.   정부는 지난해 말 인력 수급 방안 등을 담은 공사비 안정화 대책을 내놓은 바 있다. 다만, 세부 실행 계획은 비상계엄 사태 등의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면서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설상가상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싱) 부실 사태가 이어지면서 금융당국이 규제 강화 움직임을 보인다. 우병탁 신한은행 프리미어 패스파인더 전문위원은 “PF 부실 문제가 한국 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는 만큼 기준 강화 등은 필요해 보인다”며 “다만 이렇게 되면 주택 공급이 더 위축될 수 있으니 공급이 필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세제 혜택 같은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단독·다세대주택과 같은 비(非)아파트 공급 확대 방법도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다세대·다가구주택을 중심으로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비아파트 공급이 끊기다시피 했다”며 “주택 수요 분산을 위해 비아파트 공급 역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문도 명지대 대학원 실물투자분석학과 교수는 “신도시와 같은 택지개발사업에 집중된 주택 공급 방식을 직장·지역주택조합이나 원형지 개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설문에 응해주신 분(가나다순)=고준석 교수(연세대 상남경영원) 권대중 교수(서강대) 김기원 대표(리치고) 김덕례 선임연구위원(주택산업연구원) 김용구 강사(한국공인중개사협회) 김인만 소장(부동산경제연구소) 김종율 대표(김종율아카데미) 김제경 소장(투미부동산컨설팅) 김진유 교수(경기대) 김학렬 소장(스마트튜브) 김형일 대표(나눔연구소) 박민수 대표(더스마트컴퍼니) 박원갑 전문위원(KB국민은행) 박지민 대표(월용청약연구소) 박합수 교수(건국대) 서진형 교수(광운대) 양지영 전문위원(신한투자증권) 우병탁 전문위원(신한은행) 윤수민 전문위원(NH농협은행) 윤주선 교수(홍익대) 윤지해 리서치랩장(부동산R114) 이은형 연구위원(대한건설정책연구원) 장원석 대표(엠알이지) 정민하 대표(지인플러스) 장희순 교수(강원대) 최순웅 대표(KSLD) 한문도 교수(명지대) 함영진 부동산리서치랩장(우리은행) 홍춘욱 대표(프리즘투자자문) 현대건설·삼성물산·GS건설·DL이앤씨·대우건설 각 주택사업 담당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25.06.28 01:51

  • "서울·수도권 집값 하반기에도 오를 것" 88%

    "서울·수도권 집값 하반기에도 오를 것" 88%

     ━  들썩이는 집값, 대책은    정부가 27일 강력한 부동산 대출 규제 대책을 마련한 것은 서울·수도권 주택시장이 심상치 않아서다.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들썩이던 아파트값 상승세가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서울 전역으로 옮겨붙었고 상승 폭도 가파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6월 넷째 주(23일 기준) 서울 아파트값은 전주 대비 0.43% 올랐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9월 둘째 주(0.45% 상승) 이후 6년 9개월 만에 최대 상승 폭이다. 집값이 급등했던 2020년의 ‘패닉바잉’(공포 구매) 시기보다 주간 단위 상승률이 더 높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이런 분위기는 하반기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중앙SUNDAY가 학계·연구기관·산업계·전문위원 등 부동산 전문가 34명을 대상으로 20~25일 긴급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88%(30명)가 하반기에도 서울·수도권 집값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서진형 광운대 부동산법무학과 교수는 “최근 몇 년간 주택 공급이 더 줄어든 데다 금리 인하가 본격화하면서 집값 상승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150만호·250만호 큰소리 대책 그만…꼼꼼하고 실현 가능한 공급계획 내놔야 규제지역 확대 카드 만지작…투자심리 자극 ‘풍선’ 터질라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6월 주택가격전망 소비자동향지수(CSI)는 120으로 전월(111)보다 9포인트 상승했다. 2021년 10월(125) 이후 3년 8개월 만에 가장 높다. 이 지표는 소비자가 향후 1년간 집값 변동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100을 넘으면 ‘오를 것’이라고 응답한 소비자가 더 많다는 의미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연초 강남을 중심으로 했던 집값 상승세가 강북 등지로 확산하고 있다”며 “진보정권이 출범하면서 지금 아니면 집을 살 수 없다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  “하반기 서울·수도권 집값 2~5% 뛸 것” 53%…“하락 반전” 6% 그쳐   한은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주택가격전망 CSI는 약 8개월 후 실제 집값과 0.78의 상관계수를 보인다. 기대 심리 상승이 집값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2020년 12월 주택가격전망 CSI가 132로 정점을 찍었는데, 주택가격지수는 2021년 8~12월 내내 14~15% 상승률을 보였다. 김우석 한은 금융통화연구실 조사역은 “기대 심리가 오르면 수요자는 집값이 더 오르기 전에 집을 빨리 매수하려 하고, 공급자는 더 오를 거란 기대에 매물을 회수하면서 실제 집값 상승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집값이 하반기 더 오를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가 첫손에 꼽은 이유는 ‘주택 공급 부족’(43%·26명)이었다(복수응답). ‘금리 인하’(18%·11명)와 ‘주택 수요 증가’(13%·8명)가 그 뒤를 이었다. 진보정권 때 집값이 급등했던 ‘학습효과’(10%·6명)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 대형건설사 주택사업 담당 임원은 “진보정권의 주택정책 기조가 민간 위주의 분양보다는 공공 중심의 임대주택이기 때문에 주택 부족 문제가 임기 내내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집값 상승 폭도 작지 않을 전망이다. 응답자 가운데 53%(16명)는 하반기 서울·수도권 집값이 2~5%가량 오를 것으로 예측했다. 30%(9명)는 5~7%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7% 이상을 예측한 전문가도 10%(3명)였다. 김제경 투미부동산컨설팅 소장은 “2026년부터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이 1만 가구 초·중반대로 급감하는 데다 뚜렷한 대안이 없기에 집값이 급등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반기 서울·수도권 집값이 7% 이상 오른다면 올해 연간 상승률은 한국부동산원이 통계 작성을 시작한 2006년(11.58%)과 맞먹는 수준이 될 전망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이재명 정부는 주택 공급 대책을 검토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집값 급등은 정권 운영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동산 종합 대책 시기와 관련, 설문에 응답한 전문가는 ‘가능한 한 빨리’(52%·17명) 내놔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7월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시행 이후’가 적절하다고 보는 전문가는 21%(7명)였다. ‘시장 상황을 좀 더 지켜본 뒤 연말 정도’가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18%(6명)였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는 27일 대책과 같은 ‘대출 규제 강화’(21%·12명)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복수응답). 더불어 ‘법인·외국인에 대한 규제 강화’(17%·10명)를 주문하는 목소리와 취득·보유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9%·5명)도 적지 않았다. 다만, 많은 전문가가 규제하더라도 과거처럼 무분별한 규제는 경계했다. 장희순 강원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규제를 가하면 똘똘한 한 채 선호 현상 강화로 서울 집값은 더 큰 폭으로 뛸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서울·수도권 집값이 보합권에 머문다거나 하락한다고 보는 전문가는 각각 6%(2명)였다. 이들은 정부의 규제 강화나 주택 공급 확대 정책, 글로벌 경기 침체 등으로 하반기 주택 매수 심리가 쪼그라들 것으로 내다봤다. 김기원 리치고 대표는 “DSR 규제 강화와 경기 침체로 인해 하반기에는 서울·수도권 집값이 하락 반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황정일·배현정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25.06.28 00:01

  • 한·일 수교 60년, 함께 미래로 갈 길을 찾다

    한·일 수교 60년, 함께 미래로 갈 길을 찾다

     ━  한·일 수교 60주년   상대국 언어로 한국과 일본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하는 글을 올린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SNS. [사진 SNS 캡처] 22일로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60년을 맞는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 협정은 양국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 60년간 한·일은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협력과 갈등을 반복해왔다. 특히 과거사 문제 등은 큰 걸림돌이었다. 그간 한·일 관계는 한·미·일 협력의 핵심축으로 작용하면서 우리의 이익은 물론, 동북아 안보와 협력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이재명 정부가 내놓을 대일본 정책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끄는 이유다.   관련기사 다층적 교류 물꼬 ‘한·일 성신조약’ 체결할 만…한·일 불완전 ‘65년 체제’ 탓 역사전쟁 우려도 “한·미·일 협력하되 중·러 도외시 안 돼”…실용외교 갈림길 지난 17일 이재명 대통령의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의 첫 만남은 무난했다. 캐나다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정상회담을 한 이 대통령은 과거사에 대한 언급 없이 미래 지향적인 과제를 주로 거론하면서 협력을 강조했다. 국익 중심의 실용주의 외교 노선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  북핵 위협 등 공조…“과거사·독도 갈등, 이해관계 조정을”    이재명 대통령이 17일 캐나다 G7 정상회의에서 이시바 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 대통령은 “앞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집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면서 “양국이 서로 협력하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두 정상은 회담 후 긴밀한 소통을 하겠다며 상대국의 언어로 SNS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첫 한·일 정상회담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에도 불구, 양국 관계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는 가시지 않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한국의 대일 외교 기조가 달라질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양국 관계를 급냉시킬 지뢰들은 적지 않다. 당장 대륙붕 7광구 개발 문제, 강제징용 해법인 ‘제3자 변제’ 유지 여부, 일본이 제안한 ‘오션’ 참여 등이 이재명 정부의 대일 정책을 가늠할 수 있는 방향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정수경 기자 jung.suekyoung@joins.com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구역인 7광구를 둘러싼 문제 해결은 시급하다. 지난 1978년 6월 22일 발효된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협정(JDZ 협정)은 유효기간 50년을 3년 남겨두고 어느 일방이 협정 종료를 선언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이달 22일부터 이 협정은 연장 또는 폐지될 수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 해법의 유지 여부도 관심사다. 이는 전임 윤석열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짜낸 아이디어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수혜를 입은 한국 기업이 일본 피고 기업을 대신해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방식이다.   일단 이 대통령이 “국가 간 관계는 일관성이 특히 중요하다. 국가 간 신뢰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 만큼,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언제든 돌발 변수가 될 수 있다.   이 대통령의 발언 일본이 최근 싱가포르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제안한 ‘오션(OCEAN·One Cooperative Effort Among Nations)’ 구상에 대한 참여 여부도 현안 중 하나다. 이 구상은 미·일 동맹 주도의 대중국 견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다. 따라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는 이재명 정부로서는 선뜻 나서기 쉽지 않다.   반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과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부과, 방위비 분담금 문제 등에서는 공조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2025.06.21 01:48

  • 다층적 교류 물꼬 '한·일 성신조약' 체결할 만…한·일 불완전 '65년 체제' 탓 역사전쟁 우려도

    다층적 교류 물꼬 '한·일 성신조약' 체결할 만…한·일 불완전 '65년 체제' 탓 역사전쟁 우려도

     ━  한·일 수교 60주년 - 전문가 진단    이재명 대통령이 17일 캐나다 G7 정상회의에서 이시바 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신각수 전 주일대사, 니어재단 부이사장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는 해다.   한·일 관계는 지난 60년간 크게 4단계를 거쳐 발전해왔다. 수교로부터 1980년대 말까지 정부 주도, 1990년대 민관 주도 전환, 2000년대 민간 주도를 거쳐 복합 네트워크로의 발전을 목전에 두었다. 6~7차례의 위기를 겪으면서 시시포스 신화의 길을 걸었지만, 대체로 우상향의 발전 경로를 밟았다.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과 활발한 문화 교류 덕분에 상호 이해와 신뢰가 쌓여 미래지향적 발전 궤도에 정착할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 과거사가 한·일 관계 전면에 대두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하였다. 장기간 다중 복합골절 상태의 지속은 상호 경원, 전방위 관계 악화, 상호 신뢰자산 파괴, 과거의 현재·미래 지배 등 한·일 관계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2022년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문제 관련 ‘제3자 변제’ 해법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고 한·일 관계를 회복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일본의 성의 있는 대응 부족에 대한 한국의 불만과 한국 정치 변동에 따른 지속성에 대한 일본의 불안이 상호 교차하면서, 2012년 이전 상태로 완전히 복귀하는 데는 아직 부족한 게 현실이다.   한·일 관계는 60년간 큰 변화가 있었다. 수교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이 한국의 9.2배였으나, 최근 한·일 역전이 이루어질 정도로 경제 격차가 크게 줄었다. 또한 양국 사회에서 전전 세대가 물러나고 전후 세대가 주류로 등장했다.   북한의 핵 위협은 동북아 전략 환경을 뒤흔들 정도로 심각해졌고 부상한 중국의 공세적 외교·안보 정책은 미국과의 전략 경쟁으로 지정학의 귀환을 가져왔다.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로 동맹 체제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흔들고 있다. 중국·러시아·북한·이란 등 ‘교란의 축’도 전후 질서에 강력히 도전하고 있다. 팬데믹, 4차 산업 기술혁명, 기후변화, 인구 문제, 에너지 전환 등 복합대전환도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을 가중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가치를 공유하며 미국의 양대 동맹국인 한·일 양국은 포스트 탈냉전 시대의 혼돈을 함께 헤쳐 나갈 전략적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21세기는 인도태평양의 시대다. 양국은 인태지역의 자유, 평화와 번영을 담보할 책임이 있고, 이를 위한 미래 비전을 만들어 실행에 옮겨야 한다. 이런 목적으로 양 국민의 다층적 대규모 교류를 제도화할 ‘한·일 성신(誠信)조약’(1963년 독·불 엘리제조약의 한·일판)의 체결과 미래비전 구축 작업을 담당할 양국 민관 합동기관으로 ‘한·일 성신위원회’의 설립을 제안한다.    ━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수교 후 60년간 한·일 관계는 추세적 변화를 경험했다. 첫째, 한·일 관계는 약소국과 강대국 간의 비대칭적 성격을 극복하고 점차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변화했다. 둘째, 한·일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기본적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와 규범을 공유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한·일 관계가 현재 당면한 상황은 글로벌 복합 위기의 다중 발생으로 요약할 수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스라엘-하마스-이란 전쟁으로 중동 정세도 심각하게 악화하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하는 속에서 대만해협의 파고도 높아지고 있다. 북한의 대남 적대국 표명과 더불어 핵·미사일 위협도 심화하고 있다. 한편 글로벌경제는 심각하게 분절화하고 관세 장벽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2.0을 계기로 미국을 필두로 주요국은 각자도생과 경제안보를 내세우며 자국 우선의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갈등과 마찰로 점철된 ‘잃어버린 10년’의 한·일 관계를 협력과 공조의 관계로 전환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글로벌 복합 위기와 미·중 전략대결 구도 속에서 한·일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고 양국의 협력과 공조야말로 상호 이해와 이익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2023년 한·일 관계의 극적인 전환은 이러한 공동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징용문제에 대한 ‘제3자 변제’ 해법 제시를 계기로 한·일 관계는 극적으로 개선되어 정상 간의 셔틀외교가 복원되었고 대화 채널도 재가동되었다.   물론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우려의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 국민은 일본에 양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역사 반성에 인색하고 화답이 없다고 불만이다. 일본 국민은 이재명 정부의 출범으로 한·일 관계가 후퇴하거나 급변할 수 있다고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향후 한·일 관계 개선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노력이 요구된다. 첫째, 개선된 한·일 관계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국민의 폭넓은 지지 확보가 절실하다. 둘째, 한·일 간 갈등의 기폭제로 등장하는 과거사 갈등 사안을 전략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위안부, 징용, 사도광산 등재, 역사교과서, 야스쿠니 참배 등 과거사 이슈가 포함된다. 셋째, 새로운 국제 정세와 변화한 한·일 관계를 반영한 미래비전을 구축하고 공유하는 일이 중요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일본 총리는 1998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 선언은 한·일 관계사에서 금자탑과 같은 존재이다. 한·일 정상은 양국의 전방위적 협력의 필요성과 분야별 세부 협력 지침을 담은 ‘한·일 파트너십 선언 2.0’의 재구축 과정에 돌입해야 한다.   이 대통령의 발언  ━  이기태 세종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이재명 대통령은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표방하면서 대일 외교에서도 ‘투 트랙’ 접근 기조를 내세우고 있다. 즉 과거사·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대응하되, 경제·문화 등 다른 분야에서는 미래지향적으로 일본과 협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사실 투 트랙 접근법은 역대 정부들도 내세웠던 것이지만, 결국 대통령 임기 말까지 일관성 있게 실천하느냐가 문제였다. 역대 정권에서 출범 초기 한·일 관계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과거사, 독도 문제로 결국 충돌하면서 관계 악화로 이어졌던 사례를 떠올려보면, 이재명 정부 초기에도 한·일 관계에 대한 과도한 낙관은 경계해야 한다.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으로 대표되는 한·일 국교정상화(소위 ‘65년 체제’)는 당시 미해결 과거사 문제를 보류한 채 한·일 수교를 우선시한 ‘불완전한’ 65년 체제였다. 향후 한·일 과거사 문제는 ‘불완전한’ 65년 체제에 기인하는 한·일 갈등과 더불어 다른 두 차원의 ‘역사 전쟁’이라는 보다 복잡한 형태로 전개될 우려가 있다.   첫째, 일본 사회의 보수화 흐름 속에서 더욱 강해진 일본의 ‘역사전(歷史戰)’ 전개다. 2015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 발표를 통해 과거 일본이 1930년대에 군부에 의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언급하면서 1910년의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일제강점기의 책임을 회피하였고, 더 이상 일본 미래세대의 사과는 불필요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일본의 역사 인식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집권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었던 아베파를 중심으로 중국과 한국에 역사 문제로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전’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둘째, 미국이 주도해왔던 동북아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중국의 ‘역사전’ 공세다.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80주년을 계기로 일본을 압박하는 역사전을 강화하고 있으며, 특히 대만 유사시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오키나와의 역사적 정통성을 흔들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중국은 향후 한·중 간 역사 연대를 통해 한·미·일 협력 구도의 이완을 노릴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일 양국이 ‘불완전한’ 65년 체제를 인정하고, 과거사 갈등을 완화하고 관리하기 위한 공동의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최근 방한한 나가시마 아키히사 일본 총리 국가안보담당특별보좌관이 제시한 세 가지 원칙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단기적 이해득실보다 장기적 전략 이익을 중시할 것 ▶과거 합의(정부 담화 등)를 존중하며 후퇴하지 않을 것 ▶양국 국민을 용기 있게 설득해 나갈 것이라는 세 가지 한·일 역사 문제에 관한 원칙을 강조하였다.    ━  이창민 한국외대 일본학과 교수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한·일 관계는 2010년대를 기점으로 구조적 전환을 겪었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자금·기술·통화 측면에서 정부 주도의 일방적인 협력을 받아왔으며, 이는 유무상 차관과 기술 이전을 통해 양국 간 수직적 분업구조를 고착시켰다. 그 결과, 한국은 지속적인 대일 무역수지 적자에 시달렸지만, 동시에 일본의 협력은 산업화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한·일 경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2011년부터 대일 수출입이 모두 감소하기 시작했고, 무역수지 적자 규모 역시 줄어들었다.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중단되었으며, 통화스왑도 단계적으로 종료되었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와 이에 대응한 한국의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은 역사 갈등의 표출로 보였지만, 실상은 한국의 산업 경쟁력 상승으로 인해 일본과의 구조적 협력이 더 이상 필수적이지 않은 분야가 늘어났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냉각됐던 한·일 관계는 2023년 3월부터 9월까지 불과 6개월 동안 7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극적으로 해빙 국면에 접어들었다. 특히 같은 해 8월,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세 건의 공동문서는 안보와 경제 양 측면에서 삼국 협력의 제도화를 예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구조적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은 정권 교체에 따라 대외 전략이 급변하는 경향이 강하고, 보수 정권과 진보 정권 간 대미·대중 외교 노선의 차이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국제정세 변화는 한·일 양국이 새로운 협력의 틀을 고민해야 할 시점임을 시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보다 거래’를 중시하는 외교를 다시 꺼내 들었고, 한·일은 새로운 통상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최태원 SK 회장이 제안한 ‘한·일 경제협력체의 유럽연합(EU)식 단일시장 모델화’는 단순한 이상론이 아닌 현실적인 상상력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실리 중심의 협력 전략에는 분명한 한계도 존재한다. 위안부, 강제징용, 역사 교과서, 독도 영유권,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다. 한국 내 정권 지지율이 하락할 경우 이들 사안이 여론 결집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교 정상화 60주년과 함께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어떤 대일 전략을 펼치느냐에 따라,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과 ‘캠프 데이비드 이후’ 삼국 협력이 일시적 현상에 그칠지, 아니면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으로 진화할지가 결정될 것이다. 그 선택은 한국의 손에,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의 손에 달려 있다.   관련기사 한·일 수교 60년, 함께 미래로 갈 길을 찾다 “한·미·일 협력하되 중·러 도외시 안 돼”…실용외교 갈림길

    2025.06.21 01:20

  • “한·미·일 협력하되 중·러 도외시 안 돼”…실용외교 갈림길

     ━  한·일 관계, 한·중이 변수   한·일 관계의 또 다른 변수는 한·중 관계다. 취임 후 이재명 대통령의 주요국 정상과의 전화통화 순서는 미국-일본-중국이었다. 이 대통령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의 통화를 시진핑 주석보다 먼저 한 것은 일단 한·미·일 협력에 무게를 두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또 이 대통령에 대해 제기됐던 ‘친중 성향’ 논란을 가라앉히겠다는 의도도 숨어 있다.   일본은 현재 중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실행에 있어 대리인 역할을 맡고 있다. 자국 이익은 물론, 동맹인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특히 이시바 정부는 역내에서 중국에 대한 보다 강력한 견제를 위해 이재명 정부가 동참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가 얼마나 호응할지는 아직 의문이다. 한·미·일 협력을 중시하지만 주요 무역 파트너인 중국 역시 소홀히 대하지 않겠다는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노선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 “중요 무역상대국이자 한반도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로, 지난 정부에서 최악의 상태에 이른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달 27일 대선 TV토론에서도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도외시하면 안된다”고 했다.   이를 의식한 듯 시진핑 주석은 지난 10일 이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수호하고, 글로벌 및 지역 산업 공급망의 안정과 원활함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분히 무역 전쟁을 통해 주요국들을 압박하는 트럼프 행정부에 공동 대응을 하자는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관련기사 한·일 수교 60년, 함께 미래로 갈 길을 찾다 다층적 교류 물꼬 ‘한·일 성신조약’ 체결할 만…한·일 불완전 ‘65년 체제’ 탓 역사전쟁 우려도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이재명 정부에 대해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동맹국들의 ‘안미경중(안보는 미국과 협력하고 경제는 중국과 협력)’ 정책에 대해 경고했었다. 어중간한 줄타기 외교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역학 관계를 볼 때 미·중 패권 경쟁이 격렬해질수록 중·일 관계는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또 한·중 관계가 개선되면서 한·일 관계가 좋아지기도 쉽지 않다. 특히 이재명 정부가 한·미·일 삼각 협력이라는 틀 안에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얻어내기 위해선 상당한 지혜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이 대통령의 실용외교가 안보와 경제적 이익이라는 갈림길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2025.06.21 01:07

  • 광부를 찍는 광부 "암흑서 빛난 순간, 영원히 남겨야죠"

    광부를 찍는 광부 "암흑서 빛난 순간, 영원히 남겨야죠"

     ━  대한민국 탄광의 종언    광부 사진작가 전제훈씨. 김홍준 기자  “기록이 있어야 기억합니다.”   전제훈(63) 작가는 기록의 사나이다. 무슨 스포츠 신기록이 아니다. 희미한 잉크가 선명한 기억보다 오래가는 법. 기록은 기억을 끄집어내고 이끈다. 전 작가는 광부의 흔적을 한 조각씩 쫓아간다. 한 조각 중에서도 한순간, 그는 셔터를 누른다. 시커먼 광부의 얼굴. 그 뒤로 비치는 건 만감(萬感)이다.   전 작가 자신도 현역 광부다. 그러니 ‘광부를 찍는 광부’다. 막장에서 그는 광부에서 작가로 변신하길 순간순간 반복한다. 지난 4일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밤샘 근무하고 나온 그를 만났다.   카메라를 들고나오셨네요. “몇 시간 전엔 광부, 지금은 작가입니다. 탄광 취재하는 기자를 찍는 것도 역사잖아요. 하나하나 남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후손들이 탄광과 광부를 기억하게 되잖아요.”   후손이라면 어느 세대인가요. “글쎄요. 제가 일하는 경동탄광 상동광업소도 2년 후 사라진답니다. 그야말로 마지막 탄광의 마지막이죠. 한 세대가 지나면 ‘탄광’도 사어(死語)가 되지 않을까요. 어떤 존재가 사라지면 시대를 함께한 이들조차도 그 존재를 기억하기 힘듭니다.”   해발 720m의 통리재 인근 카페로 이동했다. 높지만 작은 동네. 몇 명의 남성이 오갈 때마다 전 작가는 일어나 인사를 했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선배 광부’들이었다. “63세인데 아직도 현역이네요”라고 묻자 전 작가는 귀에 손을 가져갔다. 난청. 막장 소음이 만들어낸 ‘직업병’이었다.   퇴직하실 나이 아닙니까. “이미 7년 전 명퇴했고 지금은 화약 관리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어요. 현장에 있어야 기록 남기기가 수월합니다.”   전 작가는 지금은 사라진 함태탄광에서 광부 생활을 시작했다. 21세였던 1983년이었다. 사진동호회에도 가입했다. 은사가 “풍경보다 네가 일하는 탄광으로 특화해 봐라”고 귀띔했단다. ‘광부를 찍는 광부’의 시작. 취미였지만 지금은 역사로 만드는 기록의 길을 걷고 있다. ‘검은 영웅들’ ‘증산보국’ ‘광부일기’ 등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강원국제비엔날레와 대한민국포토페스티벌 등 굵직한 행사에도 참여했다. 전시회는 모두 책으로 내기도 했다.   관련기사 ‘블랙 다이아몬드’ 전사들 “쿨럭쿨럭…진폐는 광부들 훈장” 2년 뒤엔 ‘막장’ 제로 물 위에 건물 세웠다, 까치발 … 물이 산을 뚫었다, 구문소 흔들림도 있었다. 1989년 30여 명을 지휘하는 채탄계장 시절 사망 사고가 났다. 도저히 갱내 일을 못 하겠다며 화약고에서 일하다 탄광을 나와 일반 광산으로 간 게 1995년이었다. 이후 14년 뒤에야 딸의 대학 등록금 때문에 ‘억지로’ 태백 탄광으로 돌아왔단다. 전 작가는 “사망 사고는 엊그제도 꿈에 나올 정도로 평생 괴롭힌다”고 털어놨다.   광부들이 촬영을 꺼리진 않았나요. “제가 현역 광부라는 게 도움이 됐어요. 일반 사진작가는 막장 출입 자체가 어렵습니다. 눈높이도 다르고요. 그래도 초기엔 ‘막장에서 무슨 사진이냐. 일하는 것 안 보이냐’고 반발하더라고요. ‘이건 우리 역사를 담는 작업이다. 자식들에게, 손주들에게라도 아빠와 할아비가 이렇게 일했다고 남겨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어요. 사진은 반드시 본인에게 실명을 새겨서 선물했고요.”   여성 광부는 안 찍으셨나요. “아, 들켰네요(웃음). 사실 제 다음 작품 주제가 여성 광부입니다.”   여성은 탄광에서 소외된 계층이었다. 탄광에선 사고로 순직한 광부들 미망인을 취업시켜 생계를 잇게 했다. 석탄 고르는 선탄부 중에 여성이 많은 이유다. 같이 출근해도 여성들은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전 작가는 “그분들의 숨은 노고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기록은 얼마나 하셨는지요. “광부 사진 1000장에 안전복·안전모·안전화도 각각 1000점입니다. 이른바 ‘1000 시리즈’입니다. 마스크·갱목에 못까지 합하면 10만 점이 됩니다. 탄광이 사라지니 제 인생의 근본이 사라지는 느낌도 들어요.”   인터뷰가 끝난 뒤 전 작가는 선탄장 사진을 찍는 기자를 차분히 기다렸다. 이런 차분함이 숨 가쁜 막장에서도 역사의 기록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산소탱크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날도 밤샘 근무에 들어갔다. ‘당연히’ 카메라도 함께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5.06.14 01:55

  • 물 위에 세운 까치발, 산 뚫고 생긴 구문소 … 탄광 옆에 관광

    물 위에 세운 까치발, 산 뚫고 생긴 구문소 … 탄광 옆에 관광

     ━  관광이 되는 탄광    정동진역. KTX 기관사가 스피커를 통해 말했다. “드디어 동해입니다. 걱정일랑 저 바다에 던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바다 반대쪽. 정동진역 주차장은 왜 저리 넓은가. 주차장은 석탄을 쌓아두는 선탄장이었다. 정동진은 원래 탄광촌이었다. 세월이 이런 역사를 세탁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탄광은 2027년 모두 사라진다.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은 “의료클러스터와 청정에너지 기반시설 등 대체산업을 만들겠다는 구상이 있는데, 지역 정체성을 살려 탄광 유산을 관광 자원화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대안”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탄광을 끼고 있거나 탄광의 역사를 품은 관광지가 제법 있다.  강원 삼척시 도계읍 도계유리나라. 2009년 세계 최초로 석탄 폐석을 활용한 유리 생산에 성공하면서 탄광의 고장 도계읍이 유리고장으로 부활하는 모양새다. 2007년엔 유리 특화 마을인 도계유리마을이, 2018년 3월엔 유리갤러리 등을 갖춘 도계유리나라가 잇달아 들어섰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강원남부로 893-36. 김홍준 기자   KTX 종점역인 동해에서 38번 국도로 구불구불 가면 삼척에서도 내륙 쪽인 도계읍을 만난다. 석탄으로 흥했고, 도계광업소가 이번 달 폐업하면서 이제 석탄 캘 일이 없는 곳. 대신 유리가 반짝이고 있다. 석탄 폐석에서 유리를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해 생산에 들어간 게 2009년. 이후 도계유리마을과도계유리나라가 잇달아 만들어졌다. 휘황찬란·영롱·청아 같은 형용사가 떠오르는 작품들. 마음마저 투명해진다.   영동선은 석탄과 시멘트 운송을 위해 만들어진 철도 노선. ‘명물’ 스위치백 구간(흥전~나한정역)은 솔안터널 개통으로 이미 2012년 사라졌다. 하이원추추파크가이 곳에 들어서 추억의 스위치백 구간을 운행한다.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인근의 철암탄광역사촌은 옛 탄광촌의 주거 시설을 복원한 생활사 박물관으로, 1970~80년대 석탄 산업의 중심지였던 철암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다. 특히 사진의 철암천 위에 기둥을 세워 만든 '까치발'은 과거 탄광촌의 번성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원래 있던 건물은 상가로 활용하고, 철암천 쪽으로 공간을 확장해 지층 아래 살 집을 마련하면서 건물을 지지하기 위해 까치발처럼 기둥을 만들었다.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 403-59. 김홍준 기자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 403-59.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인근의 철암역두(鐵岩驛頭) 선탄장은 장성광업소 산하로 1939년부터 가동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탄시설이다. 2024년 6월 장성광업소가 문을 닫았지만 이전에 캐낸 석탄은 아직도 운반하고 있다. 철암역두 선탄장은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가 됐다. 김홍준 기자   도계유리나라와하이원추추파크를 지나 통리재. 38번 국도에서 동태백로로 갈아타면 철암이 나온다. 가을 철암 단풍군락지가 유명하다. 철암역 근처에 ‘까치발’이 있는데, 탄광촌의 번성을 상징한다. 철암천변의 상가는 수요를 감당 못 해 냇가 쪽으로 확장해야 했다. 증축하면서 건물을 지지하기 위한 기둥이 꼭 까치발 모양새다.   까치발 바로 앞의 철암역두 선탄장은 장성광업소 산하로 1939년부터 가동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탄시설이다. 2024년 6월 장성광업소가 문을 닫았지만, 이전에 캐낸 석탄은 아직도 운반하고 있다. 철암역두 선탄장은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가 됐다. 강원도 태백시 구문소(求門沼)는 황지천 물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큰 돌문을 만들고 그 아래 깊은 물웅덩이가 생겼다는 뜻의 '구무소'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구무'는 옛말로 구멍이나 굴을 뜻하고 '소'는 한자로 물웅덩이를 뜻한다. 강이 산을 뚫고 흐른다고 해서 '뚜루내'라고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와『대동여지도』에는 구멍 뚫린 하천이라는 뜻의'천천(穿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강원특별자치도 태백시 동태백로 11. 김홍준 기자   동태백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천연기념물 구문소(求門沼)가 있다. 황지천 물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큰 돌문을 만들고 그 아래 깊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세월이 만든 걸작. 2000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35번 국도로 다시 갈아타 태백으로. 중간에 장성이중교를 만난다. 1935년 경 만들어진 다리로, 태백에서 가장 오래된 석탄산업 관련 시설물이다. 2004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에 자원 수탈의 아픈 역사와 해방 이후 대한민국 근대화 과정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위쪽은 석탄을 운반하는 기관차와 광차가 다니고, 아래쪽은 보행자와 차량이 다니도록 만들었다. 최근에 만든 금천교까지 사실상 '삼중교'가 됐다. 관련기사 ‘블랙 다이아몬드’ 전사들 “쿨럭쿨럭…진폐는 광부들 훈장” 2년 뒤엔 ‘막장’ 제로 “암흑서 빛난 순간, 후손에 남겨야죠” 강원도 태백시 번화가를 조금 벗어나면 뜻밖의 풍경을 만난다. 해발 800m에 자리한 몽토랑산양목장이 스위스에 온듯한 착각을 안겨준다. 몽토랑은 ‘몽글몽글 구름 아래 토실토실 유산양을 너랑 나랑 만나보자’라는 뜻. 2021년 문 열었다. 강원 태백시 효자1길 27-2. [사진 태백시]   태백시 번화가를 조금 지나면 “어, 여기에 저런 곳이 다 있네”라는 말이 나올만한 곳이 있다.  해발 800m에 자리한 몽토랑산양목장이 스위스에 온 듯한 착각을 안겨준다. 몽토랑은 ‘몽글몽글 구름 아래 토실토실 유산양을 너랑 나랑 만나보자’라는 뜻. 2021년 문 열었다. 2030부터 6070까지 세대를 안 가리고 찾는다. 유제품을 맛보면 진함이 느껴질 것이다.   북쪽으로 향하면 다시 38번 국도를 만난다. 두문동재를 지나 414번 지방도를 타고 정암사를 찾아 국보 수마노탑까지 올라가 보자. 모전석탑 양식으로, 온전히 보존돼 있다.   강원도 함백산의 대한불교조계종 정암사. 월정사의 말사다. 이 사찰 밑으로 태백선 정암터널이 뚫렸다. 무려 4505m로 고한역과 추전역을 잇는다. 1969년 8월에 착공하여 1973년 2월 28일에 준공한 난공사 중의 난공사로 꼽혔다. 정암사 수마노탑은 기단에서 상륜부까지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모전석탑으로, 진신사리 봉안해 국보로 지정됐다. 강원도 정선군 함백산로 1410. 김홍준 기자 폐광에서 문화 예술 공간으로 거듭난 삼탄아트마인. 석탄을 운반하던 옛 조차장 시설은 영화, TV드라마 촬영지로도 명성이 높아졌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45-44. [사진 한국관광공사] 수마노탑에서는 삼척탄좌를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한 삼탄아트마인이 보인다. 문화사업가 김민석·손화순 부부가 2013년 개관했다. 광부 샤워실, 장화 세척장, 갱구를 모두 갤러리로 바꿨다. 석탄을 캐느라 검은 물이 흐르던 계곡에 예술이 흐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 만항재(1330m)로 향하다 보이는 좌우의 평평한 곳은 죄다 광부들의 집터라고 보면 된다. 꽤 큰 공터도 보이는데, 탄광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학교가 있던 곳이다.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에 걸친 함백산(1573m)은 태백선수촌으로 향하는 서학로를 이용하면 2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높은 산'이다. 함백산 정상에서 만항재가 보인다. 6월의 함백산은 염주괴불주머니가 지천에 피었다. 김홍준 기자   삼탄아트마인과 정암사가 기대고 있는 함백산(1573m)은 2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태백선수촌으로 향하다가 KBS 중계소로 들어가는 임도를 활용하면 된다. 이런 ‘편법’으로 산행 시간보다 정상 인증샷이 길어질 수 있다. 석탄을 싣고 달리는 차들이 오가던, 평균 고도 546m, 총 길이 173.2km의 트레킹길 ‘운탄고도1330’은 영월·정선·태백·삼척을 아우른다. ‘1330’은 운탄고도에서 가장 높은 만항재의 고도다.   탄광 종언의 시대. 석탄 가득 싣고 달리던 트럭은 간데없다. 여행객만 오갈 뿐.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5.06.14 00:46

  • '블랙 다이아몬드' 전사들 "쿨럭쿨럭…진폐는 광부들 훈장" 2년 뒤엔 '막장' 제로

    '블랙 다이아몬드' 전사들 "쿨럭쿨럭…진폐는 광부들 훈장" 2년 뒤엔 '막장' 제로

     ━  대한민국 탄광의 종언   경동탄광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작업 중인 광부. 사진작가 전제훈의 '셀카'다. [사진 전제훈] “먹고살아야 했어요. 3년만 하면 될 줄 알았죠. 탄광에서 일당 20원 대신 쌀을 줬어요. 무슨 꼼수가 있는 줄도 모르고 받아서 좋다고 쌀밥 지어 자식 넷을 키웠어요. 어어, 하다 보니 광부 생활 10년. 다른 광부에 비해 짧았지만, 더 지독했던 날들. 여자라서 탄광에서 무시당한 설움을 굶어 죽지 않으려는 발버둥으로 가리고 살아왔어요. 학교는 멀었고, 탄광은 가까웠죠. 남편이 죽고 일흔 넘어 글을 깨쳤고 시를 썼습니다. ‘왜 내가 이 길을 가야만 하는지/후회하지 않은 채 오늘도 입갱한다….’ 그리고 등단했어요.”   전옥화(79)씨는 탄을 골라내는 선탄부였다. 막장을 파는 굴진부, 탄을 캐는 채탄부, 탄을 나르는 운탄부와 함께 광부의 한 축을 맡았다. “탄가루가 입안에서 뭉칠 정도로 쉴 새 없이 일했죠.” 그가 일했던 강원도 삼척시 도계 대방광업소를 함께 찾았다. 20년 만에 온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강원도 삼척시 도계광업소 도계갱구 입구. 지난 2월에 이미 마지막 채탄 작업을 했고 이후 정리 작업 중이었다. [사진 전제훈] 도계광업소 광부들이 지난달 30일 폐광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전제훈]   “여기도 쫄딱 구뎅이(작은 탄광), 저기도 쫄딱 구뎅이.” 수풀에 가려지고 흙과 바위로 메워져 대체 저기에 탄광이 있었나 싶었다.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전 탄광 수는 347개. 실제론 2~3배에 달하는 탄광이 있었단다. 하지만 이달 말 도계광업소가 89년 만에 문을 닫으면 대한석탄공사 산하 국영 탄광은 이제 없다. 민영인 경동탄광 상동광업소 한 곳만 남는다.   “경동탄광도 2년 안에 문을 닫습니다. 제가 거기서 32년간 일했잖아요. 최초의 탄광인 평양사동탄이 생긴 지 124년 만에 ‘0’이 되는 거죠. 가히 ‘탄광의 종언’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관련기사 “암흑서 빛난 순간, 후손에 남겨야죠” 물 위에 건물 세웠다, 까치발 … 물이 산을 뚫었다, 구문소 이희탁(71) 중앙진폐재활협회장의 말이다. ‘블랙 다이아몬드’ 혹은 ‘검은 진주’로 불리는 석탄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에너지 수입 의존율이 97%나 되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주력이자 ‘한강의 기적’을 만든 일등공신. 1973년과 1977년 두 차례의 석유파동과 1998년 외환위기 등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기도 했다. 합리화 이전 1988년 전국 석탄 생산량은 2430만t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지난해는 그 2.2%인 54만여t에 불과하다.   1903년 평양 사동탄광이 개발된 이후 120여 년. 우리나라 탄광이 줄줄이 사라지고 있다. 2025년 6월 대한석탄공사의 마지막 '국영' 광업소인 도계광업소가 폐업하고, 2년 뒤인 2027년 하반기에는 마지막 '민영' 광업소인 경동 상덕광업소도 문을 닫는 것으로 알려졌다. '블랙 다이아몬드'로 부른 석탄산업의 종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도계역 근처의 선탄장(석탄을 열차에 선적하는 곳) 이미 20여 년 전부터 사용이 중지된 채 검은 흔적만 남기고 있다. 김홍준 기자 모순의 공간 막장, 한때 산업화의 주력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20여 년이 탄광의 전성기였소. 개가 지폐를 물고 다녔어요. 나는 못 봤지만, 허허.” 이 회장이 쓴웃음을 지은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광부들이 있는 도계의 위기 때문이다.   “1970년대 도계 인구는 4만5000명이 넘었어요. 주민등록상이니 실제론 6만 명에 달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난달은 8900여 명입니다. 그중 강원대 삼척캠퍼스 학생이 2000명. 곧 여름방학에 접어들면 거리가 휑해집니다. 파독 광부 훈련소였던 도계가 이렇게 되다뇨. 일자리가 있어야 미래가 있어요. 퇴직한 광부를 재교육해도 도계에 일할 기반이 없는데 여기 있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나가죠. 남는 건 노인입니다. 저 앞에 도계중학교 관악부는 최민식 주연의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의 모델이 될 정도로 실력이 좋았습니다. 지금은 인구 감소로 학생 수가 줄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안타깝네요.”   노인이 많다는데, 도계의 평균 연령은 50.4세에 ‘불과’하다. 이곳에 사는 20대 초반 대학생들이 평균 연령을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지난해 문 닫은 장성광업소 철암역두 선탄장이 있는 태백시 철암동은 60.9세다. 서울 자치구 중 평균 연령이 가장 높은 강북구는 48.9세다.   지난 5일 오후 6시30분. 연휴를 앞두고 흥청거릴 시각. 도계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대학생 몇 명만 거리를 오갈 뿐 한산했다.   폐광을 앞둔 도계광업소가 있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은 한참 흥청거릴 오후 6시 30분에도 거리가 한산했다. 상가 공실도 많다. 김홍준 기자 이달 말 폐광되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광업소 장미사택 골목. 1970년대 광부들 숙소가 들어선 뒤 늘 북적였던 이곳도 이젠 적막만 감돌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제 미용실도 손님이 5년 전보다 절반으로 줄었어요. 하루 한 명만 올 때도 있죠. 저기 앞에 가게들 보세요. 임대 딱지로 도배했잖아요.” 장금숙(63)씨의 남편도 광부였다. 일찌감치 명퇴하고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단다. 사진작가 전제훈(63)씨도, 철암동자치위원장 강호택(60)씨도 명퇴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기후위기가 부채질한 사양산업. 석탄 발전 비중도 어느새 3위로 내려앉았다. 지난해 국내 총 발전량 59만5601GWh 중 원자력이 18만8754GWh(31.7%)로 가장 많았다. 이어 가스(16만7205GWh·28.1%)와 석탄(16만7152GWh·28.1%) 순이었다. 석탄 발전 비중이 1위 자리를 내준 건 2006년 이후 18년 만이다. 한때 광부들이 탄가루 묻은 옷을 털며 들어섰을, 1970년대 지은 도계 장미사택은 이미 무너진 채였다.   “저도 2년 전 명퇴했습니다. 명퇴자는 셋 중 하나입니다. 백수거나, 저처럼 다행히 자영업을 하거나, 아니면 떠나거나.” 강호택씨의 말은 ‘근로자’가 거의 없다는 뜻. 그는 철암탄광역사촌에서 편의점을 운영한다. “아버지가 광산 노동자였던 이재명 대통령이 공약으로 청정에너지·의료·관광 등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특별히 새롭지 않습니다. 다 논의되던 거죠. 말만 나오고, 지지부진하다는 방증입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 필요합니다.”   이 대통령은 2040년까지 석탄발전소 61기를 모두 폐쇄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28개 석탄발전소 문을 닫으면 당장 일자리 1만6000개가 사라진다. 당진 1~4호기만 폐쇄해도 국내총생산(GDP)이 약 2조3349억원 줄어든다는 전망도 나온다.   “청정에너지 구호보다 당장 저 앞에 탄가루 날리는 선탄장부터 손봐야 할 것 같아요. 철암역에 무궁화호가 하루 2회 왕복합니다. 다음 열차를 탄다고 관광객은 고작 25분 머무르다 갑니다. 그 시간에 국수 한 그릇이라도 먹겠어요? 여기가 명색이 근대산업문화유산이고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촬영지인데. 정부가 대책을 보다 세밀하게 세워야 한다는 건 이래서입니다.” 철암동 공기는 매캐했다. 강씨는 “오늘은 바람이 안 불어 그나마 양반”이라고 했다.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인근의 철암역두(鐵岩驛頭) 선탄장과 철암탄광역사촌. 철암역두 선탄장은 장성광업소 산하로 1939년부터 가동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탄시설이다.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가 됐다. 사진 왼쪽의 철암천 위에 기둥을 세워 만든 '까치발'은 과거 탄광촌의 번성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원래 있던 건물은 상가로 활용하고, 철암천 쪽으로 공간을 확장해 지층 아래 살 집을 마련하면서 건물을 지지하기 위해 까치발처럼 기둥을 만들었는데, 이곳이 ‘까치발 건물’로 부르게 됐다. 김홍준 기자   “바람 심한 날이면 하루 4t의 탄가루가 날립니다. 그런데 태백시 장성광업소에서 캐낸 석탄은 이곳 철암동까지 지하로 이동하기 때문에 탄가루가 날리지 않습니다. 장성에선 흰 운동화를 신고 철암에선 검정 운동화를 신는다는 뼈아픈 농담도 있죠.”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은 “이런 스토리라인으로 탄광 유산을 키워 관광부터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두가 근대산업문화유산인 철악역두 선탄장과 태백 장성동의 장성이중교는 일제 수탈의 아픔을 겪었고, 광부 남편을 잃은 대가로 받은 선탄부 직업은 쓰라린 특혜였다고 정 소장은 평한다. 막장은 모순의 공간이었다. 구타와 얼차려, 사고가 빈번했지만 대한민국 산업의 희망이었다.   “탄광은 도시 주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이는 경제적 막장이었어요. 탄광촌은 가장인 남편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생존이 가능했던 열악한 사회 구조였습니다. 가장 약자는 여성이었고요.”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인근의 철암역두(鐵岩驛頭) 선탄장은 장성광업소 산하로 1939년부터 가동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탄시설이다. 2024년 6월 장성광업소가 문을 닫았지만 이전에 캐낸 석탄은 아직도 운반하고 있다. 철암역두 선탄장은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가 됐다. 김홍준 기자   탄광 전성시대를 열었던 1960년대. 광부는 전국에서 모였다. 탄가루 마시며 뼈 빠지게 일해 돈을 싸안고 돌아갈 꿈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했다. 탄광의 시스템 혹은 환경 때문이었다.    탄광에서는 돈 대신 쌀로 임금을 치르기도 했다. 돈 반, 쌀 반으로 주기도 했다. 그나마 한 달, 두 달 늦게 준 곳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광부들은 ‘쓸 곳’이 많았다. 정 소장은 “당시 ‘탄광 근처가 흥청거렸다’ ‘개가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표현을 쓰는데, 광부들은 씀씀이가 컸어요. 그들은 ‘오늘도 살았다’며 술로 버텼고, 사고 시 자신을 구할 동료와 술로 서로 이어졌어요. 흥청거릴 수밖에요. 가전과 생필품도 사야 했죠. 외상을 하고, 가게와 ‘맞장부’라는 걸 작성해 갚아나갑니다. 이자가 붙었어요. 5부까지요. 그런데 탄광에서는 월급을 늦게 줍니다. 빚만 쌓이는 거죠. 광부 99%는 그랬습니다.” 나머지 1%의 상당수는 사고로 죽었다.  석탄을 고르고 있는 선탄부들. [사진 전제훈]   ‘진정한 위너(승자)’는 쌀장수였단다. 광부들은 회사에 임금 대신 지급한 쌀을 현금으로 바꿨다. ‘쌀깡’이었다. 쌀장수는 탄광에 판 '월급용' 10만원어치 쌀을 광부에게 7만원에 다시 사들였다. 대부분의 광부는 이런 상황의 악순환에 갇혀 돈을 모으지 못했다. 고향이나 타지로 떠날 엄두도 안 났다. 그래서 계속 탄광 지역에 살았고, 다른 산업 기반이 없는  그들의 아들들은 광부가 될 가능성이 컸다. 아주 극소수는 ‘독일 병정’이라는 빈축을 들으며 엄격히 생활해 돈을 거머쥐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 소장은 "나도 역시 태백에서 나고 자란 광부의 아들이자 전직 광부"라고 했다. 그는 10년간 일한 장성광업소에 받은 퇴직금을 쏟아부어 탄전문화연구소를 차렸다. 정 소장은 "대체산업은 그것대로 물색하되, 지역 정체성을 살린 관광 자원 활성화가 필요하고 수익은 그 다음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탄광 문화를 유네스코에 등재시킨다는 목표다.   70~80년대 한 해 평균 175명 사망사고 1960년대 탄광촌의 모습. [중앙포토] ‘광부의 딸’ 이명숙(65)씨는 강원도 정선군 함백산 자락의 정암사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기억나요. 아버지가 일하시던 684광산. 출근하실 때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면 안 됐고, 나와 어머니는 잘 다녀오라고 말하면 안 됐어요. 출근길에 광부가 여성을 만나면 재수 없다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을 정도였죠. 탄광촌 여자들은 고개를 숙이고 다녔어요. 부부싸움? 그러면 남자들은 출근 안 했어요. 여편네 바가지 탓에 막장에서 죽을 수 있다면서요.”   탄광 1970~80년대엔 한 해 평균 175명이 탄광에서 사망했다. “그런데도 어릴 때 저는 ‘사키야마(막장 맨 앞에서 일하는 갱부)’가 일본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멋있어서 나중에 꼭 결혼한다고 했죠. ‘야, 명숙아 너 사키야마랑 결혼했냐’고 동네 아저씨들이 놀리곤 했어요.”   이구호(79)씨도 사키야마였다. 경북 예천에서 농사를 짓다 돈 벌러 가자는 동서들의 꾐에 태백에 왔단다. 37세 늦깎이 광부였다. “우리 식구가 6명이었소. 아내가 매일 도시락을 8개나 쌌지. 아내가 참 고마워. 그렇게 잠깐 일한다는 게 벌써 40여 년이 지났소, 쿨럭.” 진폐는 광부들의 훈장이자 평생 뗄 수 없는 동반자. 이씨가 텃밭 일을 잠시 멈추고 철암역두 선탄장을 바라봤다. '대한민국 탄광의 종언' 취재 중 만난 '블랙 다이아몬드 전사'들과 취재원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전옥화 시인, 이명숙 문화관광해설사,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이희탁 중앙진폐재활협회장, 강호택 철암동자치위원장, 이구호씨. 김홍준 기자   탄광의 종언. “탄광의 미남은 사키야마다/내일은 어데 가서 뗑깡을 놓나/옹헤야 뎅헤야 탄광이다 사키야마다.” 예비 광부들이 불렀던 ‘탄광가’도, “여기는 삼척이라 우리의 탄광/3억 톤 불이 되어 열을 뿜을 제/이 살림 뻗으리라 삼천만 행복.” 삼척탄광 사가인 ‘삼탄가’도 이젠 탄광과 함께 묻혀버리지 않을까.     삼척·태백·정선=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5.06.14 00:01

  • "이 대통령 실용외교,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메시지가 시금석 될 것"

    "이 대통령 실용외교,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메시지가 시금석 될 것"

     ━  6·3 대선 리뷰, 새 정부에 바란다 - 전문가 4인 좌담   동서 분열, 세대 대립, 젠더 갈등…. 6·3 대선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가 축적되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기존 단층선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고 새로이 추가된 단층선은 더 확연해졌다.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중앙SUNDAY는 이번 대선의 의미와 남긴 과제, 그리고 향후 이재명 정부가 직면할 도전 및 해결 방안 등을 모색해보는 자리를 가졌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 임성학 서울시립대 교수, 신정섭 숭실대 교수, 이재묵 한국외대 교수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시아연구원에서 머리를 맞대고 이에 대해 논의했다.   우선 이번 대선을 어떻게 봤는지부터 물었다.   6·3 대선 하루 전인 2일 오후 경기 성남시 야탑역 광장에서 열린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선거 유세에 모인 지지자들이 환호를 보내고 있다. 이 대통령은 2010~2018년 성남시장을 지냈다. 이 대통령은 3일 49.42%의 득표율로 당선됐으며, 1728만7513표는 역대 최다 득표다. 김성룡 기자 ▶손열=“12·3 비상계엄부터 6·3 조기 대선까지 딱 6개월이다. 정부 기능이 멈춘 ‘잃어버린 6개월’을 보냈다.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조기 대선을 치르면서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반복했다. 정치적으로 ‘잃어버린 8년’이 아니었나 싶다.”   ▶신정섭=“6·3 대선의 관전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과반을 가져갈 것인가, 둘째 양당에 대한 비호감이 높은 상황에서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약진해 10%를 넘을 것인가였다. 둘 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이재명 대통령은 50%를 넘기지 못했다. 역대 최다 득표라고 하지만 득표율만 보면 지난해 총선에서 민주당 지역구 득표율(50.56%)보다 낮았다. 제3세력도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겼다. 이준석 후보는 10%를 넘기지 못했고,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는 1%가 채 안 되는 역대 최저 득표율을 기록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치른 19대 대선에선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6.17%까지 얻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하나를 들자면 사표 방지 심리다. 승자 독식 구조인 한국 대선 특성상 ‘상대방이 집권하면 안 된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 제3정당으로 향했던 표심을 억제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성학=“윤석열 전 대통령과 분명히 절연하지 않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가 40% 이상 득표했다는 것은 문재인 정부 때부터 심화된 한국 사회의 정치 양극화가 심각한 단계라는 것을 보여줬다. 선거로 정권이 바뀌면 안정적 분위기가 곧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분열상을 보니 매우 험난한 길이 될 것 같다.”   ▶이재묵=“이 대통령으로서는 고무적인 면과 실망스러운 면이 교차한 선거였다. 역대 최다 득표였지만 과반에 실패했고, 김문수·이준석 후보의 득표 합계는 이재명 후보보다 높았다. 특히 서울에선 관악·동대문·마포 등 대학가에서 이준석 후보의 표가 많이 나왔다. 앞으로 주요 유권자층이 될 후속 세대의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재차 확인된 것이다. 반면 부산·울산·경남(PK)에서 40%가량 득표한 건 고무적일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PK도 해 볼만한 지역이 됐기 때문이다. 또 한강벨트를 탈환했는데, 종합부동산세를 낮추고 상속세를 완화한 전략적 포석이 주효했다고 본다.”   이준석, 관악·동대문 등 대학가 표 많이 나와 ▶신=“이 대통령과 민주당이 (국회·정부를 확보한) 단점 정부가 됐지만 예상보다 낮은 득표는 향후 정국을 주도하는 데 있어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대선 득표율은 40%대 초반이었지만,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득표율은 20%대에 그쳤다. 문재인 정부는 80%대의 높은 지지율로 출발했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도 컸다. 이재명 정부는 이렇게 높은 지지를 얻으며 출발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번 선거는 사실상 정책 경쟁이 없었다. 양당의 대선공약집이 사전투표일에 임박해서야 나온 게 그 상징이었다.   5일 서울 사직동 동아시아연구원에서 대담 중인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 임성학 서울시립대 교수, 신정섭 숭실대 교수, 이재묵 한국외대 교수(왼쪽부터). 최영재 기자 ▶손=“정책과 관련해선 거의 깜깜이 선거에 가까웠다. 특히 외교정책이 굉장히 중요한 시점인데 이슈를 만들지 못했다. 정서적으로 서로를 혐오하고 퇴출되어야 하는 세력으로 보니까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이 토론의 전부였다. 이런 양극화가 심화할수록 정책의 자리가 더 좁아질 텐데 향후 한국 정치의 큰 도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기존 정책의 재탕이 많았다. 시간이 부족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기본소득 같은 기존의 핵심 어젠다가 많이 빠졌다. 강한 공약을 꺼냈다가 표를 잃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가고 싶다는 바람이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양당이 공약에서는 차별화가 안 됐다.”   이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곧바로 대통령직을 시작했다. 정치·경제·외교 등 다중 위기 속 몸풀기도 전에 전력질주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최다 득표, PK 선전, 4050 세대의 열렬한 지지 등에 고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전임자들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윤 전 대통령은 다수당이 입법 독주를 할 때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 모르고 힘으로 제압하려다가 실패했다. 이 대통령은 이런 도전은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대야소였던 문재인 정부도 승리에 도취되어 ‘적폐 청산’에 몰두하다가 정권재창출에 실패했다. 이 대통령도 ‘내란을 종식시켰다’ ‘강력한 개혁을 해야한다’고 도취될 수 있는데, 오히려 ‘왜 내가 과반을 얻지 못했나’를 고민하면서 남은 절반을 어떻게 나의 편으로 끌어들일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전임자와 다른 종착지에 도달할 수 있다.”   ▶임=“다들 탄핵 후 대선을 치르며 한국의 민주적 회복성을 이야기하지만 현재 내재된 문제들은 언제든 다시 발현될 수 있다. 굉장히 걱정이 된다. 후안 린츠와 알프레드 스테판은 민주국가의 붕괴 과정을 ①민주주의 체제 정당성의 위기 ②정치적 양극화  ③헌법적 위기로 분석했다. 우리의 현실이 매우 흡사하다. 지금처럼 정치가 양극화하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헌법적 문제로 만들게 된다. 헌법 기관 간의 갈등으로 확산하면서 결국 체제 붕괴로 이어진다. 윤 전 대통령 때의 행정부와 입법부의 위기는 이제 해결되겠지만, 입법부와 사법부의 갈등은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이재명 정부는 양측의 갈등이 큰 위기로 치닫지 않도록 중재하고 노력해야 한다.”   ▶신=“지역주의는 여전히 살아있고 세대 갈등이 더해진데다 젊은 세대 내에선 젠더 갈등까지 깊어졌다는 게 확인됐다. ‘통합’이 더 힘들어진 것이다. 특히 세대 갈등은 꽤 오래갈 거란 생각이 든다. 4050 세대는 ‘보수정당=기득권’이라 생각한다. 이들에게 민주당은 항상 핍박받는 정치세력이다. 반면 2030 세대는 ‘민주당=기득권’이다. 이들이 정치에 눈을 뜬 건 10여 년 전부터인데 민주당이 2016년 총선에서 1당이 됐고, 이후 줄곧 의회를 장악했고 대체로 정부도 갖고 있었다. 민주당은 늘 자신의 지지층이 억압받는 계층이라지만 2030은 이를 모순이라고 여긴다. 이런 괴리가 쌓이면서 젊은 세대의 민주당에 대한 반감은 계속 커질 수 있다.”   야당도 역할 할 수 있게 정치 공간 제공해야 ▶이=“지금 상황은 도리어 보수 세력이 위축돼 있다. 전광훈 목사로 상징되는 극우 시위나 유튜브 정도로 위세를 과시한다. 세련미를 잃어버려 사회적으로 사실상 고립됐다.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 이후로는 호남 뿐 아니라 수도권에서 안정적 지지가 나오고, 주요 유권자 층에서도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 민주당은 야당일 때만 잘 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사회 주류로서의 정체성 정립이 필요하다.”   결국 이 대통령과 민주당이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주문으로 이어졌다.   ▶임=“내년에 지방선거가 있고 2년 10개월 뒤 총선이다. 문재인 정부 때와 비슷한 정치일정인데, 문재인 정부는 두 선거를 모두 이겼지만 정치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야당에게도 정치적 공간을 열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게 화근이 됐다. 정치적 타협을 포기하면서 사법에 기대는 정쟁의 사법화가 이때부터 심화했다. 이 대통령은 야당 대표와 자주 만나 밥도 먹고, 야당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신=“앞선 정부의 실패는 결국 친문계, 친윤계가 모든 걸 쥐면서 소통이 안 됐기 때문이다. 이들이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의 귀를 막고 내부 비판을 어렵게 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통합을 얘기하는데, 민주당 내 주요 포스트는 친명계로 꽉 차 있다. 여당 내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내각도 민주당 외의 인사들로 구성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임=“윤석열 정부가 초기 6개월 만에 부정적 평가로 기울어진 요인이 인사 문제다. 국무총리 지명은 조금 더 통합적인 인물로 했으면 했다. 다만, 인수위가 없는 상황인 만큼 손발이 잘 맞는 인사를 기용한 것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이=“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이 ‘첫 총리 인사가 실망스럽다’고 하더라. 국민의힘 정부에선 호남 인사를, 민주당 정부에선 영남 인사를 쓰는 것이 기존 인사의 ‘문법’이었다. 그런데 서울 출신에 친명계로 분류된 인사를 세우니까 뒷말이 나온다. 다만 총리에게 권한을 많이 나누고 분권을 실현한다면 이런 잡음도 희석되지 않을까.”   ▶임=“야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여야가 합의해서 빨리 할 수 있는 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사실 기후 문제나 AI 등은 양측 공약이 별 차이가 없었다. 지난해 연금개혁도 여야 합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이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의 반응이 여러 해석을 낳고 있다. 두 정상 간 통화가 지연되고 미국이 당선 반응에 대중 경고를 덧붙인 것 때문이다.   ▶손=“워싱턴의 강경파 쪽에서 나오는 우려들이 있다. 주로 중국과 관련되어 한국이 한·미·일 협력 대오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용과 국익에 기반한 외교를 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취임 메시지가 아직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채, 그간의 이미지를 놓고 나오는 이야기라고 본다. 다만 실리를 강조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긴 하다. 이재명 정부의 실용외교는 6월 22일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때 어떤 메시지를 내느냐가 시금석이 될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어제(4일) 한·미·일 협력도 중요하고 한국과 일본의 파트너십이 계속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냈는데, 그간 민주당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의혹 제기나 강제동원 관련 제3자 변제안 비난 등에서 보인 태도와는 달랐다. 이재명 정부가 전향적으로 확실한 매듭을 지을 필요가 있다.”   ▶이=“이런 때 중국이나 북한보다 일본 정상과 먼저 만난다든지 해서 그런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면 이 대통령의 정치적·외교적 공간을 넓힐 수 있다.”     유성운·신수민 기자 pirate@joongang.co.kr

    2025.06.07 01:31

  • "이참에 보수라는 간판 내리고 강북·비정규직 품는 정당 돼야"

    "이참에 보수라는 간판 내리고 강북·비정규직 품는 정당 돼야"

    4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1시간 후 열릴 이재명 대통령 취임식 준비로 부산했다. 평소보다 출입 통제가 엄격해진 의원회관 입구에선 취임식에 참석하려는 민주당 의원들이 나오고 있었다. 이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을 만났다. 대선 패배 후 국민의힘은 어떤 길을 마련할지 궁금해서다. 소장파, 서울 강북, 30대… 김 의원을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국민의힘에서 쇄신 얘기가 나올 때마다 거론되는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김 의원은 “유세 과정에서 마주한 민심이 지난 총선보다 차가웠다”며 “‘보수’라는 간판도 내려놓을 각오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은 4일 6·3 대선에 대해 “민심이 총선보다 차가웠다”고 했다. 김종호 기자. 대선 결과를 어떻게 보나. “냉정한 성적표다. 몇 번 모의고사를 치른 뒤 최종 시험 결과가 나온 거다. 12·3 비상계엄 후 국민의 70%가 탄핵에 찬성했다. 그런데 우리는 탄핵에 반대하는 30%의 거품이 빠질까봐 전전긍긍하면서 헌법재판소, 광장, 윤석열 전 대통령 관저 앞으로 달려갔다. ‘오답’이라는 모의고사(여론조사) 점수가 계속 나왔는데도 오답 노트를 무시하고, 해오던 대로 시험을 봤으니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오답 노트를 왜 무시했을까. “‘이건 오답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소수였고, 한편으로는 그런 지적이 계파 싸움처럼 되어버려 의미가 희석되기도 했다.”   유세에서 느낀 민심은 어땠나. “지난 총선보다 안 좋았다. 지지자 중에서 ‘이게 뭐냐’며 꾸짖는 분들이 많았고, 책임감과 죄책감에 유세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이건 나은 편이다. 선거 치를 때 진짜 무서운 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차라리 화를 내면 ‘사실은 이렇습니다’라고 설명을 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민심이 너무나 차가웠다. 이번에 수도권에서 선거 치른 사람들은 여름날의 찬바람을 느꼈을 거다. 도봉갑 득표율은 이재명 후보 49.06%, 김문수 후보 41.18%였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로 되돌아간 셈이다. 탄핵 이후 치른 21대 총선에서 내가 얻은 득표율이 41%였다.” (김 의원은 지난 22대 총선에선 49%를 득표해 당선됐다.)   대선 과정에서 가장 아쉬운 건? “복기해 보면 중간중간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다. 한동훈 전 대표가 내건 조건 3가지(탄핵 반대에 대한 당의 입장 선회, 윤 전 대통령 부부와 당의 절연, 전광훈 목사 등 극단 세력과의 선 긋기)가 무리한 게 아니지 않았나. 특히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와 단일화를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문수 후보가 거부하면서 단일화 가능성도 사라진 거다. 단일화가 됐다면 해볼 만한 선거였다고 생각한다.”   일각에선 단일화를 했어도 이기기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시너지 효과를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주변에 기권한 사람들이 많았다. 탄핵에 찬성하고 윤 전 대통령과 절연을 요구했던 우리 당 지지자들이 이탈한 거다.”   5월 26일 오후 서울 도봉구 방학사거리에서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선거 후보의 노원·도봉·강북 집중유세에 나서기 전 김재섭 의원이 지원연설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당의 쇄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윤 전 대통령을 배후로 호가호위했던 사람들, 그 연장선에서 당에 해로움을 줬던 분들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 김기현·나경원·윤상현, 소위 ‘김나윤’은 빠질 수 없다.”   민심과 괴리된 ‘TK당’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지만, 쇄신이 안 됐다. “이번 대선을 보면 ‘20대는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라는 등식이 또 무너졌다. 젊은 세대가 갖는 박탈감과 사회적 차별을 무시한 결과다. 국민연금 개악이 대표적이다. 30대인 내 친구들은 탄핵 못지않게 분노했다. 국민의힘은 이런 지점에서 새출발해야 한다. 서울로 한정한다면 강남이 아니라 강북, 대기업 노조가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한 세대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 환골탈태는 불가능하다. 이참에 ‘보수’라는 간판도 내렸으면 좋겠다.”   무슨 말인가. “보수라는 정체성을 우리가 논의해서 채택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붙어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보수는 이래야 한다’며 자신을 옭아맸던 것 같다. 시장자유주의를 지켜야 한다면서, 사실 그걸 잘 지키지도 않았다. 우리가 어떤 가치에 공감하고 무엇을 지향할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당내 논쟁이 필요할텐데. “간절하다. 치열하게 토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당이 무서운 건 토론을 안 한다는 점이다. 당이 어떤 결정을 할 때 관성에 따라 움직인다. 이번에 윤 전 대통령 탄핵 과정도 그랬다. 당론이 가장 중요하고, 과거 사례를 보면 대통령을 잘 지켜야 하고… 그러면서 묵인 속에 흘러갔다. ‘정풍 운동’이 벌어지고, 서로 치고받아야 국민들도 ‘뭔가 하는구나’ 하지 않겠나.”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2025.06.07 01:20

  • 인턴십 확대, 맞춤형 직업훈련, 실무 교육 잘 맞물려야

    인턴십 확대, 맞춤형 직업훈련, 실무 교육 잘 맞물려야

     ━  ‘쉬었음’ 청춘 50만, 대한민국이 시든다   부산에서 열린 일자리 페스타에서 청년층 구직자들이 취업 상담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그냥 쉬었음’으로 분류된 청년들은 일반적으로 취업을 하지도, 구직 활동을 하지도 않은 상태로 파악된다. 겉보기엔 자발적 휴식이나 재충전의 시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냥 쉰’ 이유를 살펴보면 일자리 부족, 취업 준비를 위한 자기 계발, 번아웃 등이 주된 원인으로 나타난다. 실상은 ‘그냥 쉰’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쉰’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최근 ‘그냥 쉰’ 청년 인구가 증가하는 현상은 청년층의 일자리 수요와 노동시장 공급 사이의 미스매치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특히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고질적 문제인 이중 노동시장 구조가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대기업과 정규직 중심의 1차 노동시장은 구직 대기자가 많아 초과 공급 상태인 반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중심의 2차 노동시장은 기피 현상으로 인해 인력난을 겪고 있다.   실제 연구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상향 이동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즉 2차 노동시장에서 1차 노동시장으로의 이동 경로가 갈수록 좁아지면서 이중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은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긴 대기 시간과 반복된 준비 과정을 거치고 있고, 그 과정에서 탈진하거나 좌절을 겪으며 결국엔 ‘그냥 쉬는’ 상태에 빠지기 쉽다.   관련기사 “업무량 과중, 미래 안 보여…버틸 수 없었죠” ‘쉬었음’ 청춘 50만명…대한민국이 시들어간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단순한 시장 구조의 문제를 넘어 채용 문화의 이중성을 낳는다. 기업들은 “뽑을 만한 인재가 없다”거나 “요즘 청년들은 준비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지만 청년들은 오히려 인턴부터 정규직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직무 정의나 훈련 등 기본적인 준비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이로 인해 기업과 청년층 사이의 불신은 커지고, 청년들은 반기업 정서가 확산되는 가운데 자기 계발 없이 ‘힐링’에만 의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게 된다.   정부도 공정거래·산업정책·노동정책 등을 통해 이중구조 개선을 시도해 왔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이와 관련, 단기적으로 ‘그냥 쉼’을 줄이기 위해서는 청년들에게 경력 형성의 동기와 기회를 제공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인턴십 확대, 맞춤형 직업훈련, 실무 중심 교육 등이 필수적이다.   삼성전자가 삼성청년SW아카데미(SSAFY)처럼 소프트웨어 전공자뿐 아니라 인문·예체능계 출신도 참여할 수 있는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게 대표적 사례다. 이는 단순한 고용 프로그램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청년들에게도 동기를 부여하며, 경제 전반의 역동성도 높일 수 있는 전략적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경영자 단체나 산업별 협회가 주도적으로 나서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성장 경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개별 기업이 인력 훈련을 독자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이들 단체가 협력해 훈련 기회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전환형 인턴십을 제도화해야 한다. 인턴십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인턴 마일리지 제도’ 도입도 고려할 만하다.   원청기업과 하청기업 간의 상생도 중요하다. 원청이 하청의 근로조건과 작업환경 개선, 직업훈련 등을 적극 지원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나아가 동일 직무에 대한 원청·하청 간 임금 격차도 수치 관리를 통해 점차 완화해 나가고 원청의 브랜드를 활용한 공동 채용과 직업훈련 등도 추진할 수 있다.   디지털 전환 시대의 노동시장은 개인의 직무 능력을 중심으로 한 직무 기반 노동시장으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1차든, 2차든 상관없이 직무역량이 곧 노동시장 보상의 핵심이 돼야 한다. 이는 공정하고 투명한 노동시장을 구축하는 길이자 ‘그냥 쉼’에 빠진 청년들에게 다시 미래를 준비할 동기를 제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2025.05.31 01:34

  • "업무량 과중, 미래 안 보여…버틸 수 없었죠"

    "업무량 과중, 미래 안 보여…버틸 수 없었죠"

     ━  ‘쉬었음’ 청춘 50만, 대한민국이 시든다    중소기업 인력난이 해를 거듭할수록 가중되고 있다. 근로자들은 갈수록 고령화하고 있는 가운데 청년들의 중소기업 기피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상시근로자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 근로자 중 50세 이상이 48.6%로 절반에 육박했다. 2014년 38%에서 10%포인트 이상 급증한 수치다. 300인 이상 기업의 50세 이상 비중이 26.4%인 것과도 확연히 대비된다. 업계에선 국내 기업의 99%를 차지하고 전체 일자리의 81%를 책임지고 있는 중소기업이 급속한 고령화에 청년층 기피 풍조와 이른 퇴직 등이 맞물리면서 존폐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그렇다면 청년들은 실업난에도 불구하고 왜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걸까. 중소기업에 다니던 청년들은 왜 퇴직을 결심하게 되는 걸까. 대다수 청년들은 ‘생각보다 열악한 근무 환경’과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첫손에 꼽았다. 최우석(27)씨는 첫 직장으로 중소기업을 선택했지만 2년 만에 퇴사했다. 그는 “업무는 정규직과 다를 게 없는데 급여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며 “결혼과 주택 마련 등 앞날을 생각하니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두려움이 몰려 왔다”고 말했다.   “몇 달을 버티다가 결국 그만뒀어요. 업무량은 과중한데 일할 사람은 부족하고. 퇴근 후엔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죠. 게다가 일하면서 뭔가 배우고 발전한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다 보니 하루하루 스트레스만 쌓여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경기도의 한 중소 제조업체에 다니던 박성민(28)씨도 최근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했다. 1년여 전 중소기업에 취직하게 됐다는 소식에 친구들 모두 강하게 만류했을 때만 해도 그는 나름 자신감에 차 있었다. 비록 청년층 대부분이 꺼리는 중소기업이었지만 비교적 견실한 제조업체라는 평판에 충분히 도전할 만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왜 중소기업에 청년이 없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더라고요.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너도나도 그만두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저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어요.”   박지은(24)씨도 서울의 한 중소 제조업체에 사무직 인턴으로 입사했다가 3개월 만에 그만뒀다. “작은 회사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정규직이 돼도 계속 다닐 만한 곳이겠다 싶어 지원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현실은 전혀 달랐어요. 젊은 직원이 드물다 보니 웬만한 잡무는 모두 저에게만 몰렸고요. 지금은 좀 힘들어도 미래가 보이면 그래도 버티겠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이 없더라고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관련기사 ‘쉬었음’ 청춘 50만명…대한민국이 시들어간다 인턴십 확대, 맞춤형 직업훈련, 실무 교육 잘 맞물려야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중소기업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200인 규모의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가연(26)씨는 최근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이씨는 “무엇보다 워라밸이나 복지 측면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과 너무 비교가 된다”며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으면 다시 준비해서 좀 더 나은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방 제조업체에 취업한 김민재(28)씨는 “기숙사 샤워기가 고장 나도 몇 달째 그대로고 연차를 쓰려 해도 눈치가 많이 보여 아파도 웬만하면 그냥 출근하는 중”이라며 “물론 직원들을 잘 챙기는 중소기업도 많다고 들었지만 대부분은 사정이 열악한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청년층의 부재는 중소기업의 연구개발(R&D) 인력 감소와 그에 따른 경쟁력 약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중소기업 재직 연구원은 20만1644명으로 전체 기업 연구원의 49.4%를 차지하고 있지만 2023년에 비해 1만 명 이상 줄어드는 등 해를 거듭할수록 감소 추세가 가팔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중소기업 대표들도 고충은 마찬가지다. 경기도 이천에서 중소 물류업체를 운영하는 정모(57)씨는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이유를 모르는 업체 대표는 거의 없을 것”이라며 “하지만 중소기업 자체의 노력만으론 쉽지 않은 만큼 보다 실질적인 정부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청년 인력이 오질 않으니 복지에 신경 쓸 여력이 줄고, 그러다 보니 청년들이 더욱 기피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며 “이런 고리를 끊지 않으면 중소기업 경쟁력은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매년 약 3만 개의 ‘참 괜찮은 중소기업’을 선정해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업의 실질임금과 복지 수준 등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우수 기업에는 세제 감면 혜택을 제공하는 등의 보완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주문이다.   황용식 세종대 교수는 “중소기업도 기술력을 갖춰야 생존할 수 있는 만큼 정부도 중소기업 R&D 지원을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며 “그래야 청년층도 중소기업을 ‘임시 발판’이 아니라 장기 경력의 출발점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5.05.31 01:27

  • '쉬었음' 청춘 50만명…대한민국이 시들어간다

    '쉬었음' 청춘 50만명…대한민국이 시들어간다

    “계속 아르바이트만 했어요. 정규직은 경력이 없으면 취업이 안 된다고 하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직면하다 보니 이렇게 힘들게 고생할 바에야 그냥 쉬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이세욱(29·서울 동작구)씨는 올해 초부터 이력서 제출을 단념한 채 ‘쉬는 중’이다. 대학 졸업 후 반복된 단기 비정규직과 경력 단절, 그리고 끝없는 탈락 통보 속에서 “노력만으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면서다. 그는 “몇 달째 쉬다 보니 이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 무덤덤하게 느껴질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쉬는 청년’이 최근 급격히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월 15~29세 중 쉬고 있다고 응답한 ‘쉬었음 청년’은 50만4000명으로 사상 처음 50만 명을 넘어섰다. 2003년 관련 통계 집계 이래 최대치다. ‘쉬었음 청년’은 경제활동인구조사 때 취업이나 진학 준비 없이 ‘쉬고 있다’고 답한 비경제활동 청년 인구를 일컫는다. 이들은 일도, 구직 활동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쉬고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구직 활동을 했음에도 취업하지 못한 ‘실업자’와는 별개로 분류된다. 지난 2월 청년 실업자는 26만9000명에 청년 실업률은 7.0%였지만 실제로는 이런 통계엔 포함되지 않은 ‘쉬었음 청년’이 두 배 가까이 더 존재하는 셈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특히 ‘쉬었음 청년’ 중 지난 1년간 구직 활동 자체를 한 적이 없다고 응답한 청년도 절반이 넘는 53.4%나 됐다. 이런저런 사유로 취업을 ‘잠시 미룬’ 청년보다 1년 넘게 장기간 일할 마음조차 갖지 않은 청년이 더 많다는 얘기다. 김성희 고려대 교수는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한 청년들의 ‘쉬었음’ 기간이 길어질수록 재취업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이런 상황이 고착화·일상화되면서 결국엔 다시 도전할 의욕마저 상실한 채 구직 체념 상태에 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  “죽어라 일해도 금수저 못 따라가” 그냥 쉬는 2030…상속계급사회 돼 간다   [연합뉴스] 이모(32)씨는 2년 전부터 바깥 외출을 일절 삼간 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고 있다. 수도권 대학을 졸업했을 때만 해도 그는 꿈 많은 청년이었다. 공기업 입사를 목표로 자격증도 따며 차근차근 취업을 준비한 그는 25세 때 지방의 조그만 회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첫 직장이었다. “연봉은 낮아도 일단 경력을 쌓자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야근은 기본에 복지 혜택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결국 2년 계약 만기 후 퇴사한 뒤 당초 목표였던 공기업에 재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관련기사 “업무량 과중, 미래 안 보여…버틸 수 없었죠” 인턴십 확대, 맞춤형 직업훈련, 실무 교육 잘 맞물려야 “금방 재취업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1년이 지나도 합격했다는 연락은 좀처럼 오질 않더라고요.” 카페 알바와 식당 서빙 등으로 당장 급한 생활비를 충당하며 입사 서류를 계속 냈지만 돌아오는 건 ‘탈락’이란 소식뿐이었다. “공백이 길어질수록 더욱 불리해지는 느낌이었어요. 막판엔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자기변명만 늘어놓는 기분이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죠.” 첫 직장을 그만둔 지 2년이 지난 29세 때 그는 깊은 좌절감에 따른 우울증 증세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되면서 끝내 구직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취직도, 구직도 단념한 그에게 남은 공간이라곤 자신의 방뿐이었다. 그는 요즘 하루의 대부분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시청하거나 온라인 게임을 하며 ‘자의 반 타의 반’ 은둔·칩거 생활 중이라고 했다. 이씨는 “쉬고 있다는 말조차 내겐 사치 같다. 그냥 ‘포기’한 상태라는 게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쉰다는 말조차 사치, 그냥 포기한 상태” 지난 26일 코엑스 취업 박람회에서 취준생들이 채용 공고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이씨와 같은 ‘쉬었음 청년’이 갈수록 늘어나는 건 일자리 부족과 기업의 경력직 선호 추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통계청 조사에서도 청년들이 쉬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게 ‘적합한 일자리 부족(38.1%)’이었다. 이어 교육 및 자기 계발(35.0%), 번아웃·탈진(27.7%), 심리·정신적 문제(25.0%) 순이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대학 교육까지 마친 청년들이 마냥 쉬고 있는 건 기본적으로 갈 만한 일자리 자체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노동시장이 이들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면서 청년 고용 미스매치와 고학력 공급 초과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실제로 제조업 청년 취업자는 3년 연속 감소했고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신규 채용도 점점 줄면서 청년들 사이에선 “아무리 좋은 스펙을 갖춰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통해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진입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명문대 졸업 후 2년 만에 ‘쉬었음 청년’이 된 최서연(25)씨는 “취업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심신이 지쳐 당분간 쉬기로 했다”며 “주변에도 나처럼 의욕 자체를 상실한 친구들이 적잖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에 더해 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러면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취업문은 더욱 좁아질 것이란 조바심도 청년들 마음을 옥죄고 있다. 퇴직한 지 1년이 지났다는 김다은(30)씨는 “처음엔 두 달 정도만 재충전하며 쉬려고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싶어 두려워지더라”며 “아무 회사에나 갈 바엔 좀 더 쉬자는 생각과 이러다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니냐는 초조감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1년 이상 ‘쉬었음’ 경험이 있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미취업 기간이 길수록, 일한 경험이 없을수록, 과거 일자리가 저임금에 불안정할수록 쉬었음 상태로 남아 있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재충전의 시간’이란 생각은 줄고 ‘힘든 시간, 구직 의욕을 잃게 만드는 시간’이란 인식이 증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쉬었음’ 상태가 불안하다는 응답도 77.2%에 달했다. 첫 직장 퇴사 후 1년째 쉬고 있다는 정규희(26)씨는 “과중한 초과근무에 무례한 상사까지 겪고 나니 다시 일할 생각을 하면 겁부터 난다”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의 장벽이 존재한다”는 인식과 그로 인한 좌절감이 최근 청년층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교육과 명문대 진학, 안정적인 직업, 주택 구입, 결혼과 출산 등 성공의 단계마다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 사회적 네트워크 등 ‘부모 찬스’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는 냉엄한 현실과 마주하다 보니 “죽어라 일해도 금수저 못 따라간다”는 허무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취준생 서재현(27)씨는 “전세도 못 구하고 재산도 마이너스 상태지만 ‘되는 사람만 되는’ 현실을 지켜보다 보면 계속 도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   일본 ‘로스제네’ 현상, 한국도 재연 우려 부동산 양극화도 이 같은 격차를 더욱 키우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보유 자산의 대부분을 부동산이 차지하는 현실 속에서 주택 마련에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느냐 여부가 청년들 삶의 질을 일찌감치 결정짓고 있다는 점에서다. 한국은행 조사에서도 2023년 청년층 상위 20%의 소득은 하위 20%의 2.5배인 데 비해 부동산 등 순자산 격차는 무려 38배에 달했다. 최근 주택 구입을 위해 대출을 받은 이성찬(34)씨는 “여기서 집값이 더 오르면 평생 살 수 없겠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영끌’을 했는데, 그 많은 이자를 내기 위해 거의 최저 수준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저 앞이 캄캄할 뿐”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상속계급사회(inheritocracy)의 고착화가 경제의 안정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주택가격 상승 등으로 축적한 자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면서 노동소득보다 상속·세습자산이 청년층 생활 수준에 훨씬 더 영향을 미치게 됐고, 이로 인해 ‘노력=계층 상승’이란 정상적인 계층 이동 방식이 붕괴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과거 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지며 최악의 취업난이 닥쳤을 때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던 ‘로스제네(잃어버린 세대)’ 현상이 한국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잇단 취업 실패 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살아가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급속히 늘어날 것이란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이미 지난해 국무조정실 조사에서도 집에만 있는 고립·은둔 청년이 5.2%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일각에선 절망에 빠진 청년들이 코인이나 주식 등으로 ‘한방’을 꿈꾸는 분위기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박모(28)씨는 대학 졸업 후 스타트업 인턴으로 근무하다 정규직 전환이 무산되자 자격증을 따며 준비한 끝에 중소 정보기술(IT) 업체 재취업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회사가 1년 반 만에 폐업하면서 졸지에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됐다. 배달 알바를 하며 계속 도전장을 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신 그는 결국 모아둔 돈으로 코인과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 그는 “지금은 ‘그냥’ 쉬는 중”이라며 “다시 일자리에 도전하느니 차라리 쉬는 게 덜 괴로운 선택”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전문가들은 ‘쉬었음 청년’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한 일자리 정책 이상의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걸린 문제인 만큼 새로 출범하는 정부도 더 늦기 전에 기업·학계·시민단체 등과 범국가적 차원에서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병훈 교수는 “기존의 청년 고용정책이 대부분 실패한 점을 반면교사 삼아 유럽연합(EU)처럼 ‘한국형 청년보장제’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정책 패러다임 전환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5.05.31 00:01

  • 미·중 협상 결과 본 주요국, 대미 저자세 버리고 버티기 나섰다

    미·중 협상 결과 본 주요국, 대미 저자세 버리고 버티기 나섰다

     ━  트럼프발 관세전쟁 넉 달   90일간 ‘휴전’을 이끌어 낸 미·중 경제무역 고위급 협상단. [사진 미국 무역대표부 X] 중국이 강경한 협상 전술로 미국을 상대로 일시적으로 유리한 합의를 끌어내자 이를 지켜본 주요국이 미국과의 협상 전략을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외신은 주요국이 미·중 제네바 협상을 계기로 자국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버티기’에 돌입했다고 분석했다.   가장 빨리 노선을 튼 건 인도다. 인도는 시종일관 미국에 저자세를 취하면서 가장 먼저 미국과의 협상에 돌입했다. 그러나 인도가 미국산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온다. 미국이 중국 제품에 대한 관세를 대폭 인하한 데다 자국 내에서 미국에 너무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는 여론이 확산 중인 것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한다.   관련기사 일괄관세→유예→일방통보 오락가락…“정점은 통과” 시각도 위안화 약세 꾀하는 중국, 약달러 노리는 미국…환율전쟁? 일본 역시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19일(이하 현지시간) 의회에서 대(對)미 협상 전략에 대해 “기한보다 국익이 우선”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당초 6월 협상 타결을 목표로 했던 일본은 7월 참의원 선거 전까지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유럽연합(EU)도 강경 모드로 돌아서는 분위기다. EU는 특히 부가가치세(VAT) 폐지나 디지털 규제 완화 등 미국 측 요구를 다 수용할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외신은 “각국이 강경한 대응이 효과적이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18일 마르코 파픽 BCA리서치의 수석 전략가의 말은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할 때는 강하게 맞서야 한다는 교훈을 각국이 얻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관세 협상에 성실히 임하라고 재차 압박했다. 미국의 무역협상을 이끄는 스콧 베센트 재무부 장관은 18일 NBC뉴스 인터뷰에서 “국가들이 선의로 협상하지 않으면 ‘이게 관세율이다’라고 적은 서한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차기 정부를 이끌 유력 대선 후보의 협상 전략도 차이를 보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서둘러 협상을 타결할 필요는 없다”는 신중론을 펼쳤지만,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한·미 정상회담을 바로 개최하겠다”며 속도전을 강조했다. 18일 열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TV 토론에서다. 이 후보는 이날 “미국도 관세 협상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보인다”며 “지금 부과한 관세를 100% 그대로 유지하긴 어려울 테고, 협상의 여지가 있을 거라 본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 측은 특히 한 언론에 “미국에 유예기간 연장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김 후보는 “미국과 신뢰를 바탕으로 정상회담을 개최해 7월 8일 관세 유예가 종료되기 전에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상 간 담판을 짓는 ‘톱 다운’ 방식의 전략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김 후보 측은 한 언론에 관세와 조선업 협력이나 액화천연가스(LNG) 등을 하나로 묶은 패키지 딜에 대해 “유리한 딜이 될 수 있게 면밀하게 채산성을 따지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25.05.24 01:27

  • 위안화 약세 꾀하는 중국, 약달러 노리는 미국…환율전쟁?

    위안화 약세 꾀하는 중국, 약달러 노리는 미국…환율전쟁?

     ━  트럼프발 관세전쟁 넉 달   지난 15일 중국의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은 금융기관 지급준비율(지준율)을 기존보다 0.5%포인트 인하, 시중에 1조 위안(약 195조원)의 유동성을 공급했다. 이로써 중국 시중은행의 가중 평균 지준율은 기존 6.6%에서 6.2% 수준으로 하락하게 됐다. 대형은행과 중소형 은행 간 격차가 반영된 수치다. 지준율은 예금으로 받은 돈의 일부를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자금 비율이다. 이에 따라 시중 유동성이 결정되기 때문에 사실상 기준금리 역할을 한다. 연내 지준율 추가 인하도 유력하다. 중국 증권가의 리차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현지 언론을 통해 “당국이 지준율을 연내 0.5%포인트 더 인하할 것”으로 예상했다.   대만 통화가치 급등…신플라자 합의 시도설 표면적으로는 유동성 공급을 통한 경기 부양이 목적이다. 하지만 전문가 사이에선 중국이 미국발(發) 관세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환율을 끌어내리려는 속내 또한 가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시중에 계속 돈을 풀어 위안화 약세를 일으키면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는 상대적 강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즉, 수출 시장에서 미국으로부터 관세 폭탄을 맞더라도 환율 조정을 통해 자국산 제품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게 중국의 계산이라는 얘기다. 특히 이 같은 환율 조정은 무역 시장에서 미국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있어 중국엔 일석이조다. 이 경우 관세전쟁에 이어 ‘환율전쟁’이 불가피해지는 셈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당초 미국이 관세전쟁에 나선 것은 자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강화하고 중국 등으로부터 고착화한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다. 이런 미국의 고민은 환율 문제와도 연결된다.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시절부터 “달러가 너무 강해 미국 기업이 고통받고 있다”고 수차례 말할 만큼 달러화 약세를 통해 무역 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오랜 생각을 갖고 있다. 다만 당시엔 그가 임명한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의 정책으로 오히려 달러화 강세가 두드러졌다. 데이비드 윌콕스 미 브루킹스연구소 박사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는 대대적 감세와 재정 지출 확대가 달러화 강세를 유도하는 구조였다”고 전했다.   관련기사 일괄관세→유예→일방통보 오락가락…“정점은 통과” 시각도 미·중 협상 결과 본 주요국, 대미 저자세 버리고 버티기 나섰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트럼프 대통령은 2기 행정부 들어 달러화 약세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에 연일 “기준금리를 낮추라”며 압력을 가하는 것,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전략적으로 비축하는 데 나선 것 등이 이와 맞닿는 행보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그가 앞으로 관세전쟁 지속과 함께, 의도적인 환율전쟁으로 중국에 맞불을 놓으려 할 수 있다는 분석 역시 제기된다. 최근 외환 시장에서 대만의 통화 가치가 급등하는 등 환율이 출렁이면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달러화 약세를 위해 관세 협의 상대인 아시아 국가에 통화 절상 압력을 넣는 이른바 ‘신(新) 플라자 합의’를 시도 중인 게 아니냐는 소문이 확산한 배경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앞서 미국은 1985년 뉴욕에서 가진 플라자 합의로 당시 무역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국이던 일본의 엔화와 서독(현재 독일)의 마르크화 가치는 높이고, 달러화 가치는 낮추는 정책을 채택한 바 있다. 이는 구체적 성과로 이어져 1년 후 엔화 대비 달러화 가치가 당초보다 절반가량 낮아졌고, 일본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수출 경쟁력을 끌어올려 다른 나라에 대한 적자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다. 일본이 ‘버블(거품) 경제’ 형성과 쇠퇴로 글로벌 패권을 미국에 완전히 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국이 과거 플라자 합의로부터 40년 지난 오늘날, 그때와 비슷한 노림수를 중국 등을 향해 갖는 게 아니냐는 얘기다.   달러화 약세, 미국 내 인플레이션 자극 그래픽=이현민 기자 한국과 미국의 외환 당국자가 최근 유럽에서 만났다는 외신 보도가 이달 초 나오면서 한국에서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1500원대를 넘보던 원·달러 환율은 이달 현재 1370원대를 기록 중이다. 그만큼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섰다. 다만 미국이 실제 환율전쟁에 나서긴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리면 미 국채의 신뢰도가 낮아질 수 있다”며 “각국 정부 간 협상에 따른 인위적인 환율 조정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국채 신뢰도가 낮아지면 발행할 때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해서 조달 비용과 이자 부담이 증가, 경제 활성화를 위한 재정 여력이 줄게 된다.   프랑스 파리경제대학의 장 피에르 라포르트 교수도 “달러화 약세는 미국 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자극과 저소득층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정치적으로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환율전쟁에 진심이 아니더라도 외환 시장에 계속해서 불확실성을 주입, 시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익명을 원한 국내 대학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전쟁에서도 수시로 말을 바꾸면서 협상에 유리한 패를 쥐려는 ‘미치광이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환율 문제를 향해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면 그의 남은 임기 내내 달러화 가치가 출렁이면서 외환 시장의 공포감이 확산할 것”으로 우려했다.     하수영 기자 ha.suyoung@joongang.co.kr

    2025.05.24 01:26

  • 일괄관세→유예→일방통보 오락가락…“정점은 통과” 시각도

    일괄관세→유예→일방통보 오락가락…“정점은 통과” 시각도

     ━  트럼프발 관세전쟁 넉 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 20일(이하 현지시간)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다. 취임 이튿날 그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전 세계를 대상으로 관세전쟁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부터 국제사회가 유지해 온 자유무역주의가 미국을 갉아먹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3월 철강·알루미늄에 25%의 ‘품목관세’를 매긴 데 이어 지난달 2일 모든 수입품을 대상으로 한 ‘보편관세’ 10%와 한국을 포함한 국가별(10~50%) ‘개별관세’까지 도입했다. 중국엔 한때 145%에 이르는 관세를 매기며 시장의 불안을 키웠다. 넉 달간의 트럼프발(發) 관세전쟁을 들여다봤다.   IMF, 올 성장률 전망 3.3%→2.8%로 내려 경기도 평택항의 한 부두에 수출길에 오를 한국산 자동차가 줄지어 서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관세 정책의 핵심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트럼프의 대통령 선거 슬로건에서 찾을 수 있다. 트럼프는 선거 기간 내내 “미국은 지속적인 무역적자와 불공정한 무역 관행으로 인해 경제 주권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환율 조작과 같은 불공정 관행이 미국의 산업 기반을 약화했고, 이게 중산층 붕괴와 제조업 쇠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실제 2001년 28.4%였던 미국의 글로벌 제조업 비중은 2023년 17.4%로 감소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1950년대 미국 민간부문 일자리 중 제조업 비중은 약 35%였으나, 현재는 9.4%에 그친다.   트럼프는 이를 국가 경쟁력의 위기로 간주하고 ‘미국 제조업 부흥’(made in America)에 나선 것이다. 김지원 KB증권 연구원은 “관세 폭탄은 미국의 ‘제조업 리쇼어링(해외로 이전한 기업의 자국 복귀)’과 경제 주권 회복을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13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보편관세를 통해 무역적자를 줄이고 제조업을 다시 미국으로 돌려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미·중 협상 결과 본 주요국, 대미 저자세 버리고 버티기 나섰다 위안화 약세 꾀하는 중국, 약달러 노리는 미국…환율전쟁? 관세를 피하고자 기업이 해외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면 제조업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부수적으로는 당장 무역수지를 개선할 수 있다. 미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전년 대비 1335억 달러 증가(17%)한 9184억 달러로, 역대 두 번째로 많았다. 중국(-2954억 달러)과의 무역에서 적자 규모가 가장 컸고, 그 뒤를 유럽연합(-2356억 달러)·멕시코(-1718억 달러)가 이었다. 지난달 2일 발표한 개별관세는 국가별 무역수지 규모에 따라 산정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자국의 산업 경쟁력 확대를 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국에서조차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 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WSJ은 “일부 제조업체는 (관세) 혜택을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은 (물가 상승으로) 형편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관세전쟁을 시작한 이후 글로벌 금융시장이 출렁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호관세 발표 다음 날인 3일 뉴욕 증시에서는 시가총액 3조1000억 달러(약 4500조원)가 사라졌다. 글로벌 안전자산인 미국의 달러·국채 등 미국의 자산가치도 폭락하는 등 금융시장은 공포에 휩싸였다.   미국의 상호관세(보편관세+개별관세)와 이에 따른 중국 등 주요국의 보복관세가 글로벌 경제성장 둔화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시장이 출렁이자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관세율 인하 ▶관세 유예 등으로 오락가락했고,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주식·국채 가치가 더 하락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을 비롯해 한국·일본 등 주요국의 1분기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글로벌 경기 침체가 현실화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3.3%에서 2.8%로 0.5%포인트 내렸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17일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Aaa에서 Aa1로 한 단계 하향 조정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한국은 지난달 3일 품목관세 25%가 시행된 자동차 수출이 감소하는 등 직접적인 관세 충격을 받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달 대(對)미 자동차 수출액은 28억9000만 달러로, 지난해 4월보다 19.6% 급감했다. 산업부는 “관세 부과 영향과 함께 현대차그룹의 조지아 신공장 가동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5월 1~20일 대미 총수출도 14.6%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관세청). 국내·외 주요 기관은 관세로 인한 한국의 수출 감소를 예상하며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잇달아 하향 조정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0.7%), 캐피탈 이코노믹스(0.9%) 등 0%대 전망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이 개별관세 부과를 90일간 유예했다는 점이다. 잠시나마 협상 준비 시간을 번 것이다. 동시에 서로에 100%가 넘는 보복관세를 매기며 대립하던 미국과 중국이 12일 화해 모드에 들어가면서 트럼프발 관세전쟁이 정점은 지났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중은 최고 145%까지 매긴 관세를 10~30%로 낮춘 뒤 90일간 협상을 진행키로 했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내년 중간선거를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공약 조기 실현 모습을 보여야 했을 것”이라며 “이미 국가별 최고세율을 제시한 나온 만큼 관세 관련 조치는 다 나왔다고 본다”고 말했다.   5월 1~20일 대미 총수출 14.6% 감소 남은 건 개별 정부와의 협상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으로선 관세율을 최대한 끌어내려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을 지켜야 한다. 한국은 실질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36.3%에 이른다(2024년 기준).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총수출액 중 대미 비중은 18.7%로 중국(19.5%) 다음으로 높다. 협상 데드라인은 7월 8일이다. 미국은 유예 기간을 넘기면 개별관세(한국은 15%)를 그대로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대통령 선거 다음 날인 6월 4일 출범하는 새 정부에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남짓인 셈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국회, 민간 등 다양한 채널로 미국과 논의 무대를 넓히고 동시에 수출시장 다변화 등 대안적 대책 마련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을 1, 2위 수출 시장으로 두고 있는 한국은 미·중 간 관세율도 관심이다. 박승찬 용인대 중국학과 교수는 “미·중 간 관세율이 높아지면 중국의 수출 상품 재고율이 급등해 국내 기업의 대중 수출도 줄어들 것”이라며 “관세 외에 미국의 대중 제재 등을 고려하면 미·중 간 관세전쟁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한국에도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의 대중 관세율을 30%로 전망했는데, 이는 중단기적으로 중국의 대미 수출 70%가 사라질 수 있는 수준이라는 분석이다. 박 교수도 “한·미 협상 결과보다 (미·중 간 관세율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클 수 있다”고 내다봤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25.05.24 00:01

  • 미술품 상속세만 물납제…전문가 “적용대상 확대를”

    미술품 상속세만 물납제…전문가 “적용대상 확대를”

    이달 초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의 제4대 남작 제이콥 로스차일드(지난해 타계)가 소장했던 미술작품 두 점이 영국 뮤지엄 두 곳에 각각 기증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크 명화 ‘다윗 왕’의 경우,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소장된다.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페이퍼에 따르면 이로써 로스차일드의 후손은 상속세 중 560만 파운드(104억원)를 감면 받게 되었다. 영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물납제(acceptance in lieu)의 단적인 예다.   최근 영국 내셔널갤러리에 기증된 ‘다윗 왕’. [사진 내셔널갤러리]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공립 박물관·미술관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기에 기증이 소장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때 상속세를 문화재나 미술작품으로 대납하는 물납제는 기증에 좋은 유인이 된다. 1896년 세계 최초로 미술품 물납제를 도입한 영국은 (1910년에 법제도 완비) 이 제도를 통해 많은 명작들을 납부 받아 국공립 뮤지엄에 소장·전시해왔다. 컬렉터의 후손은 상속세 납부를 위해 작품을 급매하지 않아도 되고, 박물관·미술관은 예산으로 감당 못할 희귀한 미술작품·유물을 얻을 수 있으며, 대중은 개인 컬렉터의 수장고에 있어 보지 못했던 작품을 보게 되니 윈윈인 제도다.   한국은 최근에야 물납제가 도입되었다. 문화재·미술작품 등에 대한 납부세액에 한정해 상속세 납부세액이 2000만원이 넘는 경우 문화재·미술작품으로 물납이 가능하다는 조건이다. 2021년 말 세법이 개정되고 2023년 발효되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지난해 10월에야 첫 물납 사례가 발생했다. 물납된 작품은 이만익의 회화 ‘일출도’(1991), 전광영의 한지 조형 작품 ‘집합08’(2008), 중국 화가 쩡판즈의  ‘초상화’(2007) 두 점 등 총 4점으로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등록되었다.   지난해 10월 한국 첫 물납 사례인 쩡판즈의 ‘초상화’. [사진 문체부] “한국에서는 여전히 미술 컬렉팅이나 물납제가 ‘부유층의 합법적 세금 회피 수단’이라는 대중의 색안경이 강하다. 그나마 2021년 이건희 컬렉션 (무상) 기증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그런 시각이 많이 누그러지고 기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것”이라고 익명을 요구한 미술평론가는 말했다. 그는 또 “물납제를 위해서는 미술품의 정확한 시가 감정이 필수인데 한국의 시장이 크지 않고 감정가에 대한 시비도 많아 물납제 도입이 늦어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송현동에 새로 짓는 국립문화시설, 근대미술관? 이건희 기증관?…여전히 논란 중 기증의 중요성은 지난 1일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소장품 상설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김성희 관장은 이번 상설전은 “작품을 기증해주신 분들의 노력이 더해져 이루어진 전시”라고 했다. 그러나 기증을 활성화할 물납제는 도입된 이후에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지난해 10월 첫 물납 미술품 반입 이후 아직 후속 사례가 없다”고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지난 15일 확인했다.   “아무래도 한국의 물납제가 제한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미술시장 전문가 서진수 전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말했다. 부동산·금융자산 등 모든 상속 재산에 대한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물납할 수 있는 영국과 달리 한국은 미술품에 대한 상속세만 미술품으로 물납할 수 있다. 중요한 미술작품·유물 컬렉션 전체를 기증해도 거기에 붙을 세금을 안 내는 것일 뿐 아무런 다른 혜택이 없는 것이다.   서 교수는 “사례가 많아져야 홍보도 되고 더 많은 물납 신청이 이루어질텐데 제도가 제한적이라 사례가 너무 없으니 추가 물납 신청도 없다”며 물납제 적용의 추가 확대를 촉구했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2025.05.17 02:01

  • 송현동에 새로 짓는 국립문화시설, 근대미술관? 이건희 기증관?…여전히 논란 중

    송현동에 새로 짓는 국립문화시설, 근대미술관? 이건희 기증관?…여전히 논란 중

     ━  국립현대미술관  상설전 계기로 본 ‘이건희 기증관’ 향방   김환기·박수근·이중섭 등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돌아보는 대규모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의 서울관과 과천관에서 지난 1일 개막했다. 폐막 날짜가 없는 소장품 상설전시다. 미술관 자체 소장품으로 한국 미술을 통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설전은 1969년 설립된 국현의 반세기 역사에서 처음이며, 미술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여기에는 2021년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힘이 컸다”고 미술관은 밝혔다. 그런데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의 계획대로라면 국현 소장품에서 이건희 컬렉션을 다시 빼서 서울관 근처 송현동 부지에 들어설 가칭 ‘이건희 기증관’에 넣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미술계에서 찬반 의견과 여러 대안이 엇갈리고 있다. 그 의견들과 송현동 기증관의 현재 진행 상황을 국현 상설전시 개막을 계기로 살펴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소장품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전경. 기증 이건희 컬렉션인 추상미술 거장 김환기의 푸른 전면점화 ‘산울림 19-II-73 #307’(1973)이 보인다. [연합뉴스] 만약 당일치기로 한국 대표 현대미술가가 누구인지 공부하고 싶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난 1일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서울관 상설전 ‘한국 현대미술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배명지 학예연구사는 “1960년대에서 2010년대에 이르는 대표작 86점을 엄선하여 소개한다”면서 “특히 서울관에 많은 외국인과 국내 청년층 관람객을 염두에 두었다”고 밝혔다.   전시는 추상미술 거장 김환기의 거대한 푸른 전면점화 ‘산울림 19-II-73 #307’(1973)으로 시작한다. 기증 이건희 컬렉션이다. 그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은 김환기 예술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1970년대 뉴욕시대 전면점화를 확보하지 못했었다. 연간 작품 구입 예산이 지난해 기준 47억원인데,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의 전면점화는 시장에서 지난 10여 년간 50억~130억원에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박생광의 ‘무속 3’(1980), 남관의 ‘가을축제’(1984) 등 9점이 이건희 컬렉션이다.   국현 “상설전, 이건희 컬렉션 힘 컸다” 가칭 ‘이건희 기증관’ 혹은 ‘송현동 국립문화시설’이 들어설 부지. [연합뉴스] 또한 국현 과천관의 상설전 ‘한국 근현대미술’ 제1부 전시에는 나혜석·이중섭·박래현의 회화 등 이건희 컬렉션 42점이 나온다. 김성희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에 소장품 없는 미술관으로 역사가 시작됐다. 지속적인 소장품 확보 노력과 이건희 컬렉션 기증에 힘입어 이제 1만1800여 점을 소장하게 되었고 덕분에 소장품만으로 미술사를 설명하는 상설전을 열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미술품 상속세만 물납제…전문가 “적용대상 확대를” “소장품 0점으로 출발했다”는 관계자들의 말에서 왜 여태까지 소장품 상설전이 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06년까지 10년 간 학예연구실장과 덕수궁 분관장으로 일한 정준모 큐레이터는 “소장품과 상설전이 없는 미술관은 사실 미술관이 아니라 그냥 전시관에 불과하지만 한국은 그런 개념을 모른 채 소장품 없이 국현을 출범시켰다. 게다가 아직도 문화체육관광부는 박물관을 총괄하는 문화기반과가 아닌 시각예술디자인과에서 국현을 관리한다”고 지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상설전에 나온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황소’(1950년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구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구분하지 않고 ‘뮤지엄’으로 칭하며, 뮤지엄의 조건은 반드시 소장품을 갖추고 소장품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전시를 선보이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연구실장이 지난달 30일 소장품 상설전 기자간담회에서 “비로소 명실상부한 미술관으로 전환했다”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여기에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이 큰 힘이 되었다”고 김 실장도 덧붙였다.   그런데 2021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문화유산 및 미술 컬렉션 2만3000여 점을 유족이 각각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나누어 기증했을 때, 당시 문재인 정부는 “기증자를 예우하기 위해” 이것을 다시 한데 모아 송현동 부지에 가칭 ‘이건희 기증관’을 세우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경우 국현의 상설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해서 국현은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 중에 처음으로 공식 입장을 밝혔다. 김성희 관장과 김인혜 실장의 발언을 종합하면 “송현동에 새로 생기는 미술관을 우리가 운영하면서 근대 중심의 미술관으로 발전시키겠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결정권자는 아니니 그렇게 바랄 뿐이다”라는 입장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상설전에 나온 이건희 컬렉션. 박래현 ‘여인’ (1942) .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상설전에 나온 이건희 컬렉션.이준 ‘점두’(1957).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근대 중심의 미술관”을 언급한 이유는 기증 이건희 컬렉션 중 국현에 기증된 1488점 중에서 20세기 전반기의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물과 근현대미술이 섞여 있는 이건희 컬렉션을 몽땅 가져와 ‘이건희 기증관’을 세우는 대신, 근대미술 작품만 가져오고 또 중앙박물관과 국현에 원래 있던 근대미술 작품을 더해 ‘국립근대미술관’을 세우자는 주장이 미술계 일각에서 2021년부터 있어왔기 때문이다. 곧 ‘국립 20C(근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모임’이 결성됐는데, 최열·김복기·최태만 등의 유명 미술사학자들이 참가했다. 다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국현 산하의 근대미술관이 아니라 독립적인 국립근대미술관이다.   심지어 유족이 ‘이건희 기증관’을 원치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정부 때인 지난해 10월 문체부는 보도자료를 내고 “‘(가칭) 송현동 국립문화시설’ 건립사업 국제설계공모 당선작으로 ㈜제제합건축사사무소의 ‘시간의 회복’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는데, 여기서 ‘이건희 기증관’ 대신 ‘송현동 국립문화시설’이라는 임시 명칭을 사용했다. 문체부에서 유족의 의견을 타진한 결과 유족이 새 미술관에 ‘이건희 기증관’ 이름을 붙이는 것에 부정적이라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상설전에 나온 이건희 컬렉션. 남관 ‘가을축제’(1984).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기증관은 유족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부 정치인이 졸속으로 밀어붙인 것”이라고 정준모 큐레이터는 주장했다. 그는 ‘국립 20C(근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모임’에서 상임간사로 일하고 있다. “이 회장 유족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현의 기존 소장품을 검토하고 빠진 것들 중심으로 각 기관에 나누어 기증한 것인데, 그것을 도로 가져와 합치는 것은 기증자 예우는커녕 의도 훼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송현동 미술관을 국립현대미술관이 산하에 두고 싶다는 입장에도 반대했다. 그는 “조직이 그렇게 방대해지려면 그에 맞게 규정과 시스템을 개편돼야 하는데 국현은 그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며 “이제야 소장품 상설전을 만드는 처지에 지금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꼬집었다. 또 “미술기관들끼리 상호보완하고 협업도 하고 경쟁도 해야 미술계가 성장한다”고 덧붙였다.   반면에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미술사에서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시점이 모호하기 때문에 별도로 분리된 근대미술관이 생기면 어느 시대까지의 작품을 소장품에 포함시킬지를 두고 거센 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국현에서 “근대 중심의 미술관”이라는 유연한 개념으로 현대미술관과 함께 운영하는 것이 문제가 적다는 것이다. 김인혜 실장은 간담회에서 “예컨대 김환기는 뉴욕시대 이전의 그림은 근대, 뉴욕시대의 그림은 현대 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며 이 경우 국립근대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별도로 있고 운영 주체가 다르면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상설전에 나온 이건희 컬렉션. 박생광 ‘무속 3’(198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양미술사의 경우는 19세기 인상주의나 후기인상주의 미술부터 20세기 중반 추상표현주의 미술까지를 모던아트(근대미술)로 분류하고 그 이후부터를 컨템포러리 아트(동시대미술 혹은 현대미술)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많다. 한국은 현대미술을 1960~70년대부터로 보는 학자부터 (국현의 새 소장품 상설전 구성은 이 견해에 가깝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기로 한 90년대부터로 보는 학자까지 다양하다.   이에 대해 정준모 큐레이터는 “예를 들어 김환기 50년대 달항아리 그림은 국립근대미술관이 소장하고 70년대 전면점화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필요할 때 서로 빌려주면 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한 “근대와 현대가 갈리는 시기가 서구에서조차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요즘은 20세기 미술관, 21세기 미술관, 이런 식으로 나누는 추세다. 우리도 그렇게 해도 된다”고 덧붙였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 이후 사건 연표 한편 송현동의 새 미술관이 독립된 국립근대미술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 산하의 근대 위주 미술관이 되는 것보다 애초의 계획대로 ‘이건희 기증관’의 이름은 붙이지 않아도 기증관으로서의 성격을 살리면서 유연한 전시를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있다. 미술사학자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는 “한국에서 근대미술 부분이 상대적으로 덜 다뤄졌고 시장에서도 소외되어 왔기 때문에 근대 중심의 새 미술관을 바라는 마음에는 공감한다”며 “하지만 근대의 시간폭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하기 때문에 근대미술관을 못박아 만드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전문가보다 정치 논리 우선 위험성 커” 이건희 컬렉션 기증 직후에 조직된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는 정 교수는 “송현동 미술관은 애초에 독립된 기증관으로서 정체성이 만들어졌고, 지금 건축 설계를 보아도 수장고와 전시실 등 독립된 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며 “이건희 컬렉션이 이곳에 모이면 여러 시대의 문화유산과 미술이 공존하게 될텐데 이를 바탕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서 관통하는 주제로 새롭고 실험적인 전시를 하는 미술관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희 컬렉션을 도로 내준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설전은 어떻게 될까. 정 교수는 “미술관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해서 서로서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어차피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도 보듯이 소장품 상설전이라고 해서 계속 같은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며 주기적으로 교체한다”고 제언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소장품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에서 근대미술가들의 초상화 섹션. 이건희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다. [연합뉴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그간 정치적인 불확실성으로 송현동 미술관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 것도 진전되지 않았고, 결국 대선 이후 차기 정부가 들어서야 진전이 있을 것이며 그때도 전문가들의 목소리보다는 정치 논리가 우선할 위험이 크다”는 것.   지난해 7월 ‘국립 20C(근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모임’이 개최한 세미나에는 유인촌 문체부 장관도 축사에 참여하여 근대미술관의 필요성을 공감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정부는 ‘이건희 기증관’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어떤 공식적인 토론장도 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이건희 기증관’의 가칭을 어느새 ‘송현동 국립문화시설’로 바뀌었다. 또한  설계 공모 최종 심사를 하면서 심사위원 8명 전원을 박물관·미술관 관련 인력이 아닌 건축가들로 구성했는데, 이준 전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이것이 “미술계로선 충격”이라고 평했다. 미술관 설계에는 향후 작품 설치와 관람자 동선을 위해 미술관 전문 인력이 관여하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시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질지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채 올해 12월에 착공, 2028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2025.05.17 00:01

  • 밀레이 ‘전기톱 개혁’ 아르헨 살렸다

    밀레이 ‘전기톱 개혁’ 아르헨 살렸다

    지도자를 새로 뽑아야 하는 나라에게 아르헨티나는 좋은 거울이다. 지도자에 따라 국민이 온통 깡통을 찰 수도, 그러다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포퓰리즘으로 거덜 나, 툭 하면 부도를 내고, 국제통화기금(IMF)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골칫덩이… 우리가 알던 아르헨티나는 더 이상 없다. 2023년 12월 취임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개혁 이후로 말이다.   핵심은 대대적인 긴축과 광범위한 규제 철폐다. 포퓰리즘 시절 뭉텅뭉텅 나눠주던 보조금과 복지성 지출을 틀어막았다. 18개였던 정부 부처를 8개로 줄이고, 공무원 4만2000여명을 내보냈다. 취임 후 하루 2개꼴로 규제를 없앴다. 무정부에 가까운 최소 정부를 추구하는 자유지상주의 철학에 충실했다.   관련기사 밀레이 ‘포퓰리즘’ 대수술…물가 잡고 성장률 올렸다 하원 입성 2년 뒤 대권 쟁취…자유무역 신봉, 극우와 거리 그 결과 수십 년간 앓던 고질병들이 빠른 속도로 치유되고 있다. 2023년 월 25%였던 인플레는 최근 3%대로 떨어졌다. 재정은 14년 만에 첫 흑자를 냈다. 성장률은 올해 5.7%를 무난히 달성할 전망이다. 또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신세였던 페소는 유례없는 강세다. 해외 투자자들의 시각이 달라지면서 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의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지금은 달러를 팔고 페소를 살 때’라고 했다.   밀레이는 포퓰리즘을 때려잡고 아르헨티나를 완전히 다른 나라로 만들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미주중앙일보 남윤호·김상진·장열 기자 yhnam@koreadaily.com

    2025.05.10 01:48

  • 하원 입성 2년 뒤 대권 쟁취…자유무역 신봉, 극우와 거리

    하원 입성 2년 뒤 대권 쟁취…자유무역 신봉, 극우와 거리

     ━  아르헨 살린 밀레이 ‘전기톱 개혁’     3월 의회 인근에서 열린 1000번째 수요 시위 장면. 김상진 기자 미친놈(Le Loco).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별명이다.   이글거리는 눈, 마구 헝클어진 머리, 불규칙 바운드로 튀는 언행… 이런 겉모습만으로 밀레이의 별명이 만들어진 건 아니다. 그를 겪어본 사람들은 딱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한다.   “여러 번 만나 보니 제정신이 아니더라. 그는 무정부주의자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더라. 또 작은(50㎡)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큰 개를 네댓 마리나 길렀다. 월급을 개에게 다 쓴 탓에 제대로 못 먹어 그런지, 내 사무실에 오면 테이블 위의 과자를 깡그리 먹어치우곤 했다. 원래 제정신 아닌 사람들이 재미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는 건 심각한 일이다.”   관련기사 밀레이 ‘전기톱 개혁’ 아르헨 살렸다 밀레이 ‘포퓰리즘’ 대수술…물가 잡고 성장률 올렸다 내무무역부 장관(2006~2013)을 지낸 골수 페론주의자로 ‘원칙과 가치’라는 정당의 당수인 기예르모 모레노(70)가 들려준 말이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논쟁적 정치인이자 기인인 모레노의 눈에도 밀레이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쳤던 모양이다.   그 밀레이가 네오리버럴리즘의 원조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아르헨티나를 시장경제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각종 인터뷰와 자료 등을 토대로 Q&A 형식으로 접근해보자.   부에노스아이레스 기차역 레티로에서의 출근길. 김상진 기자 Q 밀레이는 뭐하던 사람이었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부친에게 자주 얻어맞으며 컸다. 음악에 재능을 보여 록밴드의 리드 보컬을 했고, 주니어 축구클럽에선 골키퍼로 꽤 활약했다. 1980년대 후반 하이퍼 인플레를 겪으며 경제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명문 벨그라노 대학(UCEMA)에서 경제학 학사를, 이어 경제사회개발연구소(IDES)와 토르콰토디텔라 대학(UTDT)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두 개 취득했다. HSBC은행과 맥시마 AGJP 자산운용에서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일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2010년대 중반 TV에 출연해 신랄한 어조, 괴짜 이미지, 록스타풍 외모로 주목을 받았다. 수퍼히어로 복장으로 등장하거나 전기톱 퍼포먼스를 하는 등 강한 시각적 메시지로 화제를 모았다. 2021년 11월 신생 자유전진당(LLA) 후보로 하원에 입성했고, 2년 뒤 대선에서 승리하며 초고속으로 대통령이 됐다.   미국의 일론 머스크와도 가까운 사이다. 올해 초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전기톱을 선물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Q 어떻게 자유지상주의를 신봉하게 됐나. 머레이 로스바드의 『인간 경제 국가』(1962)를 읽고 오스트리아 학파의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로스바드는 오스트리아 학파 내에서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루트비히 폰 미제스에 비해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국가를 없애야 한다는 식의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다. 밀레이가 아나코-캐피탈리스트를 자임하는 데엔 로스바드의 영향이 크다.   Q 오스트리아 학파란 무엇인가.   1871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카를 멩거가 『경제학 원리』를 통해 자유시장주의를 주장했고, 이에 동조한 제자와 동료들이 합류해 학파를 이뤘다. 시장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작동하므로 국가가 끼어들면 되레 망가진다는 게 핵심 철학이다. 오스트리아 학파라는 이름은 멩거를 비판하던 독일 학자들이 붙였다. 제대로 된 이론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쑥덕공론이라는 비아냥이었다. 이게 폰 미제스, 하이에크, 로스바드 등을 거쳐 자유지상주의 경제철학으로 발전했다.   Q 책 한 권으로 세상 보는 눈이 정해지나.   증명할 수는 없으나, 아르헨티나의 전기작가 후안 루이스 곤잘레스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밀레이의 사상적 배경을 설명한다. 어릴 때 부친의 폭력에 대한 반발심리로 극단적인 반권위주의, 반국가주의로 흘렀다는 것이다.   시위 취재 중 경찰의 고무탄 세 발을 맞은 장열 기자의 종아리 부위. 김상진 기자 Q 무정부주의자가 어떻게 국가를 통치하나.   그게 바로 밀레이 정부의 역설이다. 비대해진 국가가 무능과 비효율에 빠져 경제를 망쳤으니, 국가를 최소화시켜 많은 걸 시장에 맡기자는 게 밀레이의 철학이다. 그는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겠다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루디 두치케가 국가기구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하겠다며 ‘제도권으로의 대장정’을 좌파의 전략으로 제시했던 것과 비슷하다. 방향만 반대일 뿐, 체제를 내부에서 뒤집어엎자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Q 그는 포퓰리스트인가.   대중에 직접 호소한다는 면에선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정작 그의 정책은 포퓰리즘과 정반대다. 과거의 인기영합적 정책을 다 폐지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국민에게 고통 감내를 요구하고 있다. 세상에 포퓰리즘 때려잡는 포퓰리스트도 있나. 국민 뜻이 제일 중요하다, 기본 복지로 국민을 섬기겠다, 재정을 곳간에 쌓아두면 썩는다, 정도는 해야 포퓰리스트다.   Q 그는 파쇼인가.   아니다. 그는 독재 권력을 추구하기는커녕 의도적으로 정부 권한을 줄이고 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행정명령에 의존해 개혁을 추진하다 보니, 야당이 파쇼라고 비난하는 것뿐이다.   Q 그는 극우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지도자로 알려지면서 극우 딱지가 붙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워크(Woke) 등 좌파 이념을 혐오한다는 점에서 우파인 건 확실하다. 그러나 이민 규제에 관심이 없고,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점에서 극우와 거리가 멀다.   Q 그는 교조주의자인가.   그렇게 보일 소지가 있다. 자유지상주의를 신봉한 나머지 반려견 이름도 ‘밀튼 프리드먼’으로 지었다. 연설할 땐 그냥 “자유 만세”라고 외치지 않는다. 꼭 “자유 만세, 빌어먹을(¡Viva la libertad, carajo!)”이라고 내지른다. 마치 앙시앙 레짐을 향해 돌격하는 혁명군의 결의를 연상시키듯 말이다.   하지만 의외로 실용적인 면이 있다. 후보 시절 중국 공산당을 비난했지만, 취임 후 대중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과 회담도 추진 중이다. 지난 3월 남부 지역에 홍수가 났을 땐 긴축에서 벗어나 긴급 재난지원 예산을 편성했다. 또 마약 단속을 강화하는 등 교조적 자유지상주의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Q 여동생 카리나(52)가 실세인가.   어릴 적 밀레이가 부친에게 두들겨 맞은 뒤엔 꼭 카리나가 다독여 줬다고 한다. 소싯적부터 밀레이의 카리나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다. 생활비 관리에서 개 먹이 주기에 이르기까지 카리나가 도맡아 해줬다. 밀레이가 카리나를 ‘보스’로 부를 정도다. 지금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밀레이를 밀착 수행한다. 밀레이 남매와 산티아고 카푸토 자문역이 모든 실권을 쥔 ‘철의 삼각형’으로 불린다.     ■ 놀며 보조금 못 받자 시위대 “또라이” 목청…아직 ‘페로니즘’ 잔향 「 “이대로 그냥 죽으라는 거냐.”   시위대 맨 앞에서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나온다. 지난 3월 12일 오후 아르헨티나 국회의사당 앞. 연금개혁 반대 시위대의 밀라그레스 에레라(41)는 “어머니가 무료로 약을 받았는데 정부가 빼앗아갔다”고 목청을 높였다. 시위대는 ‘또라이 자유주의자’라는 “리베르톤토(Libertonto)”를 연신 외쳐댔다.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향한 욕이다.   훌리건이 가세해 폭력 시위로 번지자 경찰은 물대포·최루탄·고무탄으로 진압했다. ‘맑은 공기’라는 뜻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은 매캐한 최루가스와 펑펑 터지는 고무탄 발사음으로 뒤덮였다. 현지 사진기자 파블로 그리요는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중태에 빠졌다. 본지 취재팀 한 명도 다리 등에 고무탄 세 발을 맞았다.   30년간 미래로여행사를 운영 중인 정유석 대표는 “페론당의 퍼주기 정책에 길들여졌는데, 밀레이가 바꾸려다 보니 반발이 심하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일부에선 페로니즘의 향수가 아직 끈끈하다. 놀면서 쉽게 보조금 받았는데, 갑자기 끊으니 반발할 수밖에. 우버 기사 메히야 헤리베르토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밀레이를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욕한다”고 했다.   심한 경우 부지런히 일하는 걸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민 40년 차인 강남익스프레스 양수민 사장은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못 보고 자란 이들이 많다. 한 세대가 그냥 무능해졌다”고 말했다.   인식을 바꾸긴 쉽지 않다. 반발과 저항은 거쳐야 할 과정일 수 있다. 킨토 투자자문의 애널리스트 바우티스타 부르디외는 “개혁의 필요성과 저항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페로니즘이라 하면, 후안 페론 전 대통령보다 두 번째 부인 에바 페론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뭐든 다 해주겠다는 국모로서의 자선이 국가적 복지정책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포퓰리즘으로 번졌다.   중심가 보건부 청사는 페로니즘의 상징이다. 높이 31m짜리 에바 페론의 금속 초상이 한쪽 벽면을 덮고 있다(사진). 택시 기사 다니엘  에두아르도(61)가 “밀레이가 곧 허물지 모르니 기념사진을 찍어두라”고 했다. 페로니즘의 색채를 빼려는 노력은 건물 철거로 이어질 판이다. 」    ◆특별취재팀 : 부에노스아이레스=미주중앙일보 남윤호·김상진·장열 기자

    2025.05.10 01:22

  • 밀레이 '포퓰리즘' 대수술…물가 잡고 성장률 올렸다

    밀레이 '포퓰리즘' 대수술…물가 잡고 성장률 올렸다

     ━  아르헨 살린 밀레이 ‘전기톱 개혁’     2023년 가을 아르헨티나 기업인들이 대선 후보 하비에르 밀레이와 간담회를 했다. 대화 도중 밀레이가 옆의 대기업 오너에게 불쑥 물었다. “탈세하고 있죠?” 당황한 기업인은 아니라고 답했다. 밀레이는 정말이냐고 재차 묻다 이렇게 말했다. “탈세하는 사람이 영웅입니다.”   동석했던 가전업체 피바디의 오너최도선 회장의 목격담은 밀레이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의 오른쪽 끄트머리에 선 그는 정부를 악으로, 세금을 정부의 도둑질쯤으로 본다. 스스로 무정부를 지향하는 아나코-캐피탈리스트라고 한다.   무정부 성향을 지닌 국가원수. 이 역설이야말로 아르헨티나가 좌파 포퓰리즘과 결별하게 된 출발점이다.   관련기사 밀레이 ‘전기톱 개혁’ 아르헨 살렸다 하원 입성 2년 뒤 대권 쟁취…자유무역 신봉, 극우와 거리 그의 논리는 명확하다. 선심 정책 탓에 재정이 거덜나고, 하이퍼 인플레가 일어났다, 따라서 이를 잡으려면 긴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퍼주기 복지, 방만 재정, 철밥통 공무원, 밑도 끝도 없는 보조금… 뭐든지 전기톱으로 썰어내겠다고 공약했다. 과거 정부가 개혁 시늉을 낼 때 쓰던 소품이 가위였던 데 비해 굉음을 내는 전기톱은 대중에게 그의 개혁 의지를 각인시켰다.   암달러 가격, 공식환율보다 되레 낮아져 밀레이 대통령과 그의 여동생이자 비서실장 카리나. [REUTERS=연합뉴스] 약속대로 그는 보조금과 연금 등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정부조직도 확 줄였다. 18개 부처 이름을 적은 테이프를 보드에 붙여놓고 “꺼져(¡Afuera!)”라고 소리치며 하나하나 잡아떼는 퍼포먼스는 유명하다. 취임 후 15개월 간 전체 공무원의 8.4%인 4만2000여 명을 내보냈다. 이래저래 재정지출을 단번에 30% 줄였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국채를 인수하던 것도 끊었다.   1년여 만에 거시지표들이 모두 좋아지기 시작했다. 인플레는 잡히고, 성장률은 오르고, 통화가치는 높아지고, 빈곤율은 떨어지고,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다. 사람으로 치면 독한 몸만들기로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이 두루 개선된 셈이다.   최대 성과는 역시 물가 안정이다. 보통 물가가 1년에 두 자리 수로 뛰면 나라가 흔들리지만, 아르헨티나에선 한 달에 두 자리 수도 예사였다. 그러던 게 이젠 월 1%대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1976년 이민 와 물류사업을 하며 역대 정권을 겪어본 LK글로벌 강태민 대표는 “인플레를 잡은 건 과거 아르헨티나를 되돌아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수퍼마켓. 하이퍼 인플레 시절과 달리 가격표를 주 1회 조정한다. 김상진 기자 성장률은 지난해 하반기 플러스로 돌아섰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4년 성장률을 -2.8%로 예상했으나 가속이 붙어 -1.7%로 높아졌다. 올해 전망치는 5.5%로 급반등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의 칼럼니스트 릴리아나 프랑코는 “IMF 전망에 대해 경제학자들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며 “예상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이던 아르헨티나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한다는 건 큰 변화다. 정부통계국(INDEC)에 따르면 2024년 민간부문 정규 근로자는 660만 명이다. 2013년에 비해 불과 20만 명 증가한 데 그쳤다. 아르헨티나의 고용탄성치가 0.6이므로 밀레이의 남은 임기 3년간 같은 수준으로 죽 성장한다면 고용은 매년 3.3%씩 모두 10%쯤, 약 67만 명 증가하게 된다.   잠시 높아졌던 빈곤율은 뚝 떨어졌다. 초기 공공부문 실업자들이 쏟아지자 야당은 나라가 더 가난해졌다고 거품을 물었다. 소득이 기본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가구의 비중으로 측정하는 빈곤율은 지난해 중반 52.9%로 치솟았다. 그 뒤 물가 안정과 고용 회복으로 최근 38.1%로 낮아졌다. 자유지상주의 개혁이 빈곤층을 양산한다는 비난은 힘을 잃었다.   3월 중순 플로리다 거리의 공식환전소에서 100달러를 내니 약 11만 페소를 건넸다. 김상진 기자 외환시장의 안정은 길거리에서 실감할 수 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리다 거리엔 암달러상들이 “캄비오(환전)”를 외치며 늘어서 있지만, 이들과 흥정하는 이는 보기 어렵다. ‘블루 달러’라 불리는 암달러 환율과 공식 환율의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4월 30일 이후엔 암달러 가격이 공식환율보다 되레 낮아졌다. 밀레이 취임 당시 25% 정도, 그 전엔 배에 달했던 게 말이다. 지난 6일 공식 환율은 달러당 1215페소, 암달러 환율은 1190페소다. 암달러상은 이제 사양업종이 됐다.   본격적인 규제철폐로 일상생활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주거환경이다. 월세 눌러놓고, 세입자 못 내보내게 하던 임대규제를 밀레이 정부가 싹 없앴다. 세입자 보호는커녕, 임대물건을 줄이고 임대료를 폭등시켜 원성이 자자한 규제였다. 1년도 채 안 돼 임대물건은 170% 늘고, 임대료는 40% 떨어졌다. 지난해 미국 대선 때 카말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가 비슷한 임대 규제를 공약하자, 월스트리트저널이 이를 비판하며 모범사례로 든 게 밀레이의 정책이었다.   시장이 살아나자 기업들은 움직이기 편해졌다. 엘리오 델레 금속산업협회 회장은 “거시경제가 정돈되면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졌고, 개방에 속도가 붙었다”고 말했다. 통관, 인증, 대금 지급 절차는 몰라보리 만큼 간소화됐다. 과거엔 수입 승인을 받으려면 중앙은행에 서류를 제출하고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지금은 웬만하면 48시간 안에 허가가 난다. 남선우 코트라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은 “무역대금 지급 규정이 통관 후 180일에서 지난해 30일로 단축돼 기업들이 크게 반긴다. 투자 문의도 몰라보게 늘었다”고 전했다. 또 5월엔 2019년부터 묶어뒀던 외국기업의 과실송금 제한도 풀었다.   개혁 성과를 유보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충격요법에 따른 반짝효과라는 논리다. 한국의 산업은행 격인 방코나시옹의 에두아르도 헤커 전 행장은 ‘표면적’이라고 평가한다. “국제 경쟁력은 더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통해 확보되는데, 아직 그런 변화가 시작되지도 않았고, 경제를 보다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다.”   또 법인세보다 관세를 덜커덕 먼저 내린 탓에 수입품이 밀려들자 내수기업들은 아우성이다. 개혁의 순서가 뒤엉켰다는 불만이다.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산업연합회(UIA) 마르틴 라팔리니 회장은 “자유롭게 경쟁하라면서 국내 기업들만 모래 주머니를 차고 뛰게 한다”고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가 플로리다 스트리트의 노숙자 가족. 김상진 기자 페소 강세의 그늘도 짙다. 수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입품이 밀려들고 있다. 목축국가 아르헨티나에 곧 쇠고기가 수입될 판이다. 해외소비는 성큼성큼 늘어 지난 1월 해외 카드 사용액이 7년 만에 최고치(6억4500만 달러)를 찍었다. 그러니 경상수지 적자는 자꾸 불어 가뜩이나 모자라는 외환보유액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3월 경상수지 적자는 16억7400만 달러로 밀레이 취임 후 최대폭이었다.   그런데도 페소가 강세인 건 정부의 개입과 IMF의 지원 의지가 확실하고, 시장도 이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유지상주의자 밀레이도 외환시장만큼은 꽉 움켜쥐고 있다. 이게 과도기적 역설인지, 곧 깨질지 모를 살얼음판인지, 시간이 좀 지나봐야 알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감대는 확실해 보인다. 실패한 포퓰리즘 경제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이다. 라팔리니 회장은 기업인들을 ‘생존자’로 부른다. 격변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이젠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 혁신과 경쟁으로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고 한다.   “밀레이에 익숙해져 과거로 못 돌아갈 것” 서민층에 속하는 택시 기사들은 압도적으로 밀레이 편이다. 취재팀이 33회에 걸쳐 현지 택시와 우버를 이용하면서 설문한 결과 32명이 지지를 표명했다. 우버 드라이버 다니엘 에두아르도는 “이번에 바뀌지 않으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기사 앤젤 프란스시코도 “많은 것이 바뀌고 있고, 사람들도 점점 희망을 갖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 밀레이 퇴임 후에도 개혁조치들은 유지될까. 밀레이와 결이 다른 사람들도 지속가능성을 높게 본다. 페로니스트 정부에서 산업부 장관(2019~22)을 지냈던 마티아스 쿨파스는 “개혁의 일부는 지속가능하다. 특히 재정준칙과 원칙적인 통화관리는 앞으로도 오래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방향이 옳고, 성과가 확실한 데다, 많은 국민이 이에 적응했기에 개혁을 되돌릴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아르헨티나 최대 회계법인 리식키리트빈의 세자르 리트빈 대표는 “밀레이가 워낙 많이 바꿔놨고, 이젠 사람들이 그에 익숙해져 예전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부에노스아이레스=미주중앙일보 남윤호·김상진·장열 기자

    2025.05.10 00:01

  • 당비+국고 연 수백억…돈방석 오른 정당들

    당비+국고 연 수백억…돈방석 오른 정당들

     ━  돈방석 오른 정당들   “(중앙)당사까지 매각 안 해도 됩니다.”   2월 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선거법 위반 2심을 앞두고 당 핵심 관계자가 한 말이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당선무효형(벌금 100만원 이상)이 확정되면 민주당은 지난 대선 때 받은 선거보조금 434억여원을 반환할 처지였다. 일각에선 2004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처럼 당사라도 팔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2심 무죄 판결로 한숨 돌렸다가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으로 민주당이 다시 긴장하게 됐다. 만약 당선무효형으로 확정된다면 어떠할까. 민주당은 400억원이 넘는 거액을 마련할 수 있을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중앙SUNDAY가 2일 중앙선거관리위로부터 받은 각 정당의 지난해 회계 보고서에 따르면 민주당이 보유한 현금 또는 예금은 450억8919만원(2024년 12월 31일 기준)이다. 민주당의 자산 중 규모가 가장 큰 중앙당사(건물 67억5000만원, 토지 125억원, 공시지가 기준)를 팔지 않아도 434억여원을 반환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당장 현찰로 내더라도 16억원 정도가 남는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국민의힘도 민주당만큼은 아니지만 ‘현금 부자’다. 72억601만원의 현금 또는 예금을 확보하고 있다. 대신 중앙당사를 비롯한 건물과 토지 자산이 각각 215억원, 642억원(공시지가 기준)으로 민주당의 4.5배다.   관련기사 3년 만에 또 ‘큰 장’ 선다…양당, 이번에도 200억 챙길 듯 팬덤·효능감에…‘1000원 당원’ 가파른 증가세 양당 작년 여론조사엔 70억씩 펑펑, 정책개발비는 푼돈 선거비 이중 보전? 독일·영국·일본 등선 꿈도 못 꿔 양당의 상황은 10년 전만 해도 사뭇 달랐다. 2015년 민주당의 재산 총액은 77억8500만원. 건물도 없었다. 현재 민주당의 총 재산은 657억3100만원이니 10년 만에 무려 8.4배가 늘어났다. 445억4600만원의 자산을 갖고 있던 국민의힘도 1198억5400만원으로 2.7배가 늘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이뿐만이 아니다. 민주당은 2016년 중앙당사(서울 여의도 장덕빌딩)를 193억원에 구매했다. 이중 80% 정도인 122억원을 은행에서 빌렸는데 5년 만에 모두 갚았다. 국민의힘도 민주당사에서 300m 떨어진 남중빌딩을 2020년 7월 480억원에 사면서 320억원가량 은행에서 빌렸다. 국민의힘도 지난해 이를 모두 갚았다고 한다. 현재 두 건물의 추정가는 각각 341억원, 568억원이다. 양당은 지난 10년간 1000억원 가까이 ‘조달’했다는 의미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어떻게 가능했을까. 전문가들은 “매년 끊임없이 들어오는 현금”을 꼽는다. 국고에서 받는 보조금, 당원들이 내는 당비, 후원회의 기부금 등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342억5800만원, 국민의힘은 205억2700만원의 당비를 걷으면서도 혈세(국고 보조금)로 각각 438억1000만원, 411억5200만원을 받았다. 그렇게 지원받은 양당이 지난해 쓰고 남은 이월금은 민주당 450억8900만원, 국민의힘 72억600만원이었다.     유성운·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5.05.03 02:05

  • 팬덤·효능감에…'1000원 당원' 가파른 증가세

     ━  돈방석 오른 정당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매년 수백억원에 달하는 당비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최근 몇 년간 급증한 당원 덕분이다. 정당 정치가 발달한 세계 주요국 정당들은 당원 감소와 정체로 어려움을 겪지만, 한국은 당원이 되려 폭증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영국 노동당은 2015년 38만8000명에 달했던 당원은 2024년 30만9000명으로 줄었다. 보수당도 같은 기간 15만4000명에서 13만1000명이 됐다. 하지만, 민주당과 국민의힘 당원은 2015년 각각 267만1000명, 302만 명에서 2023년엔 각각 512만9000명, 444만9000명으로 늘었다. 1.5~2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일정 기간 당비를 내면 당 대표나 대선 후보 선출 투표권이 주어지는 권리당원(민주당)과 책임당원(국민의힘) 증가세는 더욱 가파르다. 민주당 권리당원은 25만6000명→150만4000명, 국민의힘 책임당원은 37만8000명→91만8000명으로 늘었다.   관련기사 당비+국고 연 수백억…돈방석 오른 정당들 3년 만에 또 ‘큰 장’ 선다…양당, 이번에도 200억 챙길 듯 양당 작년 여론조사엔 70억씩 펑펑, 정책개발비는 푼돈 선거비 이중 보전? 독일·영국·일본 등선 꿈도 못 꿔 정치권에선 한국의 당원 폭증 배경으로 ‘팬덤’과 ‘효능감’을 꼽는다. 특정 정치인의 지지층이 대거 정당으로 유입됐고, 이들이 각 정당의 주요 결정에 깊숙하게 관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6개월, 국민의힘은 3개월 1000원씩 내면 권리(책임)당원이 되기에 ‘문턱’도 낮은 편이다.   2017년 민주당 당원 증가가 대표적이다. 권리당원이 2016년 28만7000명에서 이듬해 83만4000명으로 3배 이상 늘었다. 대부분이 ‘문빠’라고 불렸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지층으로 분류됐다. 이후엔 이재명 후보의 ‘개딸’로 이어졌다. 지난 총선 공천과정에서 이들은 비명계 후보들을 ‘수박(민주당 비명계를 멸시하는 표현)’으로 지칭하며 낙천 여론을 이끌었다. 당시 한 의원은 “처음엔 이들을 이용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우리가 이용당하고 있더라.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셈”이라고 토로했다.   윤왕희 성균관대 교수는 “정당 정치가 발달한 국가에선 지역당을 중심으로 당원이 증가하는 반면, 한국은 주요 선거를 전후해 중앙당 중심으로 당원이 늘어난다”며 “팬덤이 주요 정치 결정을 좌우하게 되면 다수 민의와는 어긋난 결정도 정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5.05.03 01:31